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마님의 위엄
하루는 무난히 흘러갔다.
저녁 식사도 화기애애했고 어지간한 저택의 방보다 더 좋은 손님방에 모셔진 르아넬로 가족은 라미엘 찬양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내부 인테리어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는지 에이나는 집에 돌아가면 자신의 방을 이런 식으로 꾸미겠다며 윌포프를 불러 인테리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아침과는 달리 평온하게 마무리되는 하루였다.
“언니, 레이는 공작 부인이잖아.”
“응. 이제 그렇게 됐네.”
어둠 속 정원에서 푸엥을 꼭 껴안고 있는 레이 옆에 선 피아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쫓겨나도 돼?”
평온한 마지막에 르아넬로 부부가 푸엥을 보고 약간의 소란을 일으켰다.
푸엥은 그저 새로 온 손님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러 온 것뿐인데 털이 검어 천대를 받고 말았다.
“내가 데려온 개예요!”
“검은 개를 데려와? 미친 거니?”
“왜 미쳐? 검정이 뭐 어때서요! 나랑 아버지도 까만 털인데.”
“그걸 말이라고 해?”
레이와 에이나가 싸우고 오스카가 말리고 아직 사회 편견이 덜 주입된 피아나는 그사이 푸엥과 친해졌다.
밤 시간 약간의 소란은 그 불길한 검은 짐승을 당장 루이반 밖으로 내보내라는 에이나의 말에 발끈한 레이가 푸엥을 껴안고 정원으로 나오면서 끝났다.
피아나는 언니에게 가 보겠다며 레이 뒤를 쫓았고 그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검은 개를 싫어하는 하녀들은 차마 가까이서 마님을 모시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공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아직 언니가 위엄이 좀 부족한가 보다.”
“위험?”
열두 살 르아넬로가 막둥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내 동생, 귀여워 죽겠네.
“멍멍이 안아 볼래? 아까 안에서 어머니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못 했지?”
“응!”
“얘 이름은 푸엥이야. 푸엥이 피아나처럼 좋은 친구가 생겨서 좋대.”
피아나가 레이의 품에 안긴, 어둠 속에서 빨간 혀만 동동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푸엥의 등에 손을 댔다.
“헥헥.”
푸엥의 꼬리가 맹렬히 돌았다.
“아이고, 내 새끼. 저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니까 신나 죽네.”
피아나가 레이가 건넨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자 푸엥이 온 얼굴에 뽀뽀를 퍼부으며 반겼다.
“우와, 언니, 푸엥이 나 좋아해.”
“그러게 뽀뽀를 엄청 해 주네?”
두 사람은 아예 정원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아나가 잘 시간이 다 되었지만, 앞으로 둘이서 오붓하게 있는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재우기 조금 아쉬웠다. 피아나도 같은 마음인지 오늘따라 레이 곁에 더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레이는 동생의 탐스러운 밤색 머리를 쓰다듬다가 말했다.
“피아나.”
“응.”
“나중에 우리 피아나 다 컸을 때 말이야.”
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피아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결혼하기 싫으면 언니한테 와.”
라미엘과의 계약은 레이알렉시스가 인생에서 가장 크게 얻어 낸 성취였다. 비록 얼결에 시작했지만 이 순간만 지나면 완전히 자유다.
내 인생을 사는 것.
한국에서나 가능하다 여겼던 삶을 여기서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난 기쁨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피아나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게 정답이야. 언니는 피아나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게.”
언니는 조만간 미래에 집도 있고 돈도 많을 예정이거든. 피아나 하나 정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어.
지금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피아나가 조금만 더 커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부스럭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크레하가 다가오며 물었다.
“크레하 경.”
“어둠 속에 계셔서 놀랐습니다. 왜 여기 계십니까? 밝은 데 계시지 않고.”
“자매끼리 비밀 이야기 중이라서.”
“헝헝!”
푸엥이 크레하의 발치로 달려가자 그는 늘 하던 것처럼 발로 슥 밀었다.
푸엥은 이걸 놀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유독 크레하만 보면 발로 달려들어 몇 번이고 제 몸을 기댔는데, 오늘은 피아나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금세 레이의 치마폭으로 돌아왔다.
“들어가시죠. 늦었습니다. 아니라면 정자나 분수 쪽으로라도 이동하시죠.”
밝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말이었다.
레이가 피아나와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동생의 고개가 톡 떨어졌다.
“아고.”
레이가 급히 피아나의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어쩐지 지금까지 생생하다 했더니 한순간에 잠이 들어 버리네.”
크레하가 레이의 품에서 피아나를 안아 들었다.
“크레하 경은 여기 어쩐 일이야?”
“라미엘 님께서 모셔 오라고 보냈습니다.”
라미엘의 아내와 처제, 그 둘을 가까이서 모시는 하녀는 없었다.
아무리 이곳이 루이반 영역이고 보안이 철저하다고 해도 누군가의 침입이 마냥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검은 개가 있어 하녀들이 꺼리는 심정은 알겠지만 공작 부인과 그녀의 어린 여동생이 이런 어둠 속에 있는데 멀리 서 있는 건 직무유기였다.
그간 그나마 너른 마음으로 봐주고 있던 라미엘은 레이가 이제 정식 부인이 되었음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니 칼을 빼 들었다.
저택 내에서 검은 개에 편견이 없는 크레하를 정원으로 보내 두 사람을 지키게 하면서, 윌포프에게 앞으로 개를 핑계 삼아 일 똑바로 안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잘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들어가시죠. 늦었습니다.”
“응. 푸엥, 가자.”
하녀들이 뭔가를 직감하고 바로 레이의 뒤에 따라 섰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크레하는 그들을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저 둘은 지금처럼 마님 곁에 서거나, 마님 뒤를 따라다닐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
극진한 대접을 받은 르아넬로 가족들은 루이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에이나의 성격을 파악한 라미엘의 쐐기를 박는 서비스였다.
르아넬로 사람들이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집사는 그제야 작게 아무도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윌포프는 아찔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주인의 깜짝 결혼 소식에 그날 밤새 잠 한숨 못 잤다. 그리고 그렇게 피곤한 상태로 바로 르아넬로가 사람들을 접대해야 했다.
태자는 라미엘의 연애 소식을 듣고 흔쾌히 작위를 수여하겠다 답신했었다. 태자의 확답하에 윌포프와 테일러는 약혼식을 결혼식처럼 거창하게 올리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허튼짓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이미 황실에 두 사람의 혼약서가 올라가 있었다니.
‘그래서 태자가 작위를 내린 거군.’
자신이 구상하던 모든 계획은 헛된 작업이었던 셈이다.
‘어째서 공작님은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을까.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윌포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드라레타 사람들이 모두 앞장서서 라미엘 모자를 괴롭혔다는 건 익히 잘 아는 사실이다.
혹여 그런 것 때문에 아직 자신에게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이라면 윌포프는 정말로 억울했다. 아무리 철의 집사라고 해도 저 역시 사람이니까 그런 감정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만둬 버릴까.’
난생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택에 검은 개가 날뛰고, 후사 생각이 없는 라미엘을 보면 이대로 루이반이 사라질까 봐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가족들이 비웃는 대로 루이반이 무너지는 건 죽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이 일을 크레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마님이 뭐 어때서? 다른 영애들보다 못할 것도 없는데. 네 말대로 루이반은 뭘 해도 루이반이라며. 마님 하나가 뭔 대수겠냐. 별걸 다 심각하게 생각하네.”
……라는 말을 듣고 조금 놀라기는 했다.
‘짐승이 제법 사람 같은 말을 하잖아?’
루이반은 루이반이다.
그 말에 술렁이던 윌포프의 속에 약간의 평정이 찾아들었다. 크레하의 말로 속이 달래졌다는 사실이 조금 찝찝했지만 그가 도움이 되긴 했다.
“난 마님이 좋아. 재밌잖아. 여기서 저렇게 다채로운 사람 본 적 있어?”
크레하가 말하는 여기가 수도인지 루이반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윌포프 역시 다채롭다는 말에는 동감했다.
속이 투명한 사람.
귀족들 사이에선 보기 힘든, 보여선 안 되는 것이었다. 제 주인도 언제나 가면을 쓴 듯한 미소를 짓거나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주인 표정 풍부해진 거 모르겠냐?”
문제 같은 말을 툭 던지고 크레하는 집사의 집무실을 나섰다.
‘공작님의 표정이 풍부해져?’
무표정 이외에 라미엘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이라곤 미간 찡그리기, 비웃음, 영업용 미소가 전부였다. 혹독한 어린 시절 탓에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고 딱히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던 부분이었다.
크레하의 말에 윌포프는 처음 레이알렉시스를 만난 날, 주인이 소리 내어 웃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 맞다. 내가 놀랐었지.’
레이알렉시스는 일단 주인 마음에 들었다. 그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했다는 말이다. 아마 주인은 그녀에게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봤고 그래서 선택을 했을 터였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윌포프는 마님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 더 열성을 다하기로 했다.
앞으로 1년 뒤 주인이 어쩔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작 부인이 절대 루이반의 명성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과 관리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레이알렉시스가 이곳을 떠나도 루이반은 절대 흠결 하나 없도록 말이다.
윌포프 드라레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