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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33화 (33/160)

33화. 주사

레이 역시 술은 적당한 선에서 거절해도 크게 문제가 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처해서 마신 이유는 마린의 거미줄까지 받았으니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더불어 라미엘을 향한 일각의 질투 어린, 혹은 탐탁지 않은 시선들이 마음에 걸려서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라미엘에게 향한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그 와중에 아마도 레이알렉시스는 그의 흠이나 약점 같은 존재일 것이다.

레이는 차마 라미엘을 건드리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을 노릴 것이라 계산했다. 그래서 응한 것이다. 그의 흠을 쥐고 흔들려는 자들을 알아 놓기 위해서.

내내 고생만 하며 살다가 이제 막 자신의 삶을 열기 시작한 남자다. 어려울 때에는 도움의 손길 한 번 내밀지 않다가 고작 핏줄 하나 물고 늘어지며 라미엘이 쌓아 온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레이는 왜인지 짜증이 났다.

자신은 이 바닥에서 1년만 있으면 해방이지만 라미엘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라도 해서 조금이나마 그의 평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 바깝 해써어? 잘해찌?”

“레이, 많이 취했습니다.”

“안 취해써여어.”

레이는 본인의 주사를 잘 알고 있었다.

“내 이이뿌운 동새애애앵. 울 피아나아아아 어디써어어어.”

바로 여동생인 피아나를 찾는 것이었다. 취객에게 가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기에 레이는 잠들 때까지 피아나를 찾았고, 어쩌다 피아나가 있으면 뽀뽀를 퍼부으며 꼭 껴안고 절대 놔주지 않았다. 특이한 술버릇이었다.

오늘은 피아나의 ‘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머리는 몽롱하고 발음은 뭉개지고 몸을 가누기는 힘들었으나 이건 취한 게 아니었다.

“라미엘 님!”

낯익은 목소리가 레이의 귓가에 윙윙 울렸다.

“라미엘 님, 하아. 정말!”

사색이 되어 달려온 테일러는 파장 중인 연회장 광경을 보고 울컥하는 속을 진정하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최근 주인이 하는 행동 중 뭐 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건 없었다. 예측조차 안 됐다. 그리고 그 예측불허의 최종장은 바로 지금이었다.

‘결혼이라니!’

보고를 받자마자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서둘러 저택으로 갔더니 윌포프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누가 결혼하지 말랍니까? 레이알렉시스랑 결혼하시는 거 안 말린다고요. 그런데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테일러는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순화하고 순화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다 저 마녀 때문인 것 같아서 라미엘의 품에 안겨 있는 레이알렉시스가 몹시도 원망스러워졌다.

처음부터 글러먹은 만남이었다.

자신이 있었다면 절대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집안 대소사인 결혼식을 얼렁뚱땅 작위식과 한 번에 해 먹을 일도 당연 없었을 것이다.

‘집안에 검은 개가 들어와서 망조가 든 건 아닐까? 맞아. 그 개도 저 마녀가 데리고 온 거였지.’

별별 생각이 테일러를 괴롭혔다.

“오늘 결혼식 비용은 황실에서 정산해서 알려 줄 거니 받아서 처리해.”

압니다. 알아요. 전부 다 들었습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도통 믿을 수가 없어서, 주인님이 제정신은 맞는지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위해섭니다.

입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말이 테일러의 목젖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아내를 먼저 마차로 데려가. 마무리하고 바로 가겠다.”

테일러가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라미엘이 제게 들러붙어 있는 레이를 하녀들에게 내치지 않는 건 다른 사람들에겐 사이좋은 부부인 양 연기하기 위해 그런 것이려니 했다.

‘내가 왔는데도 자기가 마무리를 한다고?’

작위를 받았으니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이미지 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천사같이 우아하게 인사나 하고, 본인 성격에 몹시도 피곤한 이 연회를 완전히 파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마무리를 본인이 하고 심지어 주변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내 아내’란다.

“그, 어…….”

테일러가 맹한 얼굴로 어쩌질 못하는 걸 보며 라미엘은 품 안의 레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작은 여자는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레이알렉시스 루이반이 애쓴 만큼 라미엘은 귀찮아도 연회 마지막까지 주최자로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테일러는 얼떨떨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레이를 넘겨받았다.

“어? 테일러다아. 왜 츌근해쒀? 태근 시가니쟈나.”

너희가 일을 쳐서요!

“저도 퇴근 이후엔 가족이랑 오붓하게 있고 싶지, 이렇게 다시 출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다신 이딴 짓거리 하지 마세요.

“거진마알. 말로는 실타명서 착실하게 츌근해짜나. 사실 일하능 게 좋은 거지?”

정말, 정말 싫다. 이 여자.

마차까지 가는 길이 테일러에게는 너무도,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라미엘이 연회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차 밖에 서 있던 테일러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공작님!”

“왜 거기 있어? 취한 사람 혼자 마차에 내버려 뒀다가…….”

그때 라미엘의 말을 뚝 끊고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이써요오오.”

라미엘의 미간이 구겨지자, 테일러가 바로 설명을 붙였다.

“연회장에서 나온 이후로 계속…….”

“보고 시퍼어어. 울 라에에엘.”

레이의 목소리에 라미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저 여자, 지금 뭐라고 주정을 부리고 있는 거지?

“라미엘 님을 찾으십니다.”

테일러는 몹시 당황스러웠으며 황당했다. 레이를 지키는 케이와 엘도 마님의 주사에 적잖이 놀랐는지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웃음을 꾹 눌러 참는 모양새였다.

“연회장을 나오신 뒤로 계속 저러시더군요.”

“라에에에엘. 어디 가쒀어어어.”

라미엘이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어? 헤헤헤. 라미에리다아아. 왜 이제 와쒀? 여기 와아.”

발간 볼의 레이가 라미엘에게 거머리처럼 찰싹 들러붙는 광경을 끝으로 마차 문이 닫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레이의 주정 소리가 뚝 끊겼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마차에서 똑똑,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출발 신호에 마부는 바로 마차를 움직였고, 고요해진 자리엔 테일러와 하녀 둘만 남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너무 이상했다.

주인이 물러도 너무 무르다.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사람을 본인이 직접 처리하다니.

‘혹시 레이알렉시스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일까? 설마!’

라미엘은 취한 레이만 따로 마차로 태워 보내 버리지 절대 함께 타진 않을 사람이다.

아무리 주변의 시선 때문에 아내를 챙기는 척을 하고 있다고 해도, 보는 눈이라곤 설령 계약이란 게 새어 나간들 입 무겁게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할 케이와 엘뿐이니 굳이 본인이 귀찮고 짜증 나는 뒤처리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라미엘의 심정을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 남자, 설마 진짜로 연애를 하려고 저러는 건가.’

말이 안 되는 일인 것 같으면서도 ‘그래, 공작님도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 ‘근데 어디 보통 사람이냐.’ 하는 자아가 툭 튀어나온다.

“……레이알렉시스한테 걸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테일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른 마차에 올랐다.

오늘 밤은 참 길 것 같았다.

***

“망했어. 다 생각나.”

레이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침대를 굴렀다.

바닥에 있던 푸엥이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레이를 찾았다. 그녀는 푸엥을 안아 올려 품에 꼭 껴안았다.

할짝거리며 주인의 얼굴에 뽀뽀를 퍼붓는 푸엥을 보니 심신의 안정을 찾…… 기는 개뿔.

“진짜아! 왜 그랬냐, 이 미친 것아. 내가 정말 왜 그랬지?”

지난밤 주사를 부린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체 왜 주사가 그 모양이 된 거지? 피아나 아니었냐고.”

자신의 주사는 피아나가 아니라 가족을 찾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위장 결혼도 결혼이라고, 새로운 가족인 라미엘을 찾은 것일까?

아니다. 가족을 찾는 게 주사라면 예전에 한국에서 취했을 때에는 피아나가 아니라 유주를 찾아야 했다.

‘취하면 알코올성 치매가 와서 하나도 생각나지 말든가, 기억이 나더라도 조금만 나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마차에서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있다가 라미엘을 보자마자 질척거린 것도 생생하게 생각났다.

마린의 거미줄은 나보다 당신이 해야 한다며 라미엘의 목에 걸어 준답시고 목걸이를 빼내려고 바동거렸고.

“헤헤헤헤헤. 라아미엘 니임. 쪽!”

목걸이가 안 벗겨지자 주접스럽게 주둥이를 쭉 내밀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앉아 있던 라미엘한테 덤벼든 것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젖은 머리털처럼, 물미역처럼 엉겨서 성추행을 시도하다가 라미엘에게 뒷목을 맞고 그대로 기절했더랬지.

“수치스러워…….”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게다가 눈은 왜 이리 일찍 떠졌는지. 그 정도로 마셨으면 점심때 다 돼서야 일어나는 게 정상이거늘, 눈을 뜨니 아침 식사 직전이다.

라미엘과 얼굴을 마주하고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 남자도 웃기네. 어떻게 사람 뒷목을 쳐? 그것도 지 마누라 뒷목을?”

레이는 애꿎은 라미엘을 원망하다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나 같아도 쳤겠다. 그렇게 주사를 부리는데 손으로 뒷목 정도면 천사지, 천사. 나였음 언월도로 쳤어.’

레이가 부끄러움과 속 쓰림에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안나입니다.”

“……들어와.”

레이의 허락에 안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 오늘 아침은 여기서 먹을래.”

안나는 레이 품에 안겨 있는 푸엥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 마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애. 나 속 쓰려, 못 움직이겠어.”

일단 아침 먹을 때만이라도 라미엘을 피하려는 수작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용서를 구할 튼튼한 무릎도 좀 준비하고.

“가족분들이 오셨습니다. 지금 마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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