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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8화 (28/160)

28화. 결혼식 (2)

“이제 두 사람은 모두의 앞에서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키스를!”

태자의 제안에 레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뭘 어째?’

레이가 방금 내가 무슨 소릴 들었나 싶어 라미엘을 쳐다보았다.

라미엘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없었지만, 레이는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라미엘 빡쳤다!’

당황과 빡침의 이중주 오라가 고요히 루이반 부부를 감쌌다.

태자에게 감히 ‘아니요, 싫어요, 왜 이러세요!’를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느 황족에 비해 가벼워 보이는 언행을 일삼을지라도 차기 황제인 파르베제다.

황족이 가지는 서열과 근본은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간하지 않은 이상 아무리 날고 기는 귀족이라도 그의 명은 무조건 행해야 했다.

그것이 ‘황권’이었다.

미동도 않는 두 사람을 보며 태자가 미소 지었다.

“루이반 부부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

은근한 힐난이 느껴지는 태자의 목소리에 레이의 빠져나갔던 정신은 돌아왔지만 창백해진 낯빛은 돌아오지 못했다.

“어, 어어, 어찌! 어찌 감히! 제, 제가, 아니, 저희가, 흡, 태자 전하 앞에서, 흐읍, 그, 그그, 그런 짓을…….”

퍼렇게 질린 얼굴로 숨까지 헐떡이며 말을 하니, 꼭 반역이라도 저지르라는 소리를 들은 듯 보였다. 태자 옆에 선 태자비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루이반 부인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모양이네. 그런데 관객들이 있어 어쩌나.”

태자비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녀 역시 이 결혼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다만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추궁하는 대신 모두의 앞에서 직접 확인시켜 주라는 의미였다.

너희의 결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겐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나, 내가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니 너희는 알아서 기어라.

……라는 압박이었다.

태자보다 태자비가 더 권력자라더니, 웃으며 하는 가벼운 투정이 무겁게 훅을 치며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 걸리면 내 황금빛 미래는 끝이다!’

라미엘이 머릿속으로 어떤 수를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한 번 뜸을 들인 것으로 시간은 많이 지체됐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부부에게 그만큼의 쇼맨십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레이는 당장에 팔을 뻗어 라미엘의 양 볼을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해요.”

입술이 닿기 직전 아주 작게 사과를 한 레이는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라미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머리카락처럼 차가운 느낌일 줄 알았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레이의 입술에 닿았다.

‘공식 석상이니까 입술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겠지? 이거면 되는 거 맞나? 혀는 안 쓰는 거고……. 어, 잠깐. 얼마나 있어야 하지?’

레이알렉시스의 인생 첫 키스였다.

신분 상승에 목을 맨 모친 에이나는 레이가 연애를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로지 귀족과의 결혼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딸이 허투루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게 촉각을 곤두세웠고, 슬슬 혼기가 차자 귀족 앞에 선보일 수 있는 자리만 만들었다. 귀족은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거라며 연애 같은 건 접근도 못 하게 차단해 왔다.

그런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 한국에서는 노느라 바빠 연애할 생각도, 틈도 없었다.

또래 친구들과 격의 없이 사귄 게 처음이었는데 그 ‘또래 집단’이 주는 즐거움이 너무도 컸다. 더불어 한국의 모든 것들이 다 신기해서 그곳의 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연애는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인데, 일상이 사치할 겨를 없이 매일매일 풍성하고 재미있었기에 더더욱 생각이 나질 않았다. 더불어 레이 주변을 기웃거리던 남자들은 많았으나 그녀의 관심이 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도 크게 한몫했다.

그리하여 모태 솔로인 레이알렉시스에게는 지금의 접촉이 인생 첫 경험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취미 생활 덕분에 이론은 빠삭했지만, 실전은 전무한 인생. 레이는 언제 입술을 떼어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으니 짧게는 할 수 없다. 길게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아 최대한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지, 지금쯤이면 되나? 입술이 좀 저린 거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그래, 지금인 거 같아. 라미엘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데. 설마 라미엘 여, 여자도 패…… 지는 않겠지?’

감은 눈꺼풀 아래 안구를 도록도록 굴려 가며 고민 중인 레이의 등에 라미엘의 팔이 감겼다.

그 동작에 레이가 라미엘의 양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저도 모르게 풀어내고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라미엘이 고개를 틀었는지 자세가 조금 편안해졌고 오래지 않아 입술이 떨어졌다.

레이는 감은 눈을 서서히 떴다. 그와 동시에 정신도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열이 조금씩 몰리고 화끈거렸다.

눈앞의 남자가 찔러 죽일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운 척 그의 품에 얼굴을 푹 처박고 라미엘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연신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라미엘은 여전히 레이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어머나, 세상에. 이리 사이좋은 부부라니.”

태자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멍하게 울렸다.

“공, 이거 공개 석상만 아니었다면 진하게도 했겠어? 아쉬워서 어쩌나.”

태자의 농담에 라미엘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연회가 끝나면 빨리 돌아가려고 합니다.”

태자가 유쾌하게 소리 내 웃었다.

‘근데 왜 저렇게 좋아하지? 헉.’

라미엘의 품에서 어쩌질 못하고 꿈질거리던 레이는 곁눈으로 흘끔 본, 유리창 너머의 정원 시계탑을 보고 나서야 태자 부부의 웃음을 이해했다.

언제 입술을 떼야 하나 하는 고민을 5분이 넘도록 하고 있었다니.

즉, 5분을 라미엘과 키스, 아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다시금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미래의 공작 부인. 죄송해요! 제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어느 정도 터치는 허용했지만 입술까지는 아니었거늘.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축하 연회가 시작되고, 단상에서 내려갈 때까지도 레이는 계속 라미엘의 품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은 부끄러움이 아주 많으시네요.”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레이알렉시스를 루이반 공작 부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오래 했는데, 입술 부르트진 않을까 모르겠네.”

물꼬가 트인 듯 이어진 누군가의 농담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흐음. 방금 전까지 서약식이 다 사기라던 분들 아니신가.”

“사기 연극도 재미는 있는 모양이죠.”

볼품없는 가문의 여자를 받아들인 루이반과 척을 져야 할지, 아니면 친분으로 갈지에 관한 선택의 기로에서 사람들은 슬슬 그 답을 내놓고 있었다.

***

“라엘, 나 좀 잠시 쉬었다 와도 될까요.”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던 레이가 라미엘의 귓가에 작게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건넸다.

“사람들을 잡고 있을 테니 잠깐 쉬고 와요.”

함께 쉬지 않고 사람들을 상대하던 라미엘이었기에 같이 피신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주인공 두 부부가 함께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올 확률이 높고, 그럼 제대로 된 휴식이 아닐 테니 본인이 총대를 메겠단 이야기였다.

라미엘에게 이런 배려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레이는 잠시 멈칫했다.

“고마워요. 후으. 정말, 정말 고마워요.”

입술 만남 이후 내내 그의 시선을 피하던 레이가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조금 놀란 레이는 이내 라미엘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잠시 실례할게요. 말씀들 나누세요.”

레이가 그의 팔을 가볍게 터치하고는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그 뒤를 곧바로 하녀 두 명이 따랐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한창 연회가 무르익은 중이라 그런지 휴게실로 가는 복도는 떠들썩한 연회장과 다르게 한산했다.

“후우, 후으.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아.”

이젠 빈말로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긴장한 탓인지 황궁에 도착했을 때부터, 정확히는 루이반에서 출발할 때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을 상대하고 중간중간 마신 술들이 벌써 발효가 되는지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그녀의 말에 뒤에 있던 두 사람이 사색이 되었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공작님께 알릴까요? 마님, 안색이…….”

두 사람은 이번에 처음 보는 하녀들이었으나 레이가 원래부터 루이반 사람인 것처럼 절절매고 있었다. 아마도 모두의 앞에서 라미엘과 길고 긴 키스를 하는 것을 보고 알아서 기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아니. 의사까진 안 불러도 되고, 라엘한테 말하고 온 거니 굳이 알리지 않아도…….”

“알렉스.”

그때 누군가 레이를 다정히 불렀다.

레이와 두 하녀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알렉스. 잘 지냈어?”

시선을 스쳐 보내지도 말자고 생각했던 전 약혼자 웨버였다. 레이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잘 지낸 것 같네.”

자문자답을 하며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귀족의 등장에 레이 뒤의 두 하녀는 일단 목례를 했지만 경계 가득한 눈동자는 지우지 못했다.

마님이 혼자 있는 틈에 그녀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나타난 외간 남자. 당연히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마린의 거미줄 하나만으로 대대손손 인생 역전을 하고도 남는다. 거기다 레이가 걸치고 있는 가문의 드레스와 장신구까지 합치면 그 금액은 더더욱 커졌다.

그러니 방어가 허술해질 때를 노려 해코지를 하고 물품을 훔쳐 다른 대륙으로 도망가는 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여 레이는 하녀로 알고 있는 뒤의 두 사람, 케이와 엘은 경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실 겉으로는 보통의 하녀인 척하지만 실은 검을 다룰 줄 아는 무인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테일러가 찾아낸 인재였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만날 줄 몰랐는데.”

웨버는 하녀들의 냉한 기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더욱 간격을 좁혀 왔다.

“…….”

‘지가 따라와 놓고선 뭘 이런 식으로 만날 줄 몰라?’ 속으로 욱하긴 했지만, 그 어떤 말이건 이자와는 단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에서부터 계속 주변을 얼쩡거리며 틈을 노리는 웨버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 눈빛을 알았기에 비록 얼굴을 똑바로 보진 못해도 더더욱 라미엘과 친한 척하며 붙어 있었는데,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 그 사실을 잠시 잊고 말았다.

“잠시 시간을…….”

“죄송합니다. 저희 마님께선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쉬셔야 합니다.”

라이트 백작가의 차남으로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파악한 케이가 그의 접근을 막았다.

신분제가 엄격한 수도였기에 감히 하녀가 귀족 가문 자제의 발언을 멈추거나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공작 부인께 예를 갖추지도, 사적 거리를 지키지도 않는 자에겐 그에 맞는 대접이 필요했다.

두 사람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마님의 안전과 보호였고, 그걸 위해 고용된 자들이었으니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상대는 마치 마님이 공작님에게서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다가온 타이밍이 수상하기 그지없고, 허락도 없이 대뜸 반말을 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뭐? 하! 기가 막히는군. 내 말을 끊어? 루이반은 대체 아랫것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웨버가 목소리를 키우자 두 사람은 즉각 레이 가까이로 몸을 붙이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혹시나 앞의 남자가 흥분해서 달려들기라도 하면 바로 쳐 내 버리겠다는 몸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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