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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30화 (30/160)

30화. 다정한 신혼부부

설핏 잠이 들었던 레이는 갑작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문 앞은 하녀들이 지키고 서 있으니 이렇게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릴 리가 없으니 잘못 들었을 터다. 그런데 흐릿한 시야에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조명을 반쯤 꺼 둬서 조금 어두운 방 안, 뭔가 희멀겋고 퍼런 것이 소파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는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라엘?”

라미엘이 걸음을 우뚝 멈추는 것과 동시에 레이는 자신의 차림새를 떠올렸다.

“어, 어어?”

그리고 곧 제 상황을 자각하고는 급히 양팔로 드러난 가슴을 가렸다.

“꺄아아아아악! 아아악!”

레이의 비명 소리에 밖에 있던 하녀들이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마님! 무슨 일이세요?”

“두 분 괜찮으십니까?”

라미엘이 급히 걸어가 자기 몸으로 레이를 가리며 외쳤다.

“들어오지 마!”

“네?”

주인의 명령에 두 사람이 멈칫했다.

“당장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 아무 일 없으니까.”

살벌한 주인의 명령에 두 사람은 대답도 않고 휴게실을 나가 문을 닫았다.

“아흐으으윽.”

고요해진 휴게실엔 레이의 탄식과 울음소리만 가득해졌다.

“봤죠? 라엘, 봤죠?”

“뭘 말입니까?”

“뭐겠어요! 아이, 난 몰라아아.”

레이가 서럽게 울며 라미엘의 가슴을 주먹으로 탁탁 쳤다.

“여길 왜 들어와요? 어헝헝헝. 어으. 나 도망 안 간단 말이야아. 어어엉.”

쉬러 왔다가 졸지에 레이의 눈물 투정을 받게 된 라미엘이었다. 헐벗고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일단 하녀들을 물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 여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옷을 벗고 있었던 걸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군.’

방은 아주 작고 누군가가 숨어 있을 공간 따윈 없어 보였다. 누가 있었다고 해도 몸을 숨길 방법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뿐인데,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레이 혼자 이러고 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흐어엉. 어떡해! 아이, 라엘. 어디까지 봤어요?”

자신의 몸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 라미엘의 품에 바싹 붙어 훌쩍이며 레이가 재차 물었다.

“안 봤습니다.”

“거짓말! 다 봤잖아요.”

“정말로 못 봤으니 진정하고 옷 입어요.”

바깥보다 어두운 조명에 내부 상황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소파 위의 하얀 무언가가 레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땐, 그녀의 양팔에 가슴이 가려져 있는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고 야릇한 포즈였긴 하지만 못 본 게 맞긴 했다.

“어헝헝헝! 다 봤잖아! 나 어떡해애.”

레이가 계속 주먹으로 라미엘의 가슴을 팡팡 치는 덕에 허리에 걸려 있던 드레스가 슬슬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어두워서 안 보였습니다. 레이가 처음에 내가 누군지 못 알아봤던 것처럼.”

라미엘이 대답을 하며 흘러내리는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렸다. 자신의 손길에 레이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내게 뭔가 더 보여 주고 싶다면 계속 울고, 아니라면 진정해요.”

라미엘의 침착한 말투에 서서히 레이의 정신이 돌아왔다. 라미엘은 여자의 나신을 봤다고 어쩔 사람이 아니며, 또한 봤어도 뭐 어쩌라고 할 게 분명하다.

‘아냐, 이런 남자라면 이미 볼 만큼 많이 봐서 지겨울 수도 있어. 라미엘의 여자 소문이 뭐가 있었지? 있었던가?’

잘 생각해 보니 라미엘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이 날 틈이 없었다. 루이반 저택에 내내 숨겨져 있다가 토벌전 때가 되어서야 꺼내져 전투말로 사용되었으니.

괜히 찡한 기분이었다. 천대받던 어린애가 이렇게 잘 컸다니. 돌아가신 모친이 지금의 라미엘을 보면 얼마나 뿌듯하실까.

“……진정했어요.”

품 주인의 과거사를 떠올리다 마음이 진정되었다.

“고마워요, 라엘, 아니 라미엘 님.”

“이제 됐습니까.”

“미안합니다.”

레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라미엘은 왠지 보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저기…….”

레이가 라미엘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게, 저기, 그, 그러니까 어, 내 옷 좀…… 입혀 줄래요?”

입을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벗을 생각만 했더니 벌어진 일이었다.

이 옷은 뒤에서 끈을 조여 매서 입는 것이라 혼자선 입을 수 없었다. 라미엘에게 입혀 달라기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현재 여기에 사람이라곤 그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입술 맞대기 이후 라미엘의 얼굴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는 기분이었다.

“이걸 좀 당겨 줘요. 바싹 당긴 다음에 옆에 작은 고리 같은 거 있는데, 거기에 걸고 묶으면 돼요.”

레이가 등 뒤쪽에 달린 드레스의 조임끈을 잡아 흔들며 요청했다. 볼에 라미엘의 시선이 따끔하게 닿는 게 느껴져 다시금 얼굴에 열이 후끈하게 몰려왔다.

“으, 저기 라미엘 님, 너무 꽉 조였어요.”

레이의 요청에 그가 다시 끈을 느슨하게 했다.

“옷은 왜 벗고 있던 겁니까?”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분고분 레이가 시킨 대로 드레스를 입히던 라미엘이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어, 그게……. 숨을 못 쉬겠어서. 내장이 막 뒤틀리는 거 같고 토할 것 같아서 코르셋을 좀 벗느라고.”

레이의 말을 듣고 나서 라미엘은 방구석에 내던져져 있는 코르셋을 발견했다.

“저거 벗으려면 드레스를 벗어야 해서 일이 이렇게 됐네요.”

코르셋이 제거된 덕분인지 드레스 품이 조금 남아 처음 올 때보다 훨씬 편한 상태가 되었다.

“후아. 와, 너무 편하다. 원래 이렇게 편한 드레스였구나.”

부끄러움과는 다른, 편해서 돌아오는 생기가 레이의 볼에 반짝 돌았다.

“라엘, 고마워요. 그리고 아까 때려서 미안하고요. 내가 너무 놀라서 그만.”

라엘과 라미엘 님, 호칭이 계속 뒤섞여 있는데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라미엘 역시 단둘이 있어도 그녀가 자신을 라엘로 부르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인사는 좀 전에 다 한 것 같은데요.”

레이가 가슴을 퉁탕거린 건 충격이라고 할 수도 없이 미미해서 사과할 필요도 없을 수준이었다. 더불어 그녀가 놀라서 팔을 휘저은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두 번씩 사과를 받을 정도로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쉬러 오신 거죠? 이제 내가 가 볼게요.”

다시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레이는 슬금슬금 휴게실 문으로 향했다.

“레이.”

“네?”

“드레스 흘러내리려고 합니다.”

“아이구!”

레이가 헐거워진 드레스를 손으로 잡았다.

“라미엘 님, 이거 꽉 조인 거 맞아요?”

“레이가 너무 꽉 조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무슨 사람이 중간이 없어요?”

라미엘은 눈도 못 마주치면서 따박따박 자기 할 말 다 하고 있는 레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라엘, 힘 조절하기 힘들어요?”

“이렇게 약한 힘은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됐나요?”

“조금만 더 조여 주세요.”

그때 툭,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등 뒤에서 라미엘의 손이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끊어졌군.”

“허어억!”

무서운 소리였다. 임시방편 마님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드레스를 망가뜨리다니!

‘아냐, 아냐. 이건 라미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식은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문의 드레스엔 보존 마법이 걸려 있다면서요! 그게 왜 끊어져?”

“흠. 그러게요. 드레스 천 자체에만 걸려 있던 건가.”

가문의 드레스라고 그리도 난리를 피우던 옷은 당대 가주의 손에 허무하게도 망가졌다.

물론 조임끈 정도야 얼마든지 새 걸로 교체해도 될 일이지만, 레이가 너무 놀란 눈치라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라미엘은 큰일인 양 반응해 보았다.

“이거 어쩌죠. 윌포프가 알면 나도 못 말릴 것 같은데.”

“아이, 어쩌면 좋아.”

그 무언의 압박과 기세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리려 했다.

레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울긋불긋해지더니 이내 답을 찾은 듯 미간에 잡힌 주름이 스윽 펴졌다. 표정 한번 참 다채로운 여자였다.

라미엘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 중인 것도 모르고 치열하게 윌포프를 구슬릴 비책을 찾던 레이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야, 아니지. 이건 라엘이 잘못한 건데 왜 내가 겁을 먹어?’

집사라는 말만 들으면 자동적으로 겁부터 먹는 게 습관이 되어 가는 듯했다.

“윌포프한테 확실히 말해요. 이건 라미엘 님이 한 짓이라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치고는 심심한 대답이었다.

“내 짓이라고 해도 그가 순순히 믿을지 모르겠는데.”

라미엘이 정곡을 찌르는 소리를 했다. 그래, 맞다. 윌포프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라엘이 적극적으로 사실을 어필하면 되잖아요. 난 정말 아무 죄도, 엄맛!”

반쯤 흘러내린 드레스를 급하게 움켜쥐며 레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어떡하지. 당장 밖에 나가 봐야 하는데.”

흘러내리는 드레스가 레이의 머릿속에서 집사를 잠시 지웠다.

“왜 걱정을 합니까? 황실 의상실이 있는데. 드레스를 고칠 사람이 백은 넘을 겁니다.”

“여기 의상실을 써요?”

레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으며 라미엘을 쳐다보았다가 움찔하며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라미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민망했다.

“급한 사정이니 의상 수선 정도는 태자비가 쉬이 허가해 줄 겁니다.”

“그, 그럼 일단 밖에 있는 두 사람한테 임시방편 좀 알아봐 달라고 하고 허락을 받으러 가야겠네요. 두 사람, 잠시 들어와 봐.”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열린 문에서 복도의 밝은 빛이 흘러들어 오면서 내부가 한층 밝아졌다. 그리고 문 앞에 선 하녀 둘 뒤로 네 명의 귀부인이 보였다.

하녀들에게 시선을 향했던 그들은 밖보다 어두운 내부에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헐거운 옷차림으로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우린 그냥 좀 조용한 곳에서 잠깐 쉬려고…….”

“두 분이 어딜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었군요.”

“어머나, 다정도 하셔라.”

네 사람의 뉘앙스에서 신혼부부가 밀실에서 뜨거운 한때를 보냈나 보다 오해한 기색이 물씬 풍겼다.

“네? 지금 무슨 말씀을…….”

“뭐 해요. 우린 빨리 자리 비켜야죠.”

레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네 사람은 대단한 특종이라도 잡은 것 같은 표정으로 다른 휴게실로 잽싸게 사라졌다. 남은 건 주변을 조금씩 잠식하는 어색한 공기뿐.

“……저기, 내 드레스에 좀 문제가 생겼어.”

사라진 네 명 때문에 더더욱 말하기 머쓱해진 주제였다.

“어떤 일이신지요?”

엘이 한층 조심스레 물었는데 레이는 왜인지 대답을 하려니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드레스 조이는 끈이 끊어졌어. 라엘이 힘 조절을 못…….”

드레스의 손상은 결코 자신의 탓이 아닌 라미엘 때문이라는 것을 어필하려고 한 말인데, 분위기 때문에 야하게 들리고 말았다.

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꺼내도 이상해질 것 같았다.

“마님, 의상실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임시로 드레스를 고정할 끈이나 핀을 찾기 위해 케이가 휴게실을 벗어나자, 뒤이어 엘도 황급히 의상실에 지금 상황을 알리고 사용 요청을 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부부의 오붓한 분위기를 절대 깨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네.”

레이가 멍하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혼식까지 해치워 버리자고 처음에 계획했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툭툭 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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