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결혼식 (1)
레이의 몸에 맞춘 가문의 드레스를 입어 보는 날.
아내 사랑 넘치는 라미엘은 당연한 수순처럼 레이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방 안에 있던 시종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벗어나 둘만 있도록 해 주었다.
드레스는 전대 주인의 디자인과 달리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깔끔한 원형 그대로였다. 흑발에 화사한 외모의 레이와 대조되는 심플한 새하얀 드레스는 정반대의 조합임에도 아주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패션에 둔한 라미엘의 눈에도 레이는 훌륭하게 가문의 드레스를 소화해 내고 있었다.
“라미엘 님,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이걸 입어도?”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레이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레이와 잘 어울려요.”
아주 잠시 입을 다물고 라미엘의 얼굴을 보던 레이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쩜. 책을 읽어도 그거보단 감정이 실렸겠네요.”
레이의 빈정거림에 그가 피식 웃었다. 라미엘에게 그녀의 투정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더 달라고 주인에게 짹짹거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래요. 차라리 그 같잖다는 웃음이 더 진실돼 보여요.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편안히 계시죠?”
“입어요. 그러라고 만든 옷이니 입어야죠.”
라미엘의 모친은 생전에 이 드레스를 입고 싶어 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아마도 이걸 한 번이라도 걸쳐 보면 자신의 존재가 조금은 나을 거라 스스로 위안 삼으려 했을 터였다.
모친이 그 소망을 입 밖으로 내었던 건 단 한 번이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단지 ‘입어 보고 싶다.’ 그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루이반에서 돌아온 반응은 어린 라미엘의 눈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고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감히 평민 첩 주제에 안주인만 입을 수 있는 걸 탐하다니.”
“역시나 저것은 반반한 낯짝 하나 믿고 안주인 자리를 노리고 있었구나.”
이어진 매질이 원인이 되었을까. 가뜩이나 약하던 모친은 그 후 체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1년도 채 못 버티고 세상을 떠났다.
“……괜찮아요?”
“레이가 입어도 괜찮다니까요.”
대단한 안주인만 입어야 한다는 옷은 평민이자 임시 마님인 레이가 입어도 아주 잘 어울렸다.
‘이리 별것도 아닌 것을. 그저 옷일 뿐인걸.’
루이반 공작이 된 그에게 드레스는 여전히 그저 별거 아닌, 그 누가 둘러도 상관없는 천 쪼가리일 뿐이었다. 가문의 전통이니 뭐니 하며 드레스 하나로 호들갑 떠느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영영 없애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
현재 ‘유일한’ 루이반인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의 어른은커녕 영향력 있는 친척도 없을 뿐더러, 하다못해 본인에게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애정조차 없다.
사실상 루이반은 이제 라미엘의 마음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는 가문인 것이다.
“아뇨. 드레스가 아니라 라엘이요. 라미엘 님, 당신 괜찮으냐는 말이었어요.”
라미엘이 대답 대신 그게 무슨 의미냐는 표정을 지었다.
“좀 안 좋아 보여서.”
“내 표정이 안 좋습니까?”
“음,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데 풍기는 기운이 날카로워요.”
자신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기운까지 그녀는 눈치챘다. ‘레이알렉시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진즉 마쳤고, 그녀가 제 예상을 웃도는 인물인 걸 알고 있음에도 놀라운 일이었다.
‘역시 이 드레스는 입는 게 아니었나 보다.’
두 번은 못 입을 옷이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레이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결혼까지 해치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라미엘 님, 우리 황실 가는 날 결혼까지 해 버리는 건 어때요?”
레이의 제안에 라미엘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흥미로운 눈빛을 했다.
“여러 귀빈들이 모인 자리이니 모두가 결혼 서약의 증인이 되어 축하해 달라고 하고, 그걸 결혼한 걸로 치면 두 번 귀찮은 일 할 것 없이 한 번에 끝이에요.”
혼약서는 이미 황실에 제출이 됐지만 결혼식에는 두 부부가 서로 혼약서에 서명을 하는 서약식 순서가 따로 있었고, 이 부분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정식 부부가 됐음을 확고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절차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미 혼약서를 황실에 내 버렸기 때문에 결혼식에서 하는 서명은 ‘보여 주기’ 식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결혼식이라는 건 혼약서에 서명하는 순간을 꾸미기 위한 장식 같은 거니까 우린 그런 거 다 떼고 본품만 챙기는 거죠. 돈도 아끼고 시간도 아끼고,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인데.”
레이의 의견을 들은 라미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자에게 연회 음식은 루이반이 담당하겠다고 알려야겠군요.”
라미엘도 이 아이디어가 썩 마음에 들었다. 다만, 작위 수여식과 겸사겸사 때운다고 해도 결혼식은 일생의 행사이니, 내빈들 접대는 이쪽에서 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후루룩 둘이서 가볍게 정해 버린 사실은 아무도 몰라야 했다. 아무리 안주인이 가짜고 임시라고 해도 ‘루이반’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는 대형 행사를 대강 넘길 수 없는 사람은 루이반에 윌포프뿐만이 아니었다.
더불어 르아넬로가도 아무리 태자궁에서 태자를 결혼 서약의 증인으로 삼았다고 해도, 결혼식을 작위 수여식에 곁들여 약식으로 하겠다고 하면 극렬히 반대할 것이 자명했다.
두 가문 사람들의 안정을 위해 루이반 부부는 행사 직전까지 이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쳤다.
얼마나 비밀이었냐면, 르아넬로가 사람들도 몰랐다. 입이 가볍고 명예욕이 넘치는 에이나 르아넬로가 이 소식을 알면,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최소 세 시간이면 온 수도가 알게 터였다. 그래서 레이는 고민 끝에 부모님에게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면 르아넬로 부부가 기함하겠지만 라미엘을 내세우기로 했다. 이른바 미인계 작전으로, 작위가 까마득한 미인이 미소 한번 지어 주면 에이나는 화를 내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대신 에이나가 주변에 자랑을 할 수 있게 르아넬로가에서 별도의 피로연을 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태자는 연회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루이반 공작의 결혼식까지 주최함으로써 확실한 귀족 라인 하나를 잡게 되어 아쉬울 것이 전혀 없으니 당연 허락할 터였다.
하여 금일 연회에서 치러질 결혼식은 루이반 부부 두 사람, 그리고 이 일을 승인해 준 태자 부부 단 네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행사였다.
***
태자가 라미엘에게 토벌전의 공로를 인정하는 훈장과 공작위를 나타내는 훈장을 수여했다.
황제의 대리로 태자가 작위 승인을 하며 수훈식은 끝이 났고, 이제 하이라이트인 결혼식을 가장한 서약식이 남았다. 태자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던 레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찬란한 솔로 인생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 기분으로 레이가 앞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태자 부부와 라미엘이 있는 공개 석상으로 가는 레이의 모습에 의아함을 보였다.
“저 사람이 저길 왜 올라가?”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저곳은 작위를 받는 사람만 올라가는 게 보통 아닌가?”
“역시 졸부라 예의를 모르나 봐요.”
“루이반에서 분명 가르쳐 줬을 텐데.”
“잊어버렸나 보죠. 외울 게 어디 한둘이었겠어요?”
다들 수군거리고 있을 때 태자가 믿지 못할 소리를 했다.
“지금부터 루이반 부부의 결혼 서약식을 진행하겠다.”
누군가가 놀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량 조절에 실패한 소리를 냈다.
“……뭐, 뭘 해요? 헙.”
남자가 급히 입을 다물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내는 잠시 고요해졌다.
라미엘이 레이를 맞이하기 위해 뒤를 살짝 돌아봤을 때가 되어서야 박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큰 충격타를 두 번 받은 셈이었다.
마린의 거미줄로 한 번, 지금의 결혼 서약식으로 한 번.
장난기 많은 태자가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의심하던 사람들은 혼약서가 놓인 테이블을 보고 웅성거렸다. 작위를 받은 그 자리에서 바로 결혼식까지 해치우는 전개에 모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작위 수여식이었기 때문에 참석을 하지 않은 귀족들도 상당수인 데다,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갑자기 결혼 서약식이라니. 서약식이 결혼식 그 자체나 다름없는데, 작위 수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가장 화려하게 치러야 하는 결혼식인데, 아무리 태자궁에서 태자를 서약의 증인으로 세웠다고 해도 루이반급의 가문에서 결혼을 이렇게 해치워 버리다니.
결혼식이라는 건 사실상 만인에게 혼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두 사람이 확실한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큰 행사였다.
두 가문의 결합을 초대한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거창하게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겨 화려한 연회를 즐기는 게 보통이었다. 귀족들이 아닌 평민들도 결혼식을 떠올리면 마을 잔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보통이거늘, 루이반 부부는 그 중요한 서약식 부분을 이렇게 대강 넘기면서도 개의치 않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그냥 지금 보여 주기식으로 하고 나중에 진짜 결혼식을 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가짜 결혼이라는 소문을 잠재우려고 태자 전하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해도 굳이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어요. 그냥 결혼식을 하면 되는 건데.”
무수한 추측과 이야기들이 난무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걸로 결혼식은 끝이라는 생각에 매우 흡족한 상태였다.
서약식이라고 해도 별 특별한 건 없었다. 결혼 서약문이 쓰인 두 장의 종이에 각자의 이름을 정자로 써 넣고 두 장을 나란히 두고 가운데에 황실 인장이 새겨진 도장을 찍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한 장은 부부가 가지고 한 장은 황실에 올리는 것으로, 나중에 이 혼약서의 진위 여부가 문제될 때 황실에 제출한 것과 도장이 같은 위치에서 하나로 맞춰지는 것으로 확인을 했다.
“두 사람은 이로써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태자가 선언하자 장내에 아마도 마지못한 게 분명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아, 속이 후련하다.’
레이에게는 이 박수 소리가 한여름 무더위를 가시게 해 주는 빗소리로 들리는 듯했다. 앞으로 1년, 루이반의 자산으로 펑펑 놀고먹으며 살다가 수도를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에 내가 유주를 못 만났다면. 한국에 못 갔더라면.’
필시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휩쓸리듯 집안에서 찾은 웨버와 결혼해 평생을 무시당하고 르아넬로의 재산이나 빨리며 살았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 이쪽으로 집요하게 시선을 던지던 웨버가 생각났다.
여러 귀족들 중 그 누구보다도 놀란 눈치인 그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내심 이쪽을 흘끗거렸다. 그 모양새가 꼭 저에게 말을 걸려는 듯해서 더더욱 레이는 그가 있는 쪽으로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은 모두의 앞에서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키스를!”
우렁차고 씩씩한 태자의 목소리에 레이의 상념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