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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40화 (40/160)

40화. 그들의 첫 만남

“하, 젠장.”

토벌대장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대신관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꼼짝 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헤덴의 보호하에 토벌단은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다. 1급 마물은 문헌에 기록된 것보다 더 강했으니까. 토벌전 초반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1급 마물은 몇 년 새 더 강해진 듯했다.

인근 마물들과 기사들을 잡아먹고 숨을 죽이고 있던 마물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모습을 드러냈다. 인형처럼 생긴 예쁘장한 1급 마물의 지능이 제법 높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일대의 숲이 하나 날아갈 정도의 대폭발 뒤 살아남은 토벌단 기사들은 생각했다. 1급 마물에 대한 기록에 분진 폭발도 추가해야 한다고.

바람이 계속 불어서 마법사들도 감당을 못 하며 쩔쩔매던 폭발을 잡아낸 게 헤덴이었다.

1급 마물의 출현에 다들 혼비백산해서 대신관을 부를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후방에 홀연히 등장한 헤덴은 엄청난 성력으로 폭발을 누르고 기사들의 사기를 돋웠다.

나흘간의 사투 끝에 겨우 목을 베어 낸 1급 마물의 사체를 불에 태우려 할 때.

“캬아아악!”

덜렁거리는 모가지를 매단 채 1급 마물이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크아아악!”

“으아악!”

예상 못 한 마물의 움직임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방어는커녕 혼비백산 놀라 줄행랑을 쳤다.

쩍 벌어진 주둥이에 송곳같이 뾰족한 수많은 이가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누구 하나라도 더 물어 죽일 것처럼 맹렬히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1급 마물을 누군가가 검으로 빠르게 내리쳤다.

“끼악!”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1급 마물의 목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그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물의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썰어 나갔다.

토벌단 사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죽지 않은 1급 마물을 보고 놀라 도망간 게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침착하게 1급 마물을 난도질하고도 평온한 라미엘 때문이었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불쾌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는 그의 뒤로는 며칠 동안 고생하며 잡아 죽인 마물 사체들이 널려 있었다.

“너.”

토벌대장이 기가 막힌 얼굴로 물었다.

“네 짓이냐.”

“네.”

어쩐지 2급 마물의 사체가 안 보인다 했더니 저 머리 좋은 붉은 천사가 난도질해서 다른 마물들과 슬쩍 섞어 놓은 모양이었다.

강한 마물일수록 상위 마물에겐 더 좋은 먹잇감이 된다.

1급 마물이 이런 하급 수작에 걸릴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 또 다른 이유로 강력한 1급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작전을 짜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이걸 이리 뿌려 놓으니 저 1급 놈이 안 튀어나오고 배겨?”

토벌대장이 라미엘을 성토하기도 전에 헤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대신관이 나타날 것이란 걸 저 붉은 천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하도 애원을 해서 사기 충전 차원으로 대신관인 헤덴이 토벌전 초반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토벌단에 축복을 내리며 신의 가호를 빌어 준 헤덴은 말단에 있던 어린 라미엘을 발견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런 어린애를 여기다 갖다 박았어?”

대신관이고 예하란 존칭까지 받는 귀한 사람이나 그는 신전에 박혀 연구만 하며 살아온 탓에 사회성이나 상호간 예의가 조금 부족한 사람이었다. 악의는 없지만, 속마음이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일인자였다.

“아가, 너 잘못 온 거 아니냐.”

“……아닙니다.”

“저, 헤덴 예하. 잠시…….”

혹여나 저 인간이 어린아이에게 상처가 될 말이라도 할까 봐 기사들이 황급히 헤덴을 불러내 뒤에서 작게 사정을 설명했다.

“쯧쯧.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애는 왜. 하여간 달린 것들이란.”

저기요, 님도 달리셨어요. 그리고 제발 언사 좀 순화해 주십쇼.

토벌대장이 난감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저놈을 토벌단에서 빼낼 순 없다는 거지? 쯧. 내가 며칠 봐주고 갈 터이니 넌 저놈 훈련이나 잘 봐줘라. 눈빛이 언젠가 일 칠 거 같은 녀석이니까.”

헤덴은 그렇게 예상보다 오래 전장에 머물렀고, 떠난 후에도 아가 소리에 질색하는 라미엘을 보러 종종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랬던 요주의 인물이 어느새 토벌대장 다음가는 지위에 앉아 있다. 그가 학살한 마물들의 수만 세어 본다면 토벌대장보다도 더 많았다.

죽지만 말라고 빌었던 천사는 거침없이 마물들을 죽여 버리는 것으로 유명해졌고, 항상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 붉은 천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실전에서 구르며 일취월장한 실력은 마스터 경지에 다다랐고, 신분 운운하며 날뛰는 도련님들조차 라미엘의 명이라면 고분고분 따랐다.

라미엘이 마물을 학살하는 꼴을 보면 그 누구라도 고분고분해지겠지만.

“그 2급은 꼬리만 안 보였다면 사람 같았는데…….”

“심지어 어린애 모습이었지.”

2급 마물 같은 경우는 미남 혹은 여인의 형상이나 어린아이의 모습이며,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경우가 많았다. 이상한 뿔이나 꼬리가 달렸거나 기괴한 신체 부분이 있어도 인간과 비슷한 형상 때문에 처치하는 데 주춤하게 되는데 라미엘은 거침이 없었다.

촤악!

확인 사살까지 완벽하게 끝낸 라미엘이 기사들을 보고 외쳤다.

“뭘 망설이고 있어!”

온정, 인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가차 없음이 라미엘의 방식이었다. 대강 죽인다는 건 그에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마물의 최후임에도 처참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1급 마물이 죽고 토벌전도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생각될 무렵, 그런 천사에게 변고가 생겼다.

“처리는 우리 루이반이 하지.”

루이반의 남자들이 뒤늦게 참전하겠다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누가 봐도 뻔히 끝나 가는 마당에 숟가락 하나 얹겠다고 달려온 꼴이었으나 그 대단한 ‘루이반’이었기에 반박의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 말씀하신 작전은 현 상황에 적합하지…….”

“내가 이런 것도 모르고 이 험한 곳에 온 것 같나!”

라미엘조차 막무가내인 아비와 형제들을 막을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리도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토벌전 초반의 여느 도련님들처럼 사정도 모르면서 지휘권을 잡고자 했고, 아주 오래간만에 새로운 지령단장이 임명되었다.

여기서 멈췄으면 참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라미엘의 부대를 빼앗아 갔다.

“너도 루이반이니 당연히 내 사람들이기도 한 게 아니냐.”

“……예.”

가장 억울했을 라미엘은 그들의 횡포를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별말 없이 물러났다.

라미엘의 부대를 삼킨 루이반 부자들은 당연히 최고위자인 토벌대장의 명령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작전을 짜서 움직였다. 평민 출신이라며 무시하는 것은 덤이었다.

토벌전이 한창일 때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대장은 당장 황제에게 서를 보내 루이반을 퇴출시켰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끝이 보이는 상황이라 쫓아내기도 애매했다.

루이반 일가의 진상 짓에 기사들이 학을 뗄 무렵, 별말 없이 조용하던 라미엘이 움직였다. 인근에서 악평이 자자한 용병단을 자신의 부대로 합세시킨 것이다.

가문에서 아무리 천대받는다고 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런 귀족이 직접 나서 사람을 구해 올 거라곤, 그것도 깡패 집단을 데려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라미엘 본인 소관의 부대고 부대는 오로지 상관의 의지로 이끌어 간다. 그의 용병 부대는 처음엔 조금 어수선했지만 용병단장인 크레하라는 자를 필두로 빠르게 정돈이 되었다.

일대에 퍼진 악평답게 극악한 실력을 자랑하던 용병 부대는 라미엘의 성정 그대로를 빼다 박았다. 주저 없이 베어 없애고 자비를 베푸는 일 따위도 없었다.

4급 마물 하나를 처리한 용병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으로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봤어? 별 희한한 게 다 있어.”

“마물이잖아.”

“아아.”

외형이 가장 기괴하고 징그러워 외모만 보면 최강자일 것 같은, 기사들이 기피하는 4급 마물이 나타났을 때도 처음 4급을 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들은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베어 나갔다.

‘반응이 저게 끝이야?’

‘단장이 평온해서 그런가.’

주변 기사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다시금 라미엘을 슬쩍 곁눈질할 수밖에 없었다.

라미엘은 의중을 알 수 없는, 그래서 주변에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또한 토벌에 인간미가 보이지 않는 자비 없는 성정 탓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 그와 꼭 닮은 용병 집단은 동족의 냄새를 맡았기에 라미엘을 따르게 된 것이리라. 조금은 꺼려지는 집단이었으나 토벌단과 마찰이 없는 한 문제될 일도 없어 토벌대장은 일단 라미엘의 부대를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그 부대는 토벌전 마무리를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 1, 1급!”

정찰을 나간 기사 하나가 혼이 빠진 얼굴로 부대로 달려왔다.

“뭐?”

“1급 마물입니다! 정찰 나간 기사들 모두 1급에게 그만…….”

또다시 등장할 리 없을 거라 여겼던 1급 마물이 남아 있었다. 한 세기에 벌써 두 마리라니. 황제가 학을 뗄 만한 일이었다.

토벌전의 끝이 보이고 있어 다들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였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공포감이 치솟았다.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에 그 마물이 얼마나 지독한지 뼛속 깊이 잘 알고 있었다.

“진영을 갖추고 각 부대장들은 앞으로!”

갑작스레 달라진 부대 분위기에 적응 못 하는 건 고작 5급 마물 정도를 잡아 놓고 의기양양해하던 루이반가의 남자들이었다. 다들 정신없이 자신의 진영을 정비하는 와중에 멀뚱히 있는 루이반 후작 일가에게 라미엘이 한마디 했다.

“루이반 후작님, 작전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몰살당할 수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그간의 기록서, 당연히 읽으셨겠지요. 숙지하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작전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선심 쓰듯 한마디 던져 주고 라미엘은 자신의 용병 부대로 돌아갔다.

라미엘은 알고 있었다. 루이반 후작 일족은 절대로 기록지를 숙지하지 않았다는 걸. 아마 펼쳐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말의 선의나 호의를 베풀어 간략하게나마 말로 설명해 줄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루이반 후작은 아버지였고, 제가 서너 살 때까지는 제법 아비 노릇을 하며 정을 줬었으니까.

하지만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부대원의 목숨이 달린 위험한 상황에서 무지한 자에게 친절하게 천천히 작전을 알려 줄 시간과 아량 따윈 없었다.

그리고 라미엘은 시간보다는 아량이 더 없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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