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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5화 (25/160)

25화. 황실 초대 준비

모두가 기대했다.

라미엘이 내놓은 루이반 광산을 아무도 사지 않기를.

한두 푼도 아니고 몇천억 파브나 되는 큰돈을 황실이 아니고서야 누가 한 번에 지불한단 말인가.

상품의 마력석이 나오는 광산이라서 규모는 아주 크지 않더라도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워낙 비싼 가격이라 몇 년 분납하는 조건을 들이밀며 거래를 시도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거래처의 끝판왕 ‘황실’이 등장하고야 말았다.

일시불이 어렵다면 두 번에 나누어 내는 것은 가능하다는 답변에 200로베를 선납하고 1년 후 120로베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결국 체결되고야 말았다.

이쯤 되니 루이반의 재력이 궁금해졌다. 알짜배기라곤 해도 가진 중에는 중급 정도라는 광산이 320로베나 받는데, 그렇다면 큰 것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매장량을 자랑한다는 것일까.

루이반이 마음만 먹으면 황실과 대립 구도에 충분히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황실은 그 누구보다도 라미엘이 르아넬로를 택한 걸 다행으로 여길 것이었다.

르아넬로가 돈이 많기는 하지만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영향력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세력을 키우지 않겠다는 너무도 확실한 증표나 다름없다. 그런 와중에 떡하니 실한 광산까지 하나 팔아 치운다니 황실 입장에선 더더욱 안심이 될 테고.

황실의 상위 마법사들이 만들어 파는 보안 장치가 설치된 마력석을 주렁주렁 달고 루이반 저택 한가운데 전시된 마린의 거미줄을 보고 있자니 레이는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값은 하네. 진짜 예쁘긴 하다.”

값비싼 보석 목걸이니 묵직하고 큰 온갖 보석들로 장식됐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목에서부터 쇄골을 내려와 가슴 위까지 우아하게 퍼져 내려오는 목걸이는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줄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목에서 내려갈수록 푸른빛을 띠도록 아래쪽으로 블루 다이아몬드를 많이 써서 전체적으로 바다의 파도를 연상하게 했다. 마린의 거미줄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작품이었다.

이음새 줄도 전부 보석을 세공해 만든 작품이라 조명이 없어도 발광하는 것처럼 반짝였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수백 수천의 다이아몬드 사이에 유색의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의 보석이 포인트처럼 박혀 있었다.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보통의 보석이 아닌 예술 작품이었다.

마린의 거미줄을 만든 장인 마지는 애초에 판매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오랜 시간을 들여 최상의 보석들로만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들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눈이 튀어나올 가격이 산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보석점의 기술력과 감각을 선보이기 위해 전시용으로 두고 있던 예술품인 마린의 목걸이는 처음으로 주인을 찾았다.

“푸엥, 안 돼. 여기 근처로는 오지 마. 이거 망가지면 너랑 날 팔아도 수습 못 해.”

주인의 미친 짓에 하인들은 내색은 안 했지만, 아무래도 검은 개가 집안에 들어와 불길한 일이 시작되는 것 같다고 뒤에서 쑥덕거렸다.

“마력석을 갈아 겉을 코팅해서 강도를 높였기 때문에 말이 밟고 지나가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고작 진열대가 넘어지는 걸로는 괜찮을 게 분명합니다.”

윌포프가 핼쑥한 얼굴로 말했다.

마린의 거미줄을 구입한 이후 대체적으로 집안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그중 으뜸이라면 집사와 행정관이었다. 표정은 평상시와 같이 평온한데, 자세히 살피면 스멀스멀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1년이면 떠날 사람이 1,800억을 거머쥐었으니 이럴 만도.’

저 같아도 앓아누웠을 일이라고 레이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나. 앞으로 더더욱 사치를 부릴 전망인데.’

1년 뒤 계약금을 받을 것이긴 하지만 1,800억짜리 목걸이에 앞으로 생길 장신구와 드레스까지 몽땅 챙겨 간다면 자신의 미래 곳간은 더더욱 두둑해질 전망이었다.

레이의 행복한 청사진과는 달리 윌포프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심히 불안했다.

‘주인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라미엘은 레이에게 유독 무른 구석이 있었다. 본인은 이 사실을 아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윌포프에겐 뭔가 좋지 않은 조짐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태자 알현 때 레이가 입을 옷을 직접 점검하였다.

***

황실 입성 사흘 전.

아침부터 하인들이 분주히 의상실을 오갔다.

황실 나들이는 루이반 공작 부부의 첫 공식 행사였다. 라미엘의 작위 수여식이 이루어지는 데다가 루이반 마님의 첫 대형 행사였기에 고용인들은 더 철저히 준비를 했다.

그 일환 중 하나는 바로 루이반에서 안주인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드레스를 손보는 일이었다.

“보석이 아니고 드레스를?”

매 분기마다 달리 유행을 타는 게 드레스였다. 다음 해는 어떤 디자인, 어떤 색상의 드레스가 유행할지 상인들이나 디자이너들도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웠다. 매 분기가 끝날 즈음 다음 분기 유행의 조짐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오랜 시간 동안 보관하고 있으면 분명 상하기 마련이다.

‘내가 입는다고 윌포프가 다 삭은 걸 갖다 주는 건 아니겠지?’

마린의 거미줄 이후 윌포프의 무표정은 한층 더 냉해졌다.

표정이나 어투가 달라진 것은 없으나 한층 더 레이의 생활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거기서 그녀는 윌포프 이면의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금 어디선가 1,800억짜리 사고를 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일 터. 이른바 세심을 가장한 감시였다.

“마님, 걱정 마세요. 드레스에 보존 마법을 걸어 두어서 상태는 아주 좋답니다.”

걱정하는 레이를 보며 안나가 대답을 해 주었다.

귀족 사회의 역사 속에 드물게 등장하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의 3대 루이반 부부. 가문의 드레스를 제작한 루이반의 3대 가주는 로맨티시스트였다.

그는 아내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최선의 드레스를 만들었다. 몇 년에 걸쳐 완성한 드레스는 루이반 부부의 10주년 결혼기념식에 처음 공개되었고, 부인은 그 후 그걸 사랑하는 딸에게 물려주었다.

딸은 그 드레스를 자신의 결혼식에 입었고, 이후 그 드레스를 새로이 손봐, 여전히 사이좋은 부모님의 20주년 결혼기념일에 다시 루이반으로 보냈다. 그게 시초가 되어 그 이후 루이반의 안주인이 입는 공식적인 옷이 되어 왔다.

오랜 시간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건 보존 마법의 덕이 컸지만, 매 주인마다 조금씩 다르게 디테일을 바꿔 유행에 어느 정도 맞춰 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며 반박하려던 레이의 입이 다물렸다. 대신 감탄이 나왔다.

눈처럼 하얀 튜브톱 드레스는 허리 뒤쪽으로 풍성한 드레이프 장식이 달려 있었다.

“세상에나 완성품이라니…….”

귀족들의 드레스는 평소에 입는 것과 지금처럼 행사용으로 입는 옷의 형태가 달랐다.

평상복은 보통 완제품으로 사이즈에 맞는 드레스를 사서 입거나 본인 몸에 맞춰 약간의 수정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행사가 있을 때 입는 공식적인 정석의 드레스는 완제품이 아니라 소매와 상체의 앞뒤 판, 드레스의 앞뒤 자락과 장식천 등으로 부분 부분이 나누어진 옷 조각이었다.

귀족 여성의 고급 드레스는 이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듯 꿰매어 한 벌로 입는 형태였다. 당연히 혼자서는 입을 수 없고 담당 하인이 최소 두 명은 달라붙어 두세 시간을 넘게 매달려야 완성되는 옷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기 전에 속바지에 슈미즈, 페티코트까지 껴입고 때에 따라 크리놀린도 입어야 했다. 그랬기에 입는 사람이나 입히는 사람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드레스가 워낙 비싼데. 유행에 따라 자주 바뀌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었다. 유행에 맞춰 필요 부분만 조금씩 바꾸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분을 바꾸다 보면 거기에 맞춰 전체가 다 바뀌게 되는 법. 조각보 드레스는 조삼모사, 할부냐 일시불이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결국 공식 드레스 역시 돈 많은 귀족들의 사치품 중 하나인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문화 속에서 완제품인 드레스를 대대로 물려주고 있다니.

루이반 가문의 우아한 드레스는 얼마 전에 만든 것처럼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걸 내가 입는다고?”

“그럼요. 이건 루이반 안주인께서 대대로 입으시는 건데요. 마님께서도 응당 입으셔야죠.”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고품격 가문의 드레스에 레이는 죄책감을 느꼈다. 1,800억짜리 목걸이도 모자라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드레스까지 입게 되다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드레스야 가문 소속이니 놓고 가면 된다고 해도, 나중에 진짜 루이반 마님이 스쳐 지나간 내가 이걸 입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찝찝해할까.’

“나 다른 거 입을래.”

“네?”

“너무 멋있어서 아껴 입고 싶어.”

결혼식 때 입겠다고 미뤘다가 식 올릴 땐 아무래도 새 드레스가 입고 싶다고 우겨야겠다는 계획이었다.

“마님, 이 드레스는 주인님께서 직접 챙겨 주셨습니다.”

“네, 맞아요. 그러니 아끼지 말고 입으세요. 마님의 첫 행사라고 주인님께서 어찌나 신경을 쓰시는지.”

“라엘이 내준 거라고?”

“네. 주인님께서 이 드레스를 마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자신들도 이 드레스가 벌써부터 나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며 두 하녀가 주인의 아내 사랑을 드높였다.

‘이걸 왜 나한테?’

이쯤 되니 라미엘의 저의가 궁금해진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1년짜리 계약직 아내에게 하는 대접치고는 너무도 차고 넘친다.

“마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디자이너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드레스는 주인이 바뀔 때마다 유명 디자이너를 저택으로 불러 낡거나 유행에 뒤처진 부분을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손보았다.

그 과정에서 차라리 하나 새로 사는 게 더 나을 법한 금액이 들지만 결과물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해서 과정과 비용은 금세 잊히곤 했다.

“먼저 드레스를 입어 보시고 결정하세요.”

그러면서 안나가 레이의 탈의를 돕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안나. 손에 그건 뭐니?”

“코르셋입니다.”

“그걸 입으라고?”

“네. 마님의 위상을 주변에 더 알리기 위해서 이걸 입고 기선을 제압…….”

“잠깐, 잠깐. 그거 불법 아냐?”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코르셋.

여자들은 20인치대 허리를 갖기 위해 코르셋 끈을 졸라매었다. 가슴과 엉덩이의 풍만함을 극한으로 보이기 위해 시작된 유행은 어느새 부러질 듯 가느다란 허리를 미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그 기괴한 유행의 선두주자는 바로 황실이었다. 선선대 황제의 애첩인 바르바나가 입기 시작한 이후 코르셋은 황실과 귀족들에게 유행처럼 번졌다.

수십 년간 여성들을 조여 오던 코르셋은 현 황제가 법으로 금지하면서 막을 내렸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정부가 극한으로 코르셋을 조이다 온갖 합병증 및 질식으로 죽어 버린 것이 원인이 되어 생겨난 법이었다.

정부로 유행하기 시작해 정부로 끝난 의상.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결말이었다.

“이 정도는 불법이 아니에요. 다들 입고 계신걸요.”

다만 일각에서의 반발이 심해 코르셋 자체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착용을 허용하되 본인 허리보다 1인치 이하로만 조이도록 허용하게 되었다. 레이와 인연이 없던 코르셋이란 속옷이 대형 무대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싫어. 안 입을래. 가뜩이나 큰 무대라 긴장되는데 옷까지 불편하면 어떡해?”

응당 알겠노라 대답할 줄 알았던 마님이 거절하자 두 사람의 얼굴에 난색이 어렸다.

“큰 무대일수록 멋지게 보이셔야죠!”

“허리가 가는 게 왜 멋진 거야? 차라리 나보고 어깨를 키우라고 하지!”

두 사람의 설득이 이어졌지만 레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냥 한번 입어만 보세요. 절대 많이 조이진 않을게요.”

한참 만에 타협안이 나왔다. 레이도 지쳐 고개를 끄덕했다.

“어휴. 윌포프 님은 이렇게 힘 뺄 줄 아셨나 보다.”

“……코르셋이 집사 작품이었어?”

어쩐지 이 정도로 싫다고 했으면 물러났을 아이들이 집요하게 매달린다 싶었다. 윌포프는 어떻게든, 어떤 형태로든 1,800억을 빼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주둥이가 쌓은 업보구나.’

지은 죄가 생각나 레이는 조용히 코르셋에 몸을 넣었다. 유주가 알면 대박이라며 기함할 일이었다.

레이 역시 살면서 처음 입어 보는 극악의 고문 도구에 치를 떨면서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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