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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9화 (29/160)

29화. 전 약혼자

두 하녀가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웨버는 열이 올랐다.

‘하녀 따위가 감히!’

그 역시, 루이반 공작 부인으로 레이알렉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저 여자가.’

라미엘의 팔짱을 끼고 평생 구경도 못 해 볼,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목걸이를 하고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충격은 남들의 몇 곱절이었다.

멍청한 제 형이 자신을 제치고 기어이 백작위를 받은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얼마 전에 차 버린 여자는 공작 부인이 되어 나타났다.

파혼할 때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 같던 레이알렉시스였다.

이전에는 자신의 거친 언행에도 울컥하는 걸 꾹 참고 조용하기만 했다. 결코 입 밖으로 뭐라 반박하거나 표현하는 일이 없던 여자였는데, 순식간에 제 할 말 다 하는 걸 보고 무언가 뒷배가 있는 건 아니었을까 고민해 보긴 했었다.

파혼 후 레이알렉시스의 행보는 이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예의를 갖추지 않은 막말을 여기저기 하고 다니며 ‘마녀’라는 수식어를 얻기에 이르렀다.

대체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의아했는데 이제야 모든 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루이반이 뒤에 있었던 것이다.

‘졸부 따위가 건방지게, 라이트와 루이반을 두고 저울질을 해?’

다시 만나면 ‘너야말로 명예에 눈이 멀어 나를 가지고 논 것이 아니냐!’ 하고 혼쭐을 내 주고, 그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리라 생각했다.

무례한 마녀로 악명이 자자한 레이알렉시스니, ‘사람을 갖고 농간을 부리는 여자’라고 약간만 말을 흘리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등을 돌릴 것이다. 그러면 루이반은 자신들의 가문에 먹칠을 한 레이알렉시스를 버릴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무례하고 오만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사람들이 루이반 공작 부인과 대화를 하면서 불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작 부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생각보다 후했다.

레이알렉시스는 파혼 전, 미치기 전처럼 나긋하고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화 중간에 가끔씩 잘난 척을 해 댔지만, 루이반 공작 부인이라는 직위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저 분위기를 띄우는 농담이라 여겼다.

그 모든 상황이 웨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쌍한 자기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알렉스를 이용해 봐야 했다. 그는 그녀를 만날 기회만을 노렸고, 지금 이 순간이 가까스로 얻은 기회였다.

“……라이트가의 차남.”

레이의 목소리가 웨버의 상념을 깼다.

웨버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역겹고 탁한 빛이었다. 제게 한 방 먹이고 싶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온 복도를 울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 인간은 계속 걸리적거리며 제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할 것 같았다. 레이는 앞으로의 만남을 끊어 낼 생각으로 좋지 않은 컨디션을 겨우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친근함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혹여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과거 한때의 일일 뿐.”

“아, 그건…….”

그는 알렉스가 이 문제로 발끈할 것을 예상했다.

웨버는 기다렸다는 듯, ‘당신 말대로 이전에 친밀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랬다. 죄송하다. 예전 일을 꼭 사과하고 싶었다.’라고 하며 스토리를 이어 나가려 했다.

그래야 했는데.

“내 남편도 존대하는데 너 따위가 뭔데 나한테 반말이야? 뭐? 알렉스? 돌았나, 이게.”

그가 무어라 반박할 틈도 없이, 레이의 입에서 파혼하는 날 들었던 시정잡배 같은 거친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진짜 뒈지고 싶냐? 내가 비실비실한 너희 집,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해 줘? 어? 너희 집안 같은 건 내 손에서 끝나.”

“뭐, 뭐라,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

“귓구멍이 막혔어? 앞으로 내 눈에 한 번 더 띄면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이용해서 널 박살 내겠다고 하잖아! 황실 기사 부르기 전에 빨리 썩 꺼져! 아흐, 하으. 하윽.”

안 좋은 컨디션으로 목소리까지 크게 내려니 머리가 어지러워 몸이 휘청거렸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괜찮아.”

“어서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게 기대세요. 모시겠습니다.”

“알레…….”

하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레이를 부축해 휴게실로 향했다.

웨버가 뭐라 말을 붙이려 했으나, 두 사람이 전혀 틈을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의 부름은 허망하게 본인 입 속으로 먹히고 끝이 났다.

“저 사람, 이쪽으로 접근 못 하게 해.”

“예, 마님. 조치하겠습니다.”

작은 소란을 뒤로하고 레이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을 것 같은, 구석의 가장 작은 휴게실로 들어갔다.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소파 침대 하나 외에 아무것도 두지 않은 방의 바닥에는 폭신한 러그가 깔려 있고 은은한 향기가 났다.

방이 너무 작아서인지 휴게실마다 비치된 간단한 다과나 화장대 같은 것도 없었다. 굳이 이곳에 쉬러 올 사람도 없을 듯해, 여기라면 정말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나 혼자 좀 쉬고 싶은데, 두 사람은 잠깐 자리 좀 비켜 주겠어?”

레이의 말에 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계시면 위험합니다.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여기, 후읍, 위험한 게 하나도 없는걸. 아무도 없어.”

“그게…….”

바로 나갈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주저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왜 그런지 의아했으나 둘의 시선이 잠시 자신의 목에 닿는 것을 보고 레이는 깨달았다.

‘아, 나를 지키는 게 아니구나!’

두 사람의 임무는 대대손손 팔자를 펴게 할 인생 다리미인 마린의 거미줄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덤이었던 셈이다.

“흡. 도망 안 가. 이게 내 건데 어딜 가겠어. 편하게 좀 쉬고 싶어. 잠깐만이라도.”

두 사람이 서로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방으로 들어섰다.

“마님께 해가 되는 게 없는지 확인하고 그리하겠습니다.”

휴게실에 아무것도 없고, 창문이 있지만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5층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아, 죽겠다. 후윽. 진짜 속 안 좋아.”

점점 더 어지러워져서 레이는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우읍!”

편하게 기대려고 몸을 느슨하게 했더니 코르셋이 몸을 꽉 조여 왔다.

“상태도 안 좋은데 이거까지 난리……. 풀어 버려야겠다.”

등 부분의 끈을 있는 힘껏 당겨 조여 입는 코르셋이기에 혼자서 입을 수는 없지만 벗는 건 등 뒤의 매듭만 어찌어찌 잘 풀면 되지 않을까.

레이는 팔을 버둥거리며 드레스 상체 부분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 꽉 조여진 등 부분을 풀어내려고 애썼다.

‘이 부분만 손에 좀 걸리면.’

낑낑대며 혼신을 다해 버둥댄 결과 수 분 만에 레이는 매듭을 풀어내고 코르셋을 헐렁하게 벗겨 낼 수 있었다.

“와. 살 것 같다.”

팔은 저리지만 보람은 있었다. 몸을 꽉 조이던 코르셋이 벗겨지자 숨이 크게 들어오면서 술기운과 답답한 속이 한 번에 쑥 내려갔다.

“컨디션이 한 방에 좋아지는데? 뭐야. 그럼 여태 몸이 안 좋았던 게 전부 이거 때문이야?”

레이는 손에 들린 코르셋을 보고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내 보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구석에 집어 던졌다.

“내가 저걸 다시 입나 봐라.”

윌포프가 또 품위 어쩌고 하면서 입히려고 한다면 집사한테도 같이 입혀서 고통을 나눌 테다.

“아무도 없는데 이거까지 벗고 있어야지.”

레이는 걸리적거리는 드레스까지 허리까지 쭉 내려 버리고 맨 상체로 소파에 누웠다.

마린의 거미줄만 레이의 몸에 남아 찬란하게 빛났다.

“아으. 편하다.”

***

레이가 숨을 고르며 소파에서 한창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라미엘은 생각보다 늦어지는 그녀를 찾아 연회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복도가 나오자마자 얼굴에 띤 미소를 단박에 지우고 본래의 냉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행복한 척을 하느라고 평소보다 더 많이 웃으며 즐거운 듯 사람들을 상대했더니 입가에 경련이 다 일어나려고 했다.

두 번은 못 할, 피곤하기 짝이 없는 행사였다.

“……그래서 어쩌신대요?”

“글쎄요. 그게…….”

복도에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 쪽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 같자, 라미엘은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최대한 구석진 곳을 찾던 그는 구석 쪽 휴게실 앞에 서 있는, 레이의 목걸이를 지키라 명령했던 하녀들을 발견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갑작스러운 라미엘의 등장에 두 하녀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마님께서 혼자 쉬고 싶다고 하셔서 여기서 지키는 중입니다.”

“뭐?”

하녀의 대답에 라미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너희의 임무는 이게 아닐 텐데.”

라미엘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바로 해명을 했다.

“방 안엔 아무것도, 아무도 없고 출입구는 여기 하나뿐입니다.”

“창문이 있긴 하지만 마님께서 탈출하실 만한 크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침입할 수 없는 위치이기에…….”

1,800억 파브다.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 높이는 아무것도 아닐 일인데 저런 안일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라미엘이 남은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잡이에 손을 올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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