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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41화 (41/160)

41화. 다신 안 볼 사이

루이반 후작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라미엘이 자신을 아버지가 아니라 후작님이라 부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라미엘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1급 마물이 한 마리 더 튀어나오는 건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루이반 후작의 행동은 몇 년 전부터 가늠해 왔던 일이었다.

라미엘이 토벌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17세 때. 루이반의 서자가 죽지 않고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은 당연하게도 가문에 전달되었다.

“살아 있다고? 그 애가?”

3년간 소식이 없어 당연히 죽었겠거니 생각하던 루이반 후작에겐 날벼락이었다.

라미엘이 공을 세우는 소문만 듣기를 어언 2년. 드디어 토벌전의 끝이 보이고 루이반 후작은 가문의 명성을 위해 라미엘의 공을 가로채려 움직였다.

대대로 공작가였던 루이반 가문은 그가 가주가 되면서 후작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실추한 명예 회복을 위해 다시 공작위를 받고자 했다.

라미엘은 루이반 후작이 복위를 노리고 참전할 것과 자신의 부대를 가져갈 것도 예상했다. 후작이 당연히 고집스레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을 것까지도.

그래서 일찍부터 라미엘은 자신이 부릴 부대를 꾸리기 위해 인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 라미엘의 입맛에 부합한 건 극악으로 소문난 크레하의 용병단이었다. 실력 좋은 깡패들이 저들 나름의 명예를 추구하고 있다는 걸 알자마자 라미엘은 그들이 거절 못 할 미끼를 내밀었다.

토벌전이 끝나면 섭섭지 않은 보상을 하고 루이반의 기사로 쓰겠다는 말에 그들은 반신반의하며 라미엘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호시탐탐 모가지 뻣뻣한 귀족 도련님의 무릎을 굽히기 위해 기습도 서슴지 않았다.

“뭐 이런 미친!”

인근에 당할 자가 없던 크레하의 팔이 라미엘의 손에 부러지던 날, 힘의 논리로 이끌어지는 용병답게 그들은 라미엘에게 항복했다.

토벌전에는 언제나 인력이 부족해 어떻게든 참가자를 곱게 모셔 간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천사 같은 곱상한 외모의 나이 어린 부대장은 가차 없이 크레하의 팔을 아작 냈다.

‘저 새낀 진짜 미친놈이다.’

용병단도 알았다. 센 놈보다 무서운 건 미친놈이라는 것을. 그렇게 용병단은 라미엘을 따르게 되었다.

기사들은 처음에 라미엘이 데려온 용병들을 벌레 보듯 했다. 토벌전에 참가하기 전, 치안을 위해 마을에 파견된 자신들을 가장 애먹이던 용병단이 버젓이 같은 토벌단에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작전 지휘를 따르는 자신들과 달리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허를 찔러 대는 용병단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전투를 함께 수행하며 알게 모르게 전우애가 쌓여 갔고, 그들은 같은 평민이라는 신분을 계기로 어느덧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다.

토벌단은 고분고분해진 용병단을 작전에 끼워 넣어 주기도 하는 등 처음과 다르게 용병단을 받아들이게 됐다.

용병단 역시 쟁쟁하다던 리담의 정예 기사들과 황실 마기사단, 베롬의 성기사들과 함께 역사에 남을 전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취되어 기사들을 서포트하며 열성을 다해 마물을 베어 나갔다.

그렇게 명예로운 전투마로 길러지는 중에 1급 마물이 나타난 것이다.

1급으로 다들 바싹 긴장한 와중에 토벌대장의 눈에 믿지 못할 광경이 보였다. 숲으로 돌진하는 루이반 부대를 보며 당황한 그는 놀라서 평소라면 귀족에게 쓸 수도 없는 말까지 내뱉었다.

“저, 저것들 뭐 하는 거야! 멈춰!”

1급 마물이 나타났는데 숲으로 돌진하다니 자살 행위다. 심지어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기록서만 읽었어도 절대 하지 않았을, 저 밖에서 굴러먹던 용병단조차 안 하는 행동이다.

라미엘은 대다수가 글을 모르는 용병단에게 기록서를 읽어 주는 귀찮은 짓을 했고, 그 귀찮은 일은 큰 힘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기록서 내용으로 1급이 분진을 사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용병단은 이전처럼 숲에서 분진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재빠르게 숲 밖으로 움직였다. 토벌전 기사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장 돌아와! 미쳤어?”

토벌대장이 숲을 향해 소릴 질러도 반응이 없었다. 아마 상황 파악도 못 한 루이반은 평민이 반말을 했다며 욕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반이고 뭐고, 토벌대에게 중요한 건 가문의 명예 따위가 아니라 목숨이었다. 토벌대장은 간절하게 외쳤다.

“얘들아! 너희라도 얼른 나와! 명예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하다!”

라미엘이 잘 키워 낸 부대가 상사를 잘못 만나 생때같은 목숨을 날리게 생겼다.

그러나 섣불리 저들을 구하러 갈 수도 없었다. 1급 마물의 분진에는 독성이 있어 괜히 갔다가 휘말리면 목숨을 잃는 자만 더 늘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장의 회유가 먹혔는지, 아니면 루이반의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생겼는지 부대원의 절반 정도가 숨을 헐떡이며 숲 밖으로 뛰어나왔다.

“1급 마물은 숲의 동북쪽에 있습니다.”

“이전 1급보다 약한 듯 보였습니다. 분진을 막 퍼트리기 시작했는데 그 범위가 훨씬 작습니다.”

“아마 앞서가던 대원들은 못 버텼을 겁니다.”

자신들이 보고 온 정보를 알리며 부대원들은 라미엘을 흘끗거렸다.

“좋은 정보다. 허투루 도망 나온 것은 아니었군. 라미엘의 부대로 복귀하겠는가.”

“예!”

방해물이 사라진 토벌단은 빠르게 정비를 마쳤다.

“부대를 둘로 나눠 북쪽, 동쪽에서 각각 접근한다. 최대한 너른 공간에서 움직이고 나무를 베어 내 숲 밖으로 1급을 몰아내야 한다. 연락병은 빨리 대신관께 소식을 알리고.”

펑!

그 순간 숲 한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전에 등장한 녀석보다 미숙한지 지금의 1급 마물은 섣부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폭발이 일어나면 마물이 뿌려 놓은 분진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진다. 다시 폭발이 일어날 만큼 분진을 모으려면 일정 시간이 필요했기에 토벌단은 모두 지금이 1급을 칠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베고, 최대한 넓게 방어벽을 쳐라!”

돌격하란 명령과 함께 토벌단이 움직였다. 선두를 달리는 건 역시나 라미엘의 부대였고 심지어 개중엔 웃는 놈들도 있었다.

새로이 나타난 강력한 적을 보고 웃는 부대원이라니. 정말이지 지독한 집단이었다.

두 번의 경험 후, 1급 마물에 대한 정보가 추가되었다.

바로 목숨이 두 개라는 것.

이전에 처치했던 1급이 목이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었음에도 몸을 움직여 덤벼들었던 것처럼 이놈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 다르게 완전히 목을 베어 냈음에도 몸뚱이가 비틀비틀 움직였다. 모두가 다 죽였다 생각하는 와중에 벌떡 일어난 1급의 몸뚱이는 손톱을 뾰족하게 세우고 분진을 뿌려 댔다.

몸이 멀쩡하던 때와 달리 그 힘은 미미했지만 다 끝났다고 방심하고 있던 차라 다시금 충격을 주었다. 라미엘 못지않게 비정하고 가차 없는 실력을 선보이던 크레하도 당황을 했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이번에도 라미엘뿐이었다. 그는 목이 없는 1급 마물에게 팔을 잡히고서도 주저 않고 바닥에 있던 검을 잡아 들어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마물의 팔을 베어 내었다.

머리가 없어서 비명을 지를 리 없었으나 꼭 귓가 어딘가에서 1급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을 땐 라미엘이 마물의 몸통을 완전히 도륙 내고 있었다.

크레하조차 기가 질릴 정도로 냉철한 모습이었다.

***

다 타 버린 숲의 일부에서 사체 여러 구가 발견되었다. 루이반 가주와 그의 아들들,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는 부대원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몇몇은 1급 마물에게 몸 일부를 먹히기까지 했다. 처참한 숲의 몰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편히 쉬거라, 아이들아.”

헤덴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그들의 몸에 하얀 천이 덮였다.

토벌전이 끝났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장례는 대신관이 주관하기로 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목숨 바친 기사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헤덴은 무표정한 얼굴의 라미엘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게 어디 가족을 잃은 아이의 표정이란 말인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렴. 아무리 개차반 같은 가족이었어도 사람이 죽었잖느냐.”

“차라리 다른 귀족들처럼 후방에서 무서워하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면 살았을 겁니다.”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다 자신이 잘 키워 낸 부대원 절반까지 개죽음당하게 만들었다. 화가 날지언정 절대로 슬프지는 않았다.

그들의 죽음에 라미엘은 그야말로 무감했다. 굳이 감정을 느끼자면 후련함에 더 가까웠다. 루이반 후작이 아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올 줄은 몰랐는데, 그가 자랑하는 멍청한 두 아들이 따라와서 다행이었다.

“아가, 네가 저렇게 만든 건 아니더냐.”

헤덴은 처음 라미엘을 본 순간부터 언젠가 그가 일을 칠 것 같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신의 뜻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의 감이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저는 그들에게 충분히 경고했습니다.”

“부추긴 건 아니고?”

헤덴의 말에 라미엘의 얼굴에 오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리가요.”

헤덴은 혀를 찼다.

“아가하고는 다신 만나고 싶지 않다.”

“저도 그렇습니다.”

“한 마디도 안 지지. 고얀 놈.”

헤덴은 미련 없이 자리를 훌쩍 떠났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라미엘은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1급은 아마 숲속에 몸을 숨길 겁니다.”

자신은 후작을 부추기지 않았다.

딱 저 한마디만 했을 뿐.

모든 것들의 토벌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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