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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39화 (39/160)

39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리담에서 예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단 한 명.

신의 사랑을 받는 성력 충만한 신관이면서 마력까지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

리담의 대신관.

“헤덴 예하?”

“응? 응, 그래.”

레이는 당황했다.

‘그 대단하신 분이 이렇게 미남이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심지어 젊다. 아무리 많게 봐도 라미엘 또래 같았다.

‘분명 현 황제가 태자였을 때 대관식을 해 준 게 헤덴 대신관이라 들었는데.’

그때라면 최소 20년은 넘을 텐데, 어린아이에게 대관식을 맡겼을 리는 없을 테고.

레이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릴 때, 포니테일로 묶고 있던 머리카락이 살짝 당겨지는 느낌이 났다.

“왜, 왜애 그러세요.”

심히 당황스러운 구도였다.

레이를 꼭 껴안고 있는 라미엘, 그의 품에 폭 안겨 있는 레이, 그리고 그런 레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냄새를 맡고 있는 헤덴.

만약 이 상황을 누군가가 그림으로 그려 낸다면 그야말로 훌륭한 치정극 표지로 딱이었다.

“제법 오래 있었구나. 심지어 여기에 돌아왔다니. 이건 획기적인 일이야. 내가 정말 오래 살았나 보구나. 이리 축복을 받다니. 내가 여길 맡길 잘한 게야.”

헤덴은 약간 흥분한 듯 횡설수설했다.

“얘야,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들려주련?”

예쁘고 어린 얼굴에 그렇지 못한 말투.

“예?”

레이가 외모와 말투의 이질감에 대해 생각하는데 헤덴이 다시 물었다.

“네가 다녀온 이계 이야기 좀 해 달란 말이다.”

헤덴의 말에 레이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었다. 그녀는 라미엘을 꼭 껴안고 있던 팔을 서서히 풀고 몸을 돌려 헤덴을 응시했다.

놀란 얼굴을 감출 생각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를 보며 헤덴은 아직까지도 쥐고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그리 놀랐느냐.”

“그, 어, 저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주제에 레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를 정신 차리게 만든 건 차가운 라미엘의 목소리였다.

“응? 아아. 그래. 네가 있었지.”

이제 생각났다는 듯한 헤덴의 말투에 당황한 건 레이였다. 라미엘만큼 존재감이 끓어 넘치는 남자를 본 적이 없거늘, 헤덴은 그를 몹시 하찮게 대하고 있었다.

“아가, 네가 여기 왜 있느냐?”

아니, 만만하게 여기다 못해 그의 소식까지 안 듣고 사는 듯했다.

지금 라비던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는 라미엘과 레이알렉시스의 결혼식과 피로연이었다.

라비던에서 모이는 사람마다 하는 이야기가 루이반의 결혼 소식인데 아무리 대신전이 있는 베롬에 박혀 산다지만 이 정도면 모를 수가 없다. 그냥 라미엘을 무시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결혼 피로연 때문에 있습니다.”

헤덴이 ‘아가’라고 부를 때마다 라미엘의 이마에 힘줄이 비죽 솟는 것같이 보였는데 꼬박꼬박 대답은 잘 한다.

“피로연? 네가 그런 데를 다 왔어? 아가, 많이 컸구나. 사회생활도 다 하고.”

“제 결혼인데 제가 빠질 순 없잖습니까.”

라미엘의 말에 헤덴의 입이 턱 벌어졌다.

‘몰랐다. 저 사람 진짜 몰랐던 거였어.’

라미엘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의 결혼 소식을 몰랐던 거다.

“누가 결혼을 해? 네가?”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대체 누가 너 같은 놈이랑 결혼을 해 주겠다고 하더냐?”

라미엘은 대답 대신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레이를 정중히 손으로 가리켰다.

‘저요. 접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헤덴이 레이에게 물었다.

“네가 아가랑 결혼을 했다고?”

“예. 아가랑 결혼을 한 게 저예요, 예하.”

헤덴처럼 아가라고 칭하자 라미엘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허. 나 원, 요놈 보게.”

외모와 이질적인 헤덴의 말투도 이제 슬슬 적응이 되려고 하는지 정답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의 침묵 후 헤덴이 입을 열었다.

“너무 일찍 간 거 아니냐. 아가는 열넷이잖아.”

예하, 지금 아가 스물둘이에요.

이 말이 레이의 입 밖으로 툭 튀어 나갈 뻔했다.

“그건 토벌전 입단 때 나이입니다.”

라미엘이 약간 이를 악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착각일까?

“아차, 그러면 시간이 조금 지났겠구먼.”

헤덴은 늙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레이는 이질감에 눈을 잠깐 질끈 감았다.

저기요, 말투 겨우 익숙해졌는데 그 얼굴, 그 외모로 늙었다고 하지 마세요.

“아가 몇 살이니?”

“스물둘입니다.”

라미엘은 짜증이 나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대답을 해 주고 있는 눈치였다.

“맞다. 아가, 네가 루이반이었지! 세상에. 이걸 잊고 있었네. 라미엘 차이제임스 루이반이었던가.”

“예. 그렇습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두 남자의 시선이 레이에게 향했다.

“두 분, 대체 어떤 사이인 거예요?”

***

마물이 들끓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지 가는 곳곳 보이는 짐승들은 죄다 마물이었다. 쥐나 토끼 같은 동물인가 싶으면 뿔이 달려 있거나 퇴화된 날개가 붙어 있는 9급이나 8급 마물이었다.

약한 마물들은 강한 마물들의 먹잇감이었다. 보통의 생태계보다 더 약육강식이 철저한 마물의 세계니 9급에서 7급에 이르는 약한 마물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기사 하나하나가 귀한 상황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건 당연히 지양할 일이었다.

하지만 토벌대장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어린 도련님이 하는 말을 들어주며 토벌의 방향이 살짝 바뀌었다. 전력을 아끼기 위해 9급이나 8급 마물 같은 것은 그냥 넘기던 방식에서 모조리 없애는 것으로.

“먹잇감을 없애야 마물들이 서로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약한 놈들을 잡아먹으려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마물들이 인간을 더 공격해 올 것이다.”

“숨어 있는 마물들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지겠군요. 배가 고프면 우리들을 습격할 테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쟁에서도 가장 빨리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일이 식량 보급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사람이 아닌 마물이라서 그렇지, 토벌‘전’이다.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는 중이란 소리다.

본격적인 토벌전에 앞서 민가에 대피 명령을 내렸기에 인근에 사람이 사는 곳은 없으니 모여 있는 기사들만 미끼가 되고 민간인의 피해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투입된 베롬의 신관들이 기사단이 모여 있는 범위에 마물의 기척을 감지하는 결계를 쳐 둔 상태였다. 그 성능을 확인해 볼 수도 있고 마물들을 불러 모을 수도 있으니 괜찮은 수다.

***

황제의 명으로 마물 토벌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전에는 자신들의 구역에서 꼼짝도 않던 마물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진 모양인지, 아니면 강한 마물들이 많아지기라도 한 것인지 사람들이 사는 구역까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곡괭이만 휘둘러도 도망가던 약한 마물들은 민가를 습격해 저장해 둔 음식을 탐하고, 그 와중에 서로를 잡아먹고 싸우는 통에 힘을 키워 점차 강해졌다.

마물은 명명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이름을 붙이면 그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그게 세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생활할 줄 모르는 마물들이 세력을 만들지는 않겠지만 그 어떤 사소한 미신일지라도 마물에게 힘을 실어 줄 만한 짓은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마물들은 처치 강도에 따라 급수로 불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다람쥐 수준의 9급 마물부터 한 마리 처리를 위해 기사 여럿이 달라붙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2급 마물까지가 그들의 토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백여 년 전에나 한 번 등장했던 1급 마물의 출현 이후, 황실에서는 토벌전의 방향을 바꾸었다.

기사들만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고 판단해 황실 마기사단과 베롬의 성기사들까지 투입한 것이다. 베롬에까지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황제가 이번에야말로 마물 멸족을 위해 칼을 갈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어린애를 밀어 넣는 건…….

기사들은 구석에서 검을 정비하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천사 같은 아이를 힐끗거렸다.

아비가 토벌전에 보냈다고 했던가.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기를 쓰는 귀족들이 자신의 아들을 토벌전에 참가시키는 경우는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도움이 될 만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집에서 곱게만 자라던 귀족 도련님들은 실전에선 맥을 못 추기 일쑤였다.

상대가 본인처럼 정도를 걸어 잘 배운 기사일 때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토벌전 상대는 마물이었다. 예측할 수 없고 정석의 길 따윈 없는 기괴한 짐승들이다. 사전에 마물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실전에 투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즉, 말단에서부터 착착 실전 감각을 익히고 올라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귀한 집 자제답게 누군가의 밑에서 명령을 받는 걸 몹시도 꺼렸다. 특히나 평민 출신이 많은 기사들에게 배워야 하는 걸 본인의 자존심이 꺾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위에서 꽂아 놓은지라 되돌려 보낼 수도 없는 처치 곤란한 도련님들 때문에 결국 토벌대장은 어영부영 있지도 않은 기묘한 ‘지령단장’이라는 직책을 하나 만들어 주고 그 자리에 도련님들을 앉혔다.

그리고 토벌전 핵심 작전에서 몰래 그들을 따돌렸다. 이 계획이 언제까지 먹힐 줄은 모르겠으나 일단은 징징이들이 사라져 숨통이 트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번에 입단했다는 저 열네 살짜리 어리디어린 천사님은 그야말로 처치 곤란이었다. 지령단장으로 꽂기엔 너무 어리고 세도 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족 도련님 아닌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라미엘은 모두에게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소년이 루이반에서 보낸 막내 자식이란 걸 알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은 한 방에 바뀌었다. 루이반의 서자, 유명한 일이었다. 왜 그 루이반에서 저 어린 아들을 보냈는지도 뻔히 보였다.

가서 죽으라는 거다.

불쌍하고 딱한데, 나가 죽어 버리면 그 책임을 질 수도 있는지라 기사들은 라미엘을 피했다. 불쌍하고 딱한 존재에서 기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라미엘의 처우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있는 듯 없는 듯 토벌단 말미에서 버티다가 사라질 줄 알았던 당사자는 처음으로 시선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토벌단 기사들이 모두 자신을 꺼린다는 것을 알았으나 루이반에서 보내오던 눈빛과는 아주 다른 양상이었다.

악감이 담긴 눈이 아니라 정말로 무관심한 눈.

제 존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동자들을 보며 라미엘은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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