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받은 만큼
레이알렉시스 르아넬로는 이제 레이알렉시스 루이반이다. 그녀 역시 루이반이며 앞으로 1년은 제 소속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겠지.’
저조한 기분은 영 나아지질 않았고, 웨버와 악수한 것도 불쾌해 장갑까지 벗어 던진 것이다.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복도를 메운 라미엘의 불쾌함은 가시지 않았다.
“라미엘 님, 무슨 말씀을 나눴는지 물어도 될까요?”
“별 대단한 이야긴 없었습니다.”
“내가 양다리를 걸쳤고 그걸로 자긴 피해를 봤다, 그러니 피해 보상해라, 이런 소리?”
“……들었습니까?”
“너무 뻔해서요. 어휴, 그렇게 멍청하니 작위를 못 받았지.”
레이의 신랄한 평가에 신기하게도 불쾌함이 누그러들었다.
아까 저 남자가 나타났을 때도 이를 악물고 작게 죽인다고 읊조리는 걸 봐선 그녀 역시 그를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더니, 자기가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불쾌하셨죠? 죄송해요. 제가 처리할게요.”
“당신이 사과하고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루이반이 합니다.”
“네?”
“그가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건드렸으니 루이반이 나서야죠.”
라미엘의 말에 레이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근두근.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누군가에게 지켜지고 보호받는 느낌.
르아넬로가가 자신을 방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호받는 느낌을 준 적도 없었다. 소심한 오스카는 일이 생기면 가족 뒤로 숨었고 에이나는 앞장서서 가족을 보호하는 일이 없었다.
루이반이라는 가문이 주는 권력의 안락함도 있겠지만, 라미엘이 자연스레 저를 그 울타리 안에 넣고 보호하겠다 선언하는 이 순간이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어, 어떡해. 나 지금 좀 반한 것 같아요.”
“계약 조항 잊었습니까?”
“안 잊었어요. 전 권력에 반한 거예요.”
너 말고 루이반이요.
루이반에 반한 거야. 절대 네가 아니다.
레이는 라미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복도 끝을 보며 심장을 다독였다.
“라엘, 사람들이 기다리겠어요. 우리 얼른 돌아가요.”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의 마음속에 아주 작은 무언가가 싹튼 순간이었다.
***
“이런, 놓쳤어.”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돌아간 후.
텅 빈 복도로 누군가가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는 연회장을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확실해.”
복도에 남은 흔적은 그가 알던 그 어떠한 것보다 진했다.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꽉 쥔 남자가 작게 읊조렸다.
“……하아. 그 녀석한테 명단 좀 받아야겠는데.”
느릿하게 허공을 더듬던 손길과 달리 그는 아주 빠르게 걸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
연회장에서 루이반 부부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묘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루이반 공작이 구석진 어두운 휴게실에서 부인의 드레스를 찢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진 듯했다.
특히나 약간 나이가 있는 부부들은 흐뭇한 얼굴로 루이반 부부를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보다 일찍 루이반 2세를 보게 되겠다며 좋아했다.
‘2부 연회 때 입을 드레스를 입고 올 걸 그랬다.’
사람들이 드레스를 두고 속삭이는 것을 보며 뒤늦은 후회를 해 봤자 소용은 없었다.
하지만 창피하긴 해도 루이반 부부 사이에 사랑이 넘쳐흐른다는 소문을 제대로 낸 것 같아 만족하기로 했다.
따갑고 민망한 시선 속에 1부 연회가 끝났다.
“진짜 편하다.”
레이는 이제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치렁치렁한 것도 그렇지만 가문의 드레스에 얼룩이 지거나 흠이 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피곤했는데 옷이 바뀌니 살 것 같았다.
1부 낮 연회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주였다면, 2부 저녁 연회는 식사를 하며 본격적으로 손님들과 어울리는 시간이다.
자리를 계속 옮겨야 하기에 신랑 신부는 격식을 갖춘 1부보다 좀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게 된다. 두 사람이 새로 단장을 하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반긴 건 태자 부부였다.
원래 같으면 오늘 결혼식이 아니라 별도로 만나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을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레이는 크레하에게 짧게나마 특훈을 받았는데, 예상치 못한 빠른 결혼에 성과는 볼 수 없었다. 태자 부부와 독대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기초 체력 증진엔 도움이 좀 되었는지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서 있으면서도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공작 부인, 드레스는 괜찮은가?”
태자비가 웃으며 물었다.
“예.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레이가 수선사를 잠시 빌린다는 말을 할 때부터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을 정도로 즐거워하던 태자비였다. 그녀는 진실 여부를 떠나 보기 드물게 등장한 ‘사랑하는 사이의 부부’에 대해 굉장히 호감을 갖는 듯했다.
“공, 사실 나는 그대가 결혼식을 귀찮아해서 오늘 한 번에 해치우려는 줄 알았네.”
태자의 말에 레이는 속으로 뜨끔했다.
“그런데 옷이 망가질 정도로 뜨거운 사이였을 줄이야.”
직접적으로 드레스를 언급하는 태자의 발언에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레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빨리 결혼이 하고 싶었던 게지?”
태자의 질문에 라미엘은 미소로 답했다.
“아까 서약식 때 키스한 거 잊으셨나 봅니다.”
태자비의 말에 태자는 소리 내 웃었고, 이제 편히 즐기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라엘, 우리 소문이 아주 화끈하게 나긴 했네요.”
태자 부부가 멀어지자 레이는 슬그머니 목숨 줄처럼 잡고 있던 라미엘의 팔에서 팔짱을 풀고는 들고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 번에 처리하게 되어서 다행이군요. 이제 몇 시간만 귀찮은 짓 좀 하면 해방입니다.”
모처럼 라미엘과 마음이 맞는 순간이었다. 레이가 주먹을 살짝 쥐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열심히 버텨 보아요.”
연회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태자 부부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갔고, 사람들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며 루이반 부부에게 축하와 작별을 고했다.
라미엘이 비틀거리는 레이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 기대게 만들었다.
“……아.”
한 박자 느린 반응에 라미엘이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계속 받아 마시던 레이였다.
주인공이 취기가 조금 오른 듯 보이면 손님들은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지만, 이곳엔 갑작스레 결혼식을 올려 버린 신생 부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은 라미엘을 피해 교묘히 레이를 건드리며 그녀가 술을 많이 마시도록 했다.
귀족들이라면 이런 경우 우아하게 거절하는 법을 알았을 텐데, 레이는 윌포프에게 그것까진 미처 배우지 못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술잔에 입을 댔다. 라미엘이 대신 나서며 막아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라미엘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레이는 이 꼴이 됐다.
“어지러워.”
레이는 아예 라미엘의 탄탄한 팔에 이마를 기대 버렸다.
“물 좀 마셨습니까?”
본디 라미엘의 성격 같았다면 질척이는 취객을 진작 떼어 내 어딘가로 던졌을 터였다.
그러나 이 취객은 제 아내였고, 사람들의 눈이 수십 개는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응, 네, 먹어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려고 온 백작 부부가 레이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작 부인께선 괜찮으신가요? 조금 취하신 것 같은데.”
“제가, 음, 솔직히 조금 피곤해서 라엘에게 응석 부리는 중이었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결혼 생활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철 같은 의지가 레이를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오늘만, 지금 이 순간만 웃으며 버티면 다신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백작 부부는 신생 부부를 귀엽다는 얼굴로 바라보고는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라미에엘 니임.”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레이의 취기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라엘이 막아서도오 나항테 막 술 먹으라고오 한 사앙들 기억나요오? 싹 다 기억해애. 적이다아.”
찡그려지는 표정을 애써 평온하게 가장하고 있던 라미엘은 레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 이라고 한 겁니까?”
그는 레이가 생각 없이, 거절을 못 해서 주는 대로 마시는 줄만 알았다.
“으응. 네에.”
라미엘은 레이가 마녀라는 명성답게 마시기 싫으면 폭언을 하며 무례하게 거절할 줄 알았다. 레이알렉시스는 필요에 의해 ‘마녀’라는 악평 속에 자신을 넣어 두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마녀처럼 행동할 것을 예상하고 제 나름의 대비를 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은 모두가 빗나갔다. 레이는 얌전히 연회를 즐겼고 무례하게 구는 일도 없었다.
“적을 골라냈다고……?”
“라아에리 작이를 받아써도오 시러하능 사라믄 이쓸 거니까.”
레이의 발음은 점점 더 뭉개지고 느릿해졌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확실하게 들렸다.
레이가 곤란해하면서도 결국 술을 마신 이유는 그녀 나름대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늘 결혼 축하드립니다.”
누군가가 다가와 루이반 부부에게 작별을 고했고, 라미엘은 기계처럼 미소로 응대한 후 바로 자신의 몸에 기대어 있는 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강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영.”
레이가 발간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머리를 라미엘의 품에 기댔다.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내가 루이반의 적도 파악하지 못 할 것 같았나요?”
“헤헤. 그냥 나 돈 바다쓰니까 모라도 해야 항 거 가타서.”
15로베와 ‘플러스알파’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란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