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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31화 (31/160)

31화. 즈 스크

임시방편으로 고정한 드레스는 동작을 조금이라도 크게 할라 치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서 레이는 강제적으로 조신하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 보이는 곳이 의상실입니다. 공작 부인.”

태자비는 의상실 사용 허락뿐만이 아니라 황실 의상 총 관리인이자 최고 디자이너인 엘빈까지 보내 주었다.

엘빈의 인도하에 라미엘의 팔짱을 끼고 걷던 레이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복도에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웨버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다가오다가 레이 옆의 라미엘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쟤가 여긴 또 왜 왔지?’

다시 한번 자신이 혼자 있을 때를 노린 건 아닐까 했는데 웨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휴게실에 가는 길에 두 분을 이리 만날 줄이야. 공작님, 저는 라이트가의 차남 웨버 라이트입니다.”

그는 연회 내내 사람들이 독대하고 싶어 안달하던 루이반 공작과 이렇게 만나 진심으로 기쁘다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하려는 듯 양해를 구하는 손짓을 보였다.

‘휴게실 가는 길에 이리 만나? 대사도 구리고 연기력도 형편없기 짝이 없네.’

레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짝다리를 짚고 섰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라미엘은 그와 짧게 악수를 나누고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표정을 했다.

웨버의 얼굴을 보자 레이는 몸에서 벗겨져 나간 코르셋이 다시금 들러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즈 스크 느그 주근드.”

저 새끼 내가 죽인다. 반드시 내 손으로 처단하고 말겠어.

이를 악물고 음산히 읊조리던 레이는 이대로 웨버를 무시하고 의상실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라미엘과 독대하게 두고 싶지 않은데 의상 수정은 시급하고, 부부가 둘 다 저놈을 무시하기엔 옆에 있는 황실 의상 관리인의 눈이 신경 쓰였다.

그때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라미엘이 레이의 등을 가볍게 떠밀며 말했다.

“레이, 잠시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 다녀와요.”

라미엘과 웨버의 독대라니.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은 조합이다.

“으으응. 라엘이랑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요.”

“흐흠!”

레이의 코맹맹이 헛소리에 놀란 건 엘빈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기침이 나와서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콜록.”

황급히 수습하는 표정에서 진한 직장인의 향기가 풍겼다.

“어차피 드레스를 고치는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다녀와요.”

라미엘은 레이의 뻘짓에도 동요 한 번 하지 않고 태연히 대사를 맞받아쳤다.

웨버가 파혼을 들먹이며 무슨 수작을 부리든 라미엘이 꿈쩍도 안 할 것을 알지만, 레이는 저 둘만 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웨버 라이트는 저 뱀 같은 주둥이로 자신을 모욕할 게 뻔했다. 현 남편에게 굳이 찾아와 전 약혼녀 욕이나 하려는 지질한 남자와 한때나마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있었다는 것. 이 사실이 레이는 미치도록 싫었다.

라미엘에게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창피한 부분이기에 치가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부모님께 당신들 보는 눈은 정말 최악이라고 읍소라도 하고 싶었다.

“……다녀올게요.”

마지못해 라미엘에게서 떨어진 레이는 웨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엘빈을 따라 의상실로 들어섰다.

미리 언질이 있었던 모양인지 의상실에 들어서자마자 소속 하인들이 인사를 하고 여러 종류의 얇은 흰색 천을 올린 붉은 트레이를 내어 보였다. 엘빈은 그 천들을 빠르게 손에 모아 쥐고 레이의 드레스와 견주어 보았다.

“똑같은 색이 없네.”

제 눈에는 다 똑같은 흰색으로 보였는데 전문가 눈에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영 마뜩잖은 듯한 표정을 짓던 엘빈이 대기 중인 하녀들에게 설명하며 다른 천을 가져오라 일렀다.

“공작 부인, 정말 멋진 드레스입니다.”

황실 최고위 디자이너가 보내는 찬탄에 비록 제 것은 아니지만 레이는 기분이 우쭐해졌다.

“감사해요. 저도 너무 예뻐서 좀 더 아껴 두다 입고 싶었어요.”

그 마음을 아주 잘 안다며 웃는 엘빈 뒤로 하녀들이 형형색색의 천들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천을 한데 잡고 조금 전처럼 드레스와 색을 매치해 보았다.

“이거다.”

마음에 드는 천을 골라내자마자 엘빈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천을 착착 꼬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인가, 기계인가.

장인의 경이로운 작업 속도에 레이가 입도 못 다물고 있는 몇 초 만에 금색 천은 드레스를 고정하는 끈으로 재탄생했다.

‘드레스를 고정할 끈이 아닌 천을 왜 가져왔나 했더니.’

“제가 양손만 자유로웠다면 엘빈 님께 박수갈채를 보내 드렸을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최고야.”

혹시나 드레스가 흘러내릴까 쥐고 있느라 손이 자유롭지 못한 게 아쉬웠다.

“……칭찬 감사합니다.”

귀족은 평민 출신 디자이너에게 찬사를 보내거나 대놓고 칭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음에 드네’, 최고의 찬사라고 해 봤자 ‘좋아’ 정도였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귀족들을 상대하다가 이제 황실까지 올라왔지만 태생적인 부분을 귀족들은 꼭 걸고넘어졌다.

엘빈은 처음으로 최고의 칭찬을 건넨 공작 부인을 잠시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드레스로 시선을 주었다.

드레스 끈 이음 부분이 헐거워서 문제가 됐다는 것을 파악한 엘빈은 빠른 속도로 그 부분을 레이의 몸에 맞춰 꿰매고 금빛 끈을 이어 넣었다.

삽시간에 드레스 수선이 끝났다. 레이는 거울을 보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서 옷을 확인했다. 등 부분이 금색으로 반짝이는데 과하지도 않고 은은하게 드레스의 톤과 어울렸다.

“루이반 공작 각하 눈동자 색과 맞춰 보았습니다. 역시 잘 어울리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새 옷 입은 것 같아요. 신기해.”

작은 디테일 하나 바뀌었다고 느낌이 확 달라진 게 너무도 신기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워진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금을 입힌 천이라 조금 무거울 수도 있는데 무게감은 괜찮으신가요?”

금을 입혔다니! 당연히 더 고급스러워야 했구나. 황실은 진짜 다르네.

“괜찮아요. 크게 못 느끼겠는걸요.”

이제 드레스도 수선됐겠다, 남은 건 저기 복도에서 헛소리 시전 중일 웨버를 잡아 족치는 것뿐인가.

“너무너무 감사해요. 최고였어요, 엘빈 님.”

“그럼 공작 부인,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엘빈의 인사를 받으며 레이는 의상실을 나섰다.

‘어라?’

웨버가 난리 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황은 빨리 종료되어 있었다.

복도 저 멀리 빠르게 걸어가는 웨버의 뒷모습이 보였다.

라미엘은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더니 무언가를 조명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선은 다 끝났습니까?”

마치 레이가 와 있는 것을 본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요? 방금 막 왔는데.”

등 뒤로 드레스 자락이 살짝 끌리는 소리와 귀에 익은 타박이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가 아는 발소리와 드레스가 끌리는 소리, 지금 이 복도에 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뒤에도 눈이 있으신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도 레이는 라미엘의 동그란 뒤통수를 힐끗거렸다.

“가죠.”

라미엘은 레이의 헛소리를 일축하고 팔을 내밀었다.

“넵.”

라미엘에게 팔을 뻗었을 때.

그녀는 방금 전 무언가를 던지던 라미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허리 정도 높이의 조명은 커다란 흰 접시 같은 반달 모양으로 생겼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에 동전처럼 동그랗고 납작한 금빛 장식들이 달려 있다. 이는 마치 넓적한 화병에 꽂힌 꽃다발을 형상화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바닥 쪽에 마력석을 깔아 주변이 어두워지면 저절로 불을 내고 밝아지면 자동 소등되는 장식용 조명이었다. 조명의 불은 실제가 맞긴 하지만 사람이 만져도 전혀 뜨겁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레이는 조명 안을 흘끗 쳐다보았다. 흰 반달 속 바닥 쪽 금빛 조형물 사이에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이거 라엘 장갑 아냐?’

레이는 라미엘의 손을 보았다.

“……맨손이네요.”

“더러워져서 버렸습니다.”

쓰레기를 황실 조명에 버리는 패기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혹여나 공작 부부 인성 논란이 나오는 거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 레이가 장갑을 건져 올리려 하는 순간 불길이 확 치솟았다.

“왁! 깜짝이야!”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설계됐다는 건 알고 있지만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에 손이 닿으니 절로 비명이 나왔다.

“뭐, 뭐야. 뭐, 뭐, 뭐.”

“날벌레 같은 게 쌓일 수 있어 이물질이 조명에 닿은 상태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전부 태워 버립니다.”

“그런 고급 기술이…….”

레이는 라미엘의 팔에 원숭이처럼 매달린 상태인 줄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엘 님, 혹시 웨버 라이트 피떡 만들, 아니야. 두드려 패, 아니다. 주먹으로 약간 훈육을 해 주셨나요?”

고심해서 고른 단어치고 고급스럽지는 않았으나 라미엘을 가볍게 웃게 해 주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가 입가에 아주 약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장갑은 왜……?”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은 방금 전의 불쾌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다지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도 없는 남자는 들을 가치도 없는 시간 아까운 말만 반복했다.

“알렉스는 공작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막말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을 농락하고 신의 따위는 사뿐히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신랄하게 레이알렉시스의 욕을 하던 남자는 자신이 그녀에게 당한 피해자이며, 이 사실을 널리 알릴 것이고, 루이반이 악평을 듣기 싫으면 일종의 위로금을 달라는 삼단 논법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에게 눈치라는 것이 있었다면 라미엘의 얼굴이 싸늘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걸 보지 못했다.

그는 레이의 목에 걸린 마린의 거미줄을 보고 그녀를 약간만 털어도 큰돈이 나올 것이라 계산하고 온 게 분명했다. 제법 머리를 썼다고 해석해야 할지,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여겨야 할지.

“감히 내 앞에서 내 아내 욕을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로군.”

싸늘한 얼굴로 뱉은 라미엘의 말에 웨버가 움찔 몸을 굳혔다.

아마 자신이 토벌전에 나가 구르느라 사회성을 키우지도 못했고, 천사 같다고 소문나 있으니 대강 구슬려도 먹힐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 저는 그게 아니라 공작께서 안타까운 선택을 하신…….”

“루이반의 명예를 더럽힌 죄는 그대의 가문에 묻겠다.”

“고, 공작…….”

“꺼져.”

라미엘의 기세에 눌려 그는 바들바들 떨며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복도를 달리듯 벗어났다.

방금의 상황은 날파리가 날아든 것과 같은 별것 아닌 일이라 무시하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라미엘은 계속 기분이 더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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