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피로연 (2)
인적이 없는 어둑한 후원 구석에서 하버트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제 르아넬로가가 최종 서명만 하면 끝입니다.”
라이트 가문 몰락에 종점을 찍을 최종 서류였다.
그들은 더 이상 은행을 이용할 수 없으며, 약혼을 빌미로 르아넬로에서 받았던 돈까지 토해 내야 했다. 더불어 그들이 영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담은 성토문이 황실에 도착해 있다.
귀족이 돈이 부족해 파산 선언을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기에 큰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영지민들을 잘 돌보지 못한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황실에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돈이 귀한 가문이었으니 돈 문제야 말할 것도 없지만, 백작이 도박에 빠져 영지를 돌보지 않은 것도 라이트 가문이 사면초가에 접어들게 하는 데 큰일을 했다.
라이트 백작은 둘째 아들을 팔아 르아넬로에서 받은 돈으로 첫째 장가를 보냈으며 집안 빚을 갚았다. 그뿐 아니라 귀족 사회의 중심이 되기 위해 주변에 돈을 마구 뿌려 대는 것으로 구겨졌던 가장의 체면을 세우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도박에 빠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갑자기 돈이 생겨 주체가 안 되는, 사회 경험을 못 해 본 허풍쟁이 귀족은 사기꾼들이 가장 노리기 쉬운 자였다.
도박판의 호구.
라이트 백작은 르아넬로 부부에게 입 발린 소리를 하며 레이가 모르게 수차례 돈을 받아 냈고, 그 돈은 고스란히 도박판으로 흘러들어 갔다. 쉽게 번 돈인 만큼 쉽게 썼다.
그래서 그는 둘째 아들이 파혼을 당했을 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개처럼 빌어서라도 레이알렉시스 르아넬로를 데려와!”
웨버는 알렉스에게 돈을 뜯어내고 집을 탈출할 생각이었고, 장남 부부는 이미 연을 끊었다. 이런 상황에 라이트 백작이 영지를 제대로 돌볼 리 없었다. 이런저런 일로 언젠가 망할 라이트 가문이었지만 그걸 좀 더 빠르게, 확실하게 재기 불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라미엘은 라이트 백작이 계속 도박판을 전전할 수 있도록 사람을 시켜 돈을 보냈다. 담보도 없이 돈을 계속 빌려줄 은행이 어디 있다고, 그는 출처도 모르는 돈을 은행 대출이라 믿고 펑펑 써 댔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건 억대의 빚과 원금의 배에 달하는 이자뿐이었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몰락이었다. 영지를 잘 돌보지도 못하는데 돈까지 없다, 그런데 구제가 쉽지 않다. 이 사실이 드러나면 황실에 영지를 회수당하고 작위는 박탈된다.
작위 박탈과 영지 몰수는 여간하지 않은 이상 한 번에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특히나 작위 박탈은 리담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해 여간해선 건드리지 않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트 백작은 시일 내 돈을 갚지 못하면 작위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작성한 상태였고, 라미엘은 이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작위만큼은 포기 못 하고 있는 라이트 백작의 등을 떠밀기 위해, 르아넬로가 그간 라이트와의 약혼 유지를 위해 지불했던 금액을 전부 토해 내란 내용 증명도 보내 두었다.
그리고 이제 오스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황실에 라이트 가문의 문제에 대한 보고를 이미 올려 둔 상태로, 그 결과에 마침표를 찍기 직전이었다. 황실이 아량을 발휘해 작위 박탈은 면해 준다 해도 귀족 사회에 퍼진 라이트가의 소문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라이트 가문의 장남이 이미 작위를 받았다고 해도 본가가 망하면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화려한 삶을 영위하기는 어렵다. 그건 곧 귀족으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끝난다는 뜻이다.
레이를 괴롭히던 자잘한 문제에 완벽한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
“와, 살 것 같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작위 수여도 결혼식도 피로연까지도. 심리적 해방감이 말도 못하게 컸다.
이럴 때 머리털 없는 특이하게 생긴 애가 하는 말이 있다고 유주가 알려 줬었는데, 뭐라고 했었지? ……아!
“이제 레비는 자유예요.”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뒤처리까지도 끝나자 르아넬로 저택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오늘 밤 루이반 부부는 이곳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됐다. 밤이 많이 늦은 데다가 레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에서 자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이지.’
평생을 사용했던 방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루이반에서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내 방이 이리 어색할까.
“빨리 씻고 싶다. 라엘 언제 오나.”
라미엘은 급작스레 변경된 스케줄 때문에 보안 지시를 내리느라 휴식은커녕 저택에 발도 못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마린의 거미줄은 라미엘만 손댈 수 있기 때문에 레이는 여전히 화려한 차림으로 그를 기다려야 했다.
오랜만에 방 안에 앉아 있으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피아나랑 창가에서 자주 놀았는데.’
지금은 침대가 방 가운데에 있지만 원래는 창문 바로 아래에 딱 붙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걸 좋아하는 레이가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깬 후 바로 창문을 열고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위치였다.
‘그때도 창밖을 보려다가…….’
한국에 가게 됐을 때도 그랬다.
고열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바람을 쐬려고 창문을 열다가 추락해서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레이의 몸은 창문에 반쯤 걸쳐진 채였다.
창밖에 혹여 이계로 가는 어떤 장치가 있는 건 아닐까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고열 때문에 꿈을 현실이라 혼동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레이가 입고 있던 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청바지에 작은 주머니가 달린 흰색 면 티셔츠였으니까.
그녀는 누군가가 보기 전에 급히 잠옷으로 갈아입고 한국에서 입었던 옷은 상자에 담아 잘 보관해 두었다.
이세계가 있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세계 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거나 우주의 질서를 위해,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너무 소중해서. 그 시간과 경험들이 너무나 소중해서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닳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세계에 다녀왔다는 말을 과연 사람들이 믿을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세계가 있을 것이란 가정은 있어도 실제로 그와 관련한 경험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세계는 보통 사람들에게 막연한 추측일 뿐이었다.
그러니 섣불리 경험을 이야기해서 귀한 추억을 미친 사람이 내뱉는 헛소리 취급이나 받게 할 순 없었다.
레이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겨울이 부쩍 다가온 탓에 이제는 서늘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레이.”
방문이 열리며 라미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끝난 거예요?”
“네. 끝났어요.”
“라엘, 오늘 늦게까지 고생 많았어요.”
“레이, 위험하니 창가에서 물러…….”
라미엘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달려와 레이를 끌어당겼다.
“엇.”
갑작스레 라미엘의 품에 안기게 된 레이는 버둥거리던 팔로 그의 허리를 살짝 껴안았다.
“갑자기 왜…….”
“누구냐.”
라미엘은 왼팔로 레이를 단단히 껴안으면서 창가에 나타난 침입자를 향해 거침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안 점검을 하기 위해 검을 차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하게 될 거라곤 그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라미엘의 검에 목이 겨눠진 침입자는 당황한 기색도 하나 없었다.
“아하, 세상에.”
그저 놀랍다는 눈빛으로 라미엘 품 안의 레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의 목에 걸린 천문학적인 금액의 목걸이 때문에 평소보다 보안을 몇 배나 신경 써야 했다. 르아넬로가 루이반처럼 소속 기사단이 있고, 가주를 보호하는 보안 시스템이 갖춰진 곳이 아니었기에 피로연을 위한 경호 동선을 전부 새로 짜야 했다.
웨이터와 하인을 가장한 기사들을 곳곳에 배치했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라미엘이 직접 특출한 기사들만 뽑아 만든 그림자단을 두어 어디에서든 레이를 보호할 수 있게 만들었다.
피로연 비용 중 보안에 들인 액수가 단연 으뜸일 정도로 철저한 관리를 했다. 지금도 레이의 방 주변을 그림자단이 예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라미엘이 직접 골라 배치했으니 어영부영한 실력자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훌쩍 지나쳐 레이의 방에 들어온 남자.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누구냐 물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바짝 얼어붙게 만들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검 치우렴.”
남자가 목에 겨눠진 검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라미엘의 단단한 품속에서 레이는 도록도록 눈동자를 굴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허연 무언가가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걸 보자마자 라미엘의 품으로 끌어당겨졌다.
허연 건 사람의 두 다리였고, 음, 그게 허공에서 나타났다는 건 옥상에서 떨어지는 중이었단 건가?
창문으로 저택 주변에 있던 그림자단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이 발견 못 한 고도의 실력자가 주인과 대치 중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잔뜩 경계를 하며 긴장한 상태였다.
“아가, 검 치우라고 말했다.”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벗어 내리고 다시금 검을 톡톡 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레이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 저 정체 모를 침입자가 라미엘을 아가라고 부른 거지?’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라미엘이 서서히 검을 거두어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품에 기대 있던 레이는 고개를 조금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눈 마주쳤다?’
보랏빛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뒤로는 눈만 내놓고 얼굴을 모두 가린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 셋이 검을 빼 들고 병풍처럼 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레이의 머리 위에서 라미엘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예하께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만.”
라미엘이 아는 사람이다?
주인의 반응에 그림자단이 검을 치웠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손짓에 다시 창밖으로 나가 모습을 감췄다.
“맙소사, 여기서 찾게 될 줄이야.”
라미엘의 말에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감탄의 눈길로 그의 품에 안긴 레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하라고?’
라미엘의 호칭을 레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리담에서 예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단 한 명.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