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뜻밖의 가족애
공작 부인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루이반 집사의 말에 르아넬로 부부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내 자식 방인데도 쳐들어갈 수가 없다니.’
정말 자신의 딸이 명실상부 상류 귀족 사회에 들어섰다는 게 실감 났다.
으리으리한 응접실에서 정중한 대우를 받던 르아넬로 부부는 공작 부인이 오신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 언니!”
피아나가 도도도 달려가 레이의 품에 안겼다. 양 갈래로 묶은 밤톨 같은 진갈색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어깨 위를 나는 게 꼭 머리 장식처럼 보였다.
“피아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부쩍 귀엽고 예뻐진 피아나는 눈동자 색과 같은 푸른색의 곱디고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필시 루이반에 온다고 신경 써서 입힌 것이겠지.
‘내 동생이지만 너무 예쁘다.’
피아나가 사교계에 데뷔하면 케이틀린의 세계는 끝이 날 것이다. 나날이 미모를 갱신하는 건 라미엘만이 아니었다.
“나 요즘 글 배워.”
“정말? 대단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언니가 피아나한테 편지 보낼 수 있겠네.”
“응, 응!”
편지라는 말에 피아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레이.”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영 표정이 좋지 못한 르아넬로 부부는 싸늘히 딸의 이름을 불렀다.
“너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어?”
에이나의 매서운 눈빛이 레이의 얼굴을 콱콱 찔렀다. 내일이나 소식이 닿을 줄 알았더니, 루이반 가문의 명성답게 벌써 수도 곳곳에 소식이 퍼진 듯했다.
사실을 알면 부모님이 바로 연락을 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새벽부터 직접 달려올 줄은 차마 예상 못 했다.
“결혼식이라니. 난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단다.”
레이를 꼭 껴안고 있던 피아나가 날선 모친의 반응에 슬금슬금 팔을 풀고 원래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앉았다.
“결혼식에 부모를 부르기는커녕 결혼 소식조차 알리지 않은 딸을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아, 그게요, 그러니까…….”
라엘, 뭐 하십니까, 제발 빨리 나타나요! 당신의 미인계 지금 써야 한다고!
“자식 결혼에 초대받지도 못한 부모라니 내가 너무 망신스러워서 정말. 공작 부인 되셨다고 집안을 완전히 무시할 생각이신 건가요?”
“설마요. 오해십니다.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 무슨 사정인데?”
사정이 있다는 말에 에이나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매섭게 올라갔던 눈꼬리가 스르륵 내려왔다. 무슨 사정인지 들어 보겠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레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오스카가 먼저 작게 물었다.
“레이, 혹시 루이반에서 널 무시하니?”
“네?”
듣는 사람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오스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응접실에 자신들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차 물었다.
“루이반이 널 제대로 대접하고 있느냐고.”
마린의 거미줄 소식까지는 미처 못 들으셨던 걸까. 그것까지 들었다면 대접 못 받는단 소린 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그럼요. 목걸이 소식 못 들으셨어요?”
“들었단다. 그 소식을 먼저 들었어. 마린, 그게 루이반에 팔렸다고.”
오스카는 신중히 말을 고르는 듯 조금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고가의 물건을 선물하는 건 널 위한 게 아닐 수도 있단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저 과시하려는 목적이 더 클 수도 있어.”
오스카가 정확히 본질을 꿰뚫고 있어서 레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마린의 목걸이는 과시용이었다. 애정을 금액으로 표시하여 재혼을 막고자 한 목적이었다.
“네가 여기에서 불행하다면…….”
오스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젠 파혼이 아니라 이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이혼녀 딱지가 떡하니 붙게 되므로 섣불리 루이반을 나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불행은 무슨 불행이에요. 좋아 죽겠다고 자는 척하고 몰래 탈출까지 했던 애가. 라이트 가문 그 징글징글한 것들 뻥 찬 거 잘했어. 우리보단 네가 보는 눈이 더 있었네.”
에이나의 말에 레이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어머니, 파혼했다고 몇 날 며칠을 닦달하실 땐 언제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에이나가 멋쩍은 듯 말했다.
“흠, 그땐 몰랐지. 그놈이 그렇게 개차반일 줄.”
에이나의 말을 들으니, 웨버가 르아넬로 부부에겐 입 안의 혀처럼 굴었던 듯했다. 직접적으로 돈이 나오는 구멍을 정확히 알고 있던 것이다. 그 구멍이 막혔으니 본성을 드러낸 것이고.
부모님의 말에 레이는 어딘가 찡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곤 평생 생각도 못 했다.
“루이반에 와서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우릴 부를 생각도 안 하고 결혼식을, 하아…… 올리다니. 우릴 이렇게 무시하는 걸 보면 너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부모님은 결혼 소식을 듣고 잠도 못 자고 달려왔다고 했다. 작위나 권력으로 짓누르면 어떡하나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본인들 딸이 잘 살고 있는지.
명예욕이 있는 에이나지만 그녀는 루이반 같은 거대 가문은 생각조차 안 했다.
“난 그저 오스카가 사업할 때 지위 때문에 무시당할 일이 없었으면 했다. 너도 잘 알다시피 이 사람 심성이 워낙…….”
큰 사업체를 꾸려 나가는 사람치곤 심하게 안정 지향적이고 대범한 구석이 없는 오스카다. 소심하고 심약한 편인 그를 일부에선 은근슬쩍 무시하기도 했다.
“너와 우리 집안이 무시당하지 않고,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정도의 적당한 가문에서 사윗감을 고를 생각이었단다.”
이 말에 이어 에이나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작위가 높으면 더 좋고, 거기에 레이 네가 잘 살면 더욱더 좋고.”
처음으로 듣는 모친의 속마음이었다.
여태 레이는 에이나가 명예욕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리담은 결혼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니까, 이왕 결혼하는 거 집안과 딸의 평안까지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말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서먹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는 부모였다.
언젠가 미래에 자신이 이혼을 하고 더 이상 루이반 공작 부인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수도를 떠나갈 일은 없겠구나.’
처음엔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직접 만나 사정을 잘 설명하고 떠나면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는 자신의 선택을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재혼 독려 끝에 포기해 주거나.
“두 분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저 정말로 좋아서 루이반에 있는 거예요.”
“정말이니?”
“네, 아버지. 어머니도 걱정 마세요. 결혼을 급작스레 하게 된 건…….”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라미엘이 모습을 보였다.
가볍게 정복을 차려입은 천사님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레이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허리에 팔을 둘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히 준비를 하느라 그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건 르아넬로 부부였으니 라미엘에게 준비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레이, 속은 괜찮아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묻는, 반은 덮고 반은 깐 머리를 하신 천사님을 보니 레이는 그저 성은이 망극했다. 지난밤의 추태는 잠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두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엔 정말 죄송했어요.”
레이가 뒤이어 라미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따 사과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라미엘은 레이의 비장한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레이를 보고 웃다가 르아넬로 가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 넋이 나간 여섯 개의 눈동자가 뚫어질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미엘이 레이의 허리에 감은 팔을 풀어내고 부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후와아.”
어린 피아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작게 내뱉고는 덜컥 놀라 작은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피아나, 언니도 그 맘 잘 안다.’
레이는 공감하는 눈빛으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은 제가 고집을 부려 그리되었습니다.”
아무리 사위라고 해도 라미엘은 르아넬로 가문엔 까마득한 지위의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정중한 어투로 부부에게 존댓말을 하고, 심지어 방금 전에 분명 레이에게까지 말을 높였다.
“하루라도 빨리 부부가 되고 싶어서 정식 작위를 받자마자 하자고 밀어붙였습니다.”
너무 깍듯한 라미엘 루이반의 말에 르아넬로 가족은 놀라서 벌어진 입도 다물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두 분께 실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아니, 아닙니다. 공작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레이가 잘 있는 걸 확인했으니 괜찮습니다.”
“대신 피로연을 르아넬로가에서 열고자 하는데…….”
엄청나게 기뻐하는 에이나의 저 표정이 확실한 대답이 됐으리라. 라미엘이 다시금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라미엘의 말에 윌포프가 나섰다.
“저는 루이반을 관리하는 집사 윌포프 드라레타입니다.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라미엘의 미인계와 상상 이상의 극진한 대접에 르아넬로 가족은 그야말로 마음을 빼앗기고 홀렸다.
‘라미엘 미인계 대단하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말도 안 되고 같잖은 이유가 먹히는 건 라미엘의 얼굴이 개연성이기 때문이리라.
윌포프의 안내하에 어느새 자신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꿈꾸는 듯한 얼굴로 루이반 저택을 걷는 세 사람을 보니 레이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새삼 결혼을 했다는 게 실감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