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피로연 (1)
“저택 사람들을 바꿔요?”
취침 시간.
부부 침실로 들어온 라미엘은 저택 인사에 변화가 있을 거라 예고했다.
“앞으로 레이 담당 하녀는 지난 연회에서 봤던 케이와 엘입니다.”
결혼 한 번 한 것뿐인데 저택 내 사람들이 대거 물갈이되었다.
라미엘이 루이반의 수장이 되면서 저택 내 사람들을 싹 갈아엎었다고 들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또 대거 인사이동이라니. 특히나 자신의 전담 하녀까지 바뀔 줄은 몰랐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난 아무 불편 못 느꼈는데.”
“당신을 제대로 보필 못 했는데 그대로 둘 순 없지.”
그들이 자신을 보필하지 않은 건 검은 개가 불길해서 피하는 것이지, 푸엥이 눈에 띄지 않을 때는 극진히 모시기는 했다.
“푸엥 때문에 쭈뼛거리기는 해도 할 일은 제법 잘했던 것 같은데.”
“고작 미신 따위에 휩쓸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자는 이곳에 필요 없습니다.”
라미엘은 정말 가차 없구나.
“그러다 루이반에 남는 사람이 없겠어요.”
다른 곳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의 업무 환경을 자랑하는 곳이 루이반이었다.
봉급도 많고 휴가 사용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일도 분담이 잘 되어 있고 윌포프의 꼼꼼한 관리하에 체계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거기에 루이반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프라이드도 한몫 단단히 하기에 실제 루이반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넘쳐났다.
레이의 걱정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것이었다.
“레이가 염려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할 일은 감히 당신을 제대로 모시지 않는 사람을 치워 내는 거예요. 무른 마음으로 봐줘야 하는 게 아니라.”
결혼식까지 올렸으니 레이는 이제 완벽한 루이반의 안주인이다.
레이알렉시스 루이반.
명실상부 라미엘의 반려이며 그에 합당한 힘을 쥐어야 했다. 그런 레이를 고작 미신 때문에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루이반을 떠나는 게 맞다.
레이가 어디에서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라미엘은 기분이 아주 언짢아지려 했다.
단지 약간의 상상만으로 기분이 저조해지는 건 레이가 대접을 못 받는 것이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라 여겼다. 이제 두 사람은 하나로 묶인 상태니까. 루이반이 무시당하는 거니 그런 거겠지 했다.
그는 자신이 루이반이란 가문에 애착이 없고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라엘,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위를 빌미로 여태 그래 온 것보다 더 심하게 막말하고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요.”
아마 지금쯤이면, 혹은 이미 예전에 라미엘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자신이 악담을 하고 돌아다닌 것은 결혼을 피하기 위해 부러 그랬다는 걸. 재혼법이 개정된다고 하는 마당이니 더더욱 난동을 부릴 수도 있다.
“그 정도 뒷수습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레이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반쯤은 농담으로 던진 말에 생각도 못 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당신의 뒷배가 되어 줄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든든한 말이었다.
레이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라미엘이 자신의 재혼을 막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이런 악녀임에도 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한다고 판을 까는 것. 조금 더 견고하게, 좁고 작은 무대를 펼쳐 놓고 다른 이를 그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더 가까울 발언이다.
하지만 그게 어떠한 목적이든 라미엘의 말은 레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설레면 안 되는데, 대본에 적힌 뻔한 대사 같은 건데도 마음에 살랑이는 기운이 몰아닥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라미엘이 정말 작정하고 유혹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속절없이 흔들리다가 계약서 조항을 떠올렸다.
「절대 상대에게 반하지 않는다.」
「계약 위반 시, 유책임자는 상대에게 계약 완수금의 두 배를 지불한다.」
‘계약 완수금의 두 배라면 30로베.’ 300억 파브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떠올리자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안 돼!”
레이는 양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정신 차려, 레이알렉시스! 사랑은 한순간이지만 돈은 영원한 것이야!
갑작스러운 레이의 기행에 소파에 마주 앉아 있던 라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레이, 뭐 하는 겁니까?”
허우우, 얼굴 봐. 미쳤다. 계속 보다가 반하게 생겼잖아.
원래도 잘생긴 남자였고 평소에도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잠깐 이상한 쪽으로 자각까지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해악한 얼굴 같으니.’
레이는 라미엘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내고 말했다.
“잠이 와서요.”
라미엘은 얼토당토않은 레이의 말보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밀어낸 게 왜인지 조금 더 신경이 쓰였다. 그가 잠시 허한 자신의 손을 살짝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잠이 오는데 왜 이런 짓을?”
“상대방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잠들면 실례니까요.”
“그렇다고 볼이 빨개질 정도로 친 겁니까?”
“그, 그럼 볼이 아프니까 이만 잘게요.”
볼이 아픈데 왜 자냐.
허튼소리를 한 혀를 살짝 깨물어 주고 레이는 비척비척 침대로 향했다.
생각이 한 번 꼬이니 말과 행동까지 꼬이는 모양이다. 그녀는 드레스 차림으로 흐느적거리며 침대로 들어가려 했다.
“그 꼴로? 레이, 술 먹었습니까?”
“안 마셨어요. 누굴 주당으로 아시나.”
그러면서 레이가 다시 침대 밖으로 나왔다.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자리 비켜 주세요.”
결혼 후 이젠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두 사람이 따로 잘 수가 없어졌다.
정략결혼으로 데면데면한 사이야 친해질 때까지 따로 잔다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두 사람은 결혼 전부터 이미 별장을 다녀왔으며 서로 사랑해 마지않는 사이이기에 부부 침실에서 함께 자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고민 끝에 따로 자다가 아침 일찍 하녀들이 들어오기 전에 라미엘이 침대로 와서 일어나는 척을 하기로 했다.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루이반 공작이 워낙 공사다망한지라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인물이다 보니 현재는 무탈히 진행되고 있었다.
라미엘이 침실과 연결된 문으로 나가고 레이는 줄을 당겨 하녀들을 불렀다.
***
피로연은 성대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루이반의 결혼 피로연이다. 손님들이 춥지 않도록 정원 여기저기엔 마력석을 달아 온도를 실내처럼 따뜻하게 유지했고 경호 인력도 황실 수준으로 배치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르아넬로 저택과 정원엔 손님들이 가득했고, 저마다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부부를 축하해 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나라가 굴러갈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귀족들과 굵직한 사업가들이 자리를 채웠다. 여자들의 사교 활동 역시도 치열하게 벌어졌고 곳곳에서 사회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태자 부부가 참석한 것은 아니었지만 축하 성명을 보내 왔고 일부 황족들도 자리했다. 깜짝 결혼식에 참석 못 했던 귀족들도 비로소 축하를 건넬 수 있었다.
라미엘 곁에 선 레이는 엘빈이 만든 우아한 푸른 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마린의 거미줄을 걸고 있었다. 마린의 거미줄을 다시 꺼내 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에이나가 너무도 강력하게 원하는 바람에 착장에 추가를 했다.
이 대단한 목걸이도, 엘빈이 만든 우아한 드레스도 제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이전만큼 크게 감흥이 오진 않았다.
지금 레이가 가장 기뻐할 사실은 이 피로연만 마치면 이제 다 끝난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큰 행사는 당연히 더 없을 것이고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레이는 절대 대외적으로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일 없이 안락한 루이반에서 탱자탱자 놀다가 계약금을 챙겨 들고 수도를 떠나면 된다. 미래에 어디서 살게 될지 고민하느라 아직도 별장을 정하진 못했지만, 1년 안으로만 고르면 된다는 확답도 받아 둔 상태였다.
레이가 흘끗 라미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짜 먹음직스러운…… 이 아니라 정말 탐나는 사람이다.
베르니가 300억 파브는 되겠지? 그걸 받고 라미엘한테 들러붙고는 위약금으로 다시 베르니를 주면 어떨까.
“미쳤다, 미쳤어.”
너무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돌아도 단단히 돌아 버린 상상에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욕심낼 게 따로 있지. 정신 차리자.’
레이가 들고 있던 술을 쭉 들이켰다. 시원하고 청량감 있는 술 덕분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행여나 지난번 같은 끔찍한 일이 발생할까 봐 걱정이 됐는지, 결혼식 때 마셨던 것의 반도 안 되는 낮은 도수의 술이었다.
레이가 술을 마시자 지난날이 생각이라도 났는지 팔짱을 끼고 있는 라미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안 취합니다. 주사 안 부려요. 이번에도 또 제가 취하면 저기 분수대에 버리셔도 이해할게요.”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기절시켜 드리죠.”
“친절하기도 해라. 반할 뻔했습니다?”
가볍게 톡 쏘는 듯한 말에 라미엘은 지루한 가운데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미 반한 건 아니고요?”
사람들 응대를 하느라 진이 빠지는데도 농담을 할 만큼 즐겁다는 건 라미엘 스스로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눈치 빠른 남자는 이래서 싫다니까. 자요, 마린의 목걸이 줄 테니까 위약금 하세요.”
레이가 그를 향해 목을 내밀어 보였다. 수면 위 물결이 반짝이는 것처럼 은은히 빛나는 작품이 레이의 움직임을 따라 빛의 물결을 만들어 냈다.
레이는 별생각 없이, 장난하듯 움직인 것이겠지만 사람들이 그녀가 걸친 모든 것을 보며 소곤거리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정한 눈빛.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귓속말.
마린의 거미줄.
엘빈의 드레스.
이 모든 것들이 루이반 부부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작 각하.”
하버트가 라미엘을 찾았다.
“죄송합니다. 잠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미엘의 표정에 아주 약하게 짜증이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눈치챈 레이가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별거 아닙니다. 잠시 다녀올게요.”
라미엘이 하버트와 함께 피로연장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