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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6화 (26/160)

26화. 작위 수여식

작위 수여식 당일.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드디어 마린의 거미줄을 착용하는 일만 남았다.

목걸이 자체가 워낙 화려한지라 레이의 드레스는 기본 디자인에서 수정하는 부분 없이 몸에만 맞추는 선에서 끝났다.

“주인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윌포프가 라미엘의 준비가 다 끝났음을 알렸다. 레이가 뒤를 돌자 짙은 푸른색 정복을 입고 한껏 치장한 라미엘이 보였다.

‘마린의 거미줄은 라미엘이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라미엘이 작정하고 차려입으니, 이 남자가 처음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귀족들이 받은 충격을 대강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곁에 붙어 있던 자신조차도 입이 벌어지는데 처음 본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라미엘은 입을 턱 벌리고 있는 레이를 지나 마린의 거미줄이 있는 장식장에 손을 대었다. 그의 손길에 진열장 유리가 사라지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식장 옆면을 밀고 그 안에 보이는 작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뒷면이 위로 올라가며 그 안에 있던 진짜 마린의 거미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이반 공작만이 열 수 있도록 설계된 장식장이었다. 목걸이 이음새의 탈착 역시도 그만이 가능했다.

“레이, 이리 가까이 와요.”

라미엘의 부름에 레이는 멍한 정신을 수습하고 벌어진 입을 다문 뒤 가까이 다가갔다.

180로베라는 어마어마한 물건을 라미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서류에 서명하는 펜 만지듯 덥석 집어 레이의 목에 걸어 주었다.

‘1,800억을 몸에 걸었다!’

레이도 구경만 했지 며칠간 한 번도 착용해 보지 못한 작품이었다. 보안을 위해 쉬이 꺼내 보지 않았던 탓이었다.

보석을 보석으로 이어 만든 작품이니 무거울 거라 생각했는데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가볍지? 보석이 가짜인가.”

“경량 마법을 걸어서 그렇습니다.”

레이의 말에 윌포프가 대답했다.

수많은 보석에 강화 마법에 경량 마법까지. 안 비싸면 이상할 장신구였다.

“라엘, 어때요? 드레스랑 잘 어울려요?”

“네. 레이랑 아주 잘 어울려요. 그대 눈동자랑 같은 색이라 그런가.”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물어본 건데.

라미엘의 미소가 보여 주기용이라는 걸 잘 안다. 주변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대사인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 지으며 하는 라미엘의 말에 레이의 심장은 사정없이 떨리고야 말았다.

***

팔짱을 낀 루이반 부부가 연회장에 등장하자 좌중은 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기가 질릴 라미엘의 미모야 둘째 치더라도, 그 옆의 인물에게 시선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명 보석점 ‘마지’에 들어서면 정면에 진열대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이 마린의 거미줄이었다. 들어선 사람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가게의 상징인 작품이었다.

그런 마린의 거미줄이 보이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설마 저게 팔렸을까 했다. 아마도 수선할 부분이 생겨 고치는 중일 거라 여겼다.

그들 중 루이반 부인의 소문을 들은 몇몇은 보석점 주인이자 디자이너인 마지에게 행방을 묻기는 했는데, 그녀는 말없이 그저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해 궁금증만 증폭시켰었다.

설마 정말 루이반이 저걸 샀겠어? 마녀의 목에 마린의 거미줄이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 여자 허세 부리는 꼴이 가관이라 말했던 이들은 예의 목걸이가 도난 방지 마법이 몇 중으로 걸린 유리벽이 아니라 레이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벌어지는 입을 가려야 했다.

“오랜만입니다. 루이반 공작.”

올린 공작이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가까이 다가오며 악수를 청했다.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라미엘이 화사하게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두 사람의 인사를 시작으로 분위기가 풀어지며 여기저기서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형식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평온을 가장했지만 다들 라미엘 옆에 있는 레이의 목걸이에 시선이 가는 걸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귀족들의 알량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루이반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차마 저 마녀에게 알랑거리는 말은 건네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특히나 올린 공작은 딸아이에게 티파티에서 레이알렉시스가 얼마나 잘난 척을 하던지 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고 전해 들었기에 더 그랬다.

황실에 처음 오는 졸부 집안 여식 주제에 주눅도 들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것도, 저 엄청난 목걸이를 원래 하던 것인 양 매끄럽게 소화하고 있는 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 딸이 루이반 공작 부인이 되지 못한 게 가장 불만스러웠다. 이건 모든 이들의 아쉬움이자 불만인 사항일 터였다.

일각에서는 라미엘이 정식으로 작위를 받기 위해 대강 아무하고나 결혼한 뒤 머지않아 이혼을 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별장을 다닌 건 소문일 뿐이고 공작 자리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까지 눈속임 약혼으로 결혼을 피할 시간을 버는 것이라는, 제법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그간 결혼 이야기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라미엘을 떠올려 보면 이는 꽤나 신빙성이 있는 소문이었다.

조만간 재혼법 개정이 된다고 하니, 루이반 공작이 거짓 결혼을 끝내는 그때를 노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었다. 그래서 아니꼬운 것도 참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한 것인데.

“으음, 이거 술인가.”

“술 맞아요. 그러니까 적당히 마셔요.”

뭐지, 저 존대는. 지금 루이반 공작이 레이알렉시스한테, 자기 아내한테 높임말을 한 거야?

“아, 어쩐지. 약간 알딸딸해지는 기분이 든다 했어요.”

이 말에 이어 레이가 라미엘의 귓가에 무어라 작게 속삭이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활짝 웃었다.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에 이혼 가설을 세우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태자 전하 앞에 설 거니까 많이 마셔 둬야겠다. 라미엘 님, 내 어깨에 손 올리고 친한 척하면서 활짝 웃어요. 다들 이쪽을 보고 있네요.”

레이의 귀엣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미엘이 다정히 포즈를 취했다.

“압니다. 이쯤에서 한번 보여 주려고 했어요.”

마차에서 사전에 합의한 내용이었다. 오늘 하루 최대한 밀착해서 다니고, 필요하다면 포옹까지도 하겠다고 결의하고 온 터였다.

황실에서는 라미엘을 초대하면서 아예 연회 형식으로 판을 벌였다. 정식 공작위를 수여함과 동시에 여러 사람 앞에 두 사람을 알릴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명목이었다.

연회 자리를 빌려주는 것 하나로 루이반 가문이 황실 라인임을 만천하에 보여 주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이는 대목이었다. 하여 연회의 장소도 태자궁 정원이었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태자의 이름을 딴 흰 건물, ‘베제’가 있는데, 황제가 병상에 누운 후로 황실 연례회나 중요 파티는 주로 이곳에서 열리곤 했다.

“파르베제 태자 전하와 르누아 태자비 전하 드십니다.”

태자 부부의 입장 알림에 사람들이 손에 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제히 문 앞 가운데 공간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는 것은 연회 주최자에게 표하는 일종의 예의였다. 주최자가 처음부터 동석을 하면 상관없었으나 지금처럼 나중에 등장할 때 손을 비워 박수를 쳐 주기 위함이었다.

연회 규모가 큰 경우에 행해지는 행동으로, 이렇게 파티를 열어 주어 고맙다는 의미였다. 지금처럼 문 앞 공간을 비우는 것은 황족을 위한 예의가 추가된 것이었다.

커다란 문이 열리며 태자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자들은 무릎을 살짝 굽혔고 남자들은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공, 그거 진짜인가?”

태자는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이들의 인사를 뒤로한 채 라미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거 때문에 그랬던 거냐고.”

연회에 와 준 사람들에게 예의상 인사, 혹은 알은체라도 하기 전에 내뱉은 게 주위 사람들이 도통 모를 말이었다.

‘이거’와 ‘그거’가 대체 뭐람.

하지만 당사자는 바로 알아들은 듯 대답을 했다.

“네.”

“마린의 거미줄, 공이 그대의 부인을 위해 산 거라고?”

다른 이들이 전부 목구멍 밑으로 밀어 넣었던 질문이 태자의 입을 통해 나왔다.

파르베제의 물음에 라미엘이 레이의 허리를 가볍게 팔로 감싸 안았다.

“어머.”

르누아가 라미엘의 행동을 보고 작게 감탄하며 레이알렉시스를 찬찬히 살폈다.

이 사회에 모습을 보인 지 얼마 안 되는, 작위 없는 신흥 귀족으로 눈에 띄는 별다른 특색은 없는 집안의 딸이란 건 알고 있었다.

외형이 아름다운 건 알고 있었으나 그에 따른 소문은 그리 썩 좋은 것 같지 않았는데, 어찌 된 조합인지 흥미로운 건 태자 부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엘, 전하 앞이잖아요.”

레이가 타이르듯 작게 라미엘의 귀에 속삭이며 부끄러운 듯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녀의 이런 작은 움직임에도 햇살을 받는 바다처럼 마린의 거미줄은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광산 하나를 잡아먹은 보석에도 그다지 감흥이 없던 라미엘은 레이의 목에 걸려 반짝이는 보석이 처음으로 예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흡.”

레이가 작게 숨을 들이켜자 그러모아 놓은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제 아내에게 묻히지 않을 보석을 찾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레이는 징그러운 소리 말라며 태자 부부 앞이건 황제 앞이건 주먹을 휘둘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말을 하는 당사자는 이런 느끼하고 오글오글한 발언을 세상없이 달콤하게 만드는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다.

“허어.”

파르베제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숨이 터져 나왔다. 지금 내가 뭘 들었지, 하는 적나라한 표정에 르누아가 살며시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 축하하네.”

파르베제는 축하 인사를 남기고 르누아와 무대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방금 태자 전하의 이거 때문에 그랬느냐는 질문은 마린의 거미줄 때문에 광산을 팔았냐, 이 말이죠?”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이 고개를 살짝 끄덕해 보였다.

애초에 자신이 노리던 최상의 목걸이를 생각지도 못한 타인이 차고 있는 것을 본 기분은 어떨까.

물론 목걸이를 포기한 대신 알짜배기 광산을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인수했다. 남는 장사였으니 이 광경을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레이, 태자 앞에서 긴장도 안 하고 연기 잘하네요. 크레하의 훈련 덕인가?”

“아, 그러게요. 크레하 경의 훈련이 효과가, 흡, 있긴 한가 봐요. 오늘 푸엥 담당으로 지정해 주고 왔는데, 갑자기 미안해지네요.”

기사단장을 자신의 반려견 돌봄 담당으로 지정하는 마님의 패기에 라미엘은 웃음이 나왔다.

“루이반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좀 편한 사람이 크레하 경뿐이라 그런가. 단장님인 거 알아도 부탁할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네요.”

“마음이 편해요?”

라미엘의 질문에 레이가 조금 씁쓸한 얼굴로 씩 웃었다.

“음, 뭐랄까. 루이반에서, 후. 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같아서?”

“……진심이라.”

맞는 말이었다. 계약 결혼의 진실을 아는 집사와 행정관은 표면적으로 마님을 모시는 걸 테고, 그 외 사람들은 그저 ‘주인님이 절절매는 마님’이기 때문에 극진한 것뿐이다. 레이는 눈치가 빠른 여자니 이런 점을 진즉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좀 전에 마신, 후우. 술이 생각보다 도수가 좀 높았나.”

라미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왠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유일하게 진심으로 대한다는 레이의 말이 크레하만 믿는다고 들리는 듯해 신경이 쓰였다.

“아, 라엘. 이제 작위 수여하려나 봐요.”

레이가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팔을 살며시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습니까?”

“네? 뭐가요?”

“취기 오르는 것 같다면서요.”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혼잣말이었다. 지금만큼은 라미엘이 레이알렉시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댔다.

“음, 사실 아까부터 속이 조금 안 좋아서요.”

코르셋 때문에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긴장된다고 홀짝거린 식전주의 도수가 제법 높은 게 분명했다.

“태자 앞에선 떨지도 않고 잘 버티더니 긴장했었나 보군요.”

황족을 가까이서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여 긴장이 됐던 것인데 태자가 생각보다 너무 친근하게 접근을 해서 황족을 만났다는 자각도 들지 않았다.

“공, 그거 진짜인가?”

친구가 ‘야, 너 진짜 그랬냐?’라고 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라서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던 모양이다. 오히려 옆에 있는 태자비의 포스가 더 대단한 느낌이었다.

“……음. 맞아요. 후우. 긴장하긴 했었네요. 역시 태자 부부 앞에서 하는 결혼은 좀 떨리는군요.”

“레이, 떨려요?”

“황실에서 결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본인이 생각하고 벌인 일인데도?”

“그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아서 떨릴 거라곤 예상 못 했었어요.”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면 루이반 가문은 물론 르아넬로가도 적잖이 놀랄 터였다.

아무도 모르는 루이반 부부의 결혼은 그제 밤에 결정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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