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계약 조항
헤덴은 파르베제에게 받은 길지 않은 명단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쟁쟁한 루이반 가문의 결혼식이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왔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 수가 적었다. 결혼식 날 자신이 갔던 저녁 시간 대에 휴게실에 갔던 사람들을 추리니 그 목록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이건 너희가 맡아라.”
추려진 명단에 포함된 사람은 147명이었다.
헤덴은 이 명단을 셋으로 나눠 담당자를 지정하고, 개중에 가장 상위 귀족들을 추린 것은 자신이 가졌다.
그간의 경험상, 고위 귀족들은 행동반경이 정해진 경우가 많아서 ‘그 흔적’을 그들에게서 찾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아마도 세 명단 중 제일 소득이 없고 허탕을 칠 게 분명했다.
헤덴은 절대 이 명단을 맡고 싶지 않았으나 신관들이 고위 귀족은 다루기 힘들다 죽는 소리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귀족들은 신과 통한다는 신관들을 존중하기는 하나 그들의 말을 따르고 협조를 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헤덴이야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지만 그 이외에 대단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신관은 베롬에 없었다.
“끙. 일단 제일 센 놈부터 찾아가야겠구먼.”
헤덴이 시큰둥하게 명단 가장 위에 있는 글자를 펜으로 툭툭 쳤다.
***
르아넬로에서 열리는 루이반 공작 부부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참가할 수 있었기에 루이반에 라인을 대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르아넬로가를 방문했다.
루이반은 피로연 손님에 대한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고, 무작정 가서 비벼 대기에는 워낙 대가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르아넬로 부부를 공략하려 했다. 르아넬로 가문이 귀족이 아닌 것도 문턱을 낮추는 데 한몫했다.
각종 사업에서 잔뼈 굵고 콧대 높은, 그래서 늘 르아넬로를 무시하던 경쟁 업체조차 에이나의 취향에 맞는 보석들을 세트로 보내올 정도로 피로연은 라비던의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처음으로 느끼는 권력의 맛에 에이나 르아넬로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이 상황이 피로연 명단을 작성하기 전까지의 한순간 꿈이란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오스카는 갑작스레 르아넬로에 몰리는 관심을 부담스러워했으나 기분이 썩 나쁜 것은 아닌지 히죽히죽 웃으며 다녔다.
그렇게 부부가 행복한 마음으로 명단 작성을 고심하기 시작했을 때, 루이반에서 연락이 왔다.
앞으로 르아넬로를 도울 전문 경영인, 하버트 라헤이를 보내 준다는 소식이었다. 보수까지 루이반이 지불한다는 말에 에이나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
“많이 즐거우신가 보네.”
특급으로 루이반에 도착한 편지에 에이나는 레이에 대한 칭찬, 라미엘에 대한 찬양을 빽빽하게도 적어 보냈다. 며칠 뒤면 피로연에서 볼 텐데 편지를 보낸 걸 보면 그녀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레이가 편지를 잘 갈무리해 서랍에 넣고 나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마님, 윌포프입니다.”
“들어와.”
레이의 허락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자이너가 도착했습니다.”
피로연에 입을 드레스를 맞추는 날이었다.
“응.”
방 안으로 들어선 디자이너를 본 레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엘빈 님? 세상에! 와, 너무 대단한 분이 오신 것 같은데요.”
황실 디자이너라니!
태자가 보내 주기로 한 것인가.
“피로연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황실에서 보내 준 게 아니라 그녀가 자의로 왔다는 말이었다.
“너무 영광이에요. 귀한 분이 이런 곳까지 다 찾아오시고.”
황송하기 그지없는 방문이었다.
루이반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황실 소속의 디자이너가 외부로 나올 일은 극히 드물었다.
수도 유행을 주도하는 황실이기에 디자인 주도권이 바깥으로 넘어가는 것을 꺼려 허락받기도 힘들거니와 황실 전체 의상을 총괄하는 업무 강도 특성상 외부 작업은 불가한 일이었다.
“이런 곳이라뇨. 루이반 가문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극찬 감사합니다.”
엘빈은 루이반의 피로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태자비에게 외출 신청을 올렸다. 눈을 반짝이며 순수하게 실력을 찬탄해 준 공작 부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태자비는 엘빈의 빡빡한 스케줄을 고려해 반려하려 했으나 본인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허락을 했고, 엘빈은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루이반으로 연락을 했다.
몸이 고될 것이란 걸 알고 있지만 신분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실력만 보아 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의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바로 작업을 시작해 볼까요?”
엘빈의 말에 레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수십 개의 옷 조각들을 몸에 대 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엘빈이 가져온 건 수십 장의 스케치와 천이었다. 조각보 맞춤 드레스가 아니라 레이의 몸에 맞게 완제품 드레스를 제작하겠다는 말이었다.
이 정도로 귀한 걸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드레스는 다 팔아도 이건 절대 팔지 말아야겠다.’
엘빈의 드레스는 이제 웃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었다. 황실에 소속된 뒤로 황족들을 위한 옷만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중에 얼마 남지 않은 엘빈의 드레스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고, 그마저도 찾기 어려웠다.
엘빈은 순식간에 치수를 재고 천을 골라 디자인을 뽑아낸 뒤 ‘다음 작업 때 뵙지요.’라는 인사만 남기고 쿨하게 떠났다. 귀한 몸답게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는 일 없이 야무지게 일만 하고 돌아간 것이다.
“나 가보로 간직할 거야. 가문의 드레스도 아니야. 엘빈 드레스랑 마린은 그냥 가보로 둘래.”
꿈꾸는 듯한 레이의 눈빛을 보면서 윌포프가 빈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마린의 거미줄과 엘빈 님의 드레스는 루이반 가문에서 특별히 귀하게 보관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레이의 말에 윌포프가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한 뉘앙스로 답했다.
“루이반에서 구매한 것들이니 당연히 루이반 소속품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죠? 왜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
‘라미엘이 물건들 전부 나 주는 거라고 집사한테 이야기를 안 했나?’
계약 결혼이라는 건 알아도 실제 계약서가 작성되었다는 것과 내용 자체는 당사자 두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다.
집사가 물건 소유권에 대해서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를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는 윌포프를 물린 뒤 라미엘의 서재로 달려갔다. 두 사람의 결혼 계약서가 보관된 곳이었다.
“라엘, 우리 계약서 잠깐 좀 볼 수 있을까요?”
라미엘은 갑자기 서재로 들이닥친 레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콧대 높은 황실 디자이너가 직접 연락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엘빈에게 연락을 받은 뒤로 계속되는 의문이었다. 심지어 레이 본인도 디자이너가 엘빈인 줄 모르던 눈치였다.
“드레스는 잘 맞췄나요?”
“네. 드레스 가봉할 때엔 라엘도 함께 참석하는 거죠?”
라미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엘빈 님 작업하는 거 라엘도 봐야 했어요. 다음에 잘 봐요. 정말 대단해요. 순식간에 손이 이렇게 막 샤샤샥, 하고 움직인다니까요.”
어린아이가 길거리 광대 공연을 보고 난 뒤 신나고 신기한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 부모가 봤다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를 천진하고 맑은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평민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니 실력이 보통은 아닐 겁니다.”
“엘빈 님이 평민이에요?”
레이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명해요. 황실의 파격적인 인사기도 했고.”
엘빈의 출신을 문제 삼는 이들도 많았지만 압도적인 실력 앞에 신분은 유야무야했다.
“얼마나 실력이 대단하면 황실까지. 진짜 굉장하신 분이 날 담당한 거였네. 더더욱 황송한 기분이에요. 다음에 만나면 진짜 박수도 쳐 줄 거야.”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엘빈이 왜 루이반 공작 부인의 옷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는지 알았다.
이 대단한 가문에서 듣기 힘든 진심이 담긴 최고의 찬사를 보냈으니 마음이 기울 수밖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레이알렉시스는 사람 마음을 흔드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갑자기 이건 왜 찾나요?”
레이는 라미엘이 서랍 비밀 공간에서 빼낸 계약서를 받아 들고 조항을 상세히 살폈다.
「레이알렉시스가 루이반 부인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루이반에서 제공한다.」
“없네, 없어! 맙소사.”
계약서를 아무리 꼼꼼하게 다 읽어도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는 문항이 있을 뿐, 자신이 사용하고 구매한 것들을 준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절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왜 이걸 확인 안 했을까, 지난날의 나.
“라엘, 지금 계약서에 조항 하나만 추가, 해 줄 수 없죠?”
“무슨?”
“그, 여, 여기에…….”
레이의 표정은 지난번 주사를 부린 다음 날, 제대로 사과드리겠다고 한 뒤 집무실로 와서 무릎을 꿇으려 할 때처럼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야 사과는 됐다고 레이를 물렸는데 이번엔 대체 무슨 일로 이러나 싶어 호기심이 일었다.
“제공품은 레이알렉시스에게 준다는 조항을 별첨하는 건 어떨까요.”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이미 별장과 15로베를 얻었음에도 사람 욕심이란 게 그랬다. 10을 바라다가 50을 받으면 너무도 고맙지만 100을 받을 줄 알았는데 50을 주면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쓰던 걸 루이반에 둔다면 윌포프가 얼마나 찝찝해하겠어요.”
깐깐쟁이 집사 윌포프를 슬쩍 팔아넘겨 보았다.
“레이.”
“네.”
“나도 조항 하나 더 추가하죠.”
“그럼요. 그래야 공평한 거니까.”
“상대방의 주사를 받아 주면…….”
레이가 기겁을 하며 말을 막았다.
“아악! 그만! 그만, 그만! 어후, 무슨 조항 추가야. 제가 욕심이 참 과했어요. 그쵸?”
레이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다른 손으로 계약서를 다시 라미엘에게 건넸다.
계약서를 넘기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창피해서 그런 건지,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라미엘은 앞으로 레이를 막을 때 그 괴상하고 질척한 주사를 들먹이면 되겠구나, 하는 팁을 얻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일 보세요.”
레이가 비실비실한 걸음으로 터덜터덜 라미엘의 서재를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라미엘이 웃고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 팔자…….”
보석도 드레스도 모조리 루이반의 것이라니 허탈하기 그지없다.
아까 드레스를 맞출 때 거기에 어울릴 보석은 뭘 고를까. 팔기 좋은 거로 하려면 너무 비싸지 않은 게 더 나으려나, 같은 생각을 하던 일이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천년의 구매욕도 다 식어 버렸다.”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뚝 떨어진 의욕이 바닥을 파고 내려갔다.
‘하다못해 마린의 거미줄만 내 거였어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어라……?”
진짜 눈물이 나오네.
하. 나 참.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드레스를 맞출 때만 해도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해맑던 마님이다. 그런데 삽시간에 눈물이라니.
윌포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차마 돈 때문에 눈물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어 레이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어.”
눈에 드레스랑 보석이 들어갔어. 그래서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