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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42화 (42/160)

42화. 하늘 다리

“두 분, 대체 어떤 사이인 거예요?”

레이의 질문에 헤덴이 대답했다.

“아가랑 나는 다신 안 볼 사이란다.”

이게 무슨 대답이람.

“예하, 다신 안 볼 사이치고는 호칭이 너무 정답게 들리는데요.”

“어린애니까 아가라고 하는 거지, 그게 어딜 봐서 정답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구나.”

헤덴이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의 머릿속에 한국에서 봤던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확 떠올랐다. 마침 머리 색깔도 화려하니 외형만 놓고 본다면 달큼상큼 과즙미 팡팡 터지는 비주얼 담당이 딱이었다.

“이놈은 언제 귀여워질는지. 토벌전 때랑 변한 게 없어. 떼잉.”

입만 열면 곶감 과즙상 되는 증조부 같은 말투만 뺀다면.

“토벌전? 그때 만난 거예요?”

헤덴에게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라미엘에게 물었더니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인연이네.”

레이의 말에 두 남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인연은 무슨.”

“잠시 만난 게 전붑니다.”

아주 딱딱 맞네, 딱딱 맞아.

“두 분 사이좋네요.”

헤덴은 대놓고 표정을 구기고, 라미엘은 지긋한 눈빛으로 레이를 내려다보았다.

“흠, 난 아가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야. 너 때문이란다. 불쌍한 아가.”

“……혹시 불쌍한 아가가 저예요?”

“이놈하고 결혼했다면서.”

“네.”

“쯧쯧쯧.”

몇 마디 말보다도 강력한, 혀 차는 소리였다.

1,800억 목걸이와 엘빈의 맞춤 드레스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헤덴도 천사의 속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인지 레이는 웃음이 나왔다.

“거긴 어떻게 다녀왔니? 내게 그 이야기 좀 해 다오.”

이어지는 헤덴의 말에 계속 웃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잠시 끊어졌던 이세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다녀온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냄새. 이곳에서 맡을 수 없는 냄새가 난단다.”

헤덴의 말에 레이는 왜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코를 댔는지 알았다.

“어찌 이리 선명할까 신기한데. 어떻게 여길 오게 됐지? 그쪽에서 특이점이라도 발견한 건가?”

“전 그냥, 그냥……. 저도 모르겠어요.”

“흠, 아무래도 한번 알려 줘야 더 확실하게 생각이 나겠구나.”

“예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 의지로 한 게 아니…….”

순간 헤덴이 라미엘의 품에서 레이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손을 잡고 창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레이!”

라미엘이 다급하게 잡으려 달려갔지만 레이와 헤덴은 이미 창밖으로 사라져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저 노인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헤덴이 추락해서 다치거나 죽을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이 되진 않았지만, 돌발 상황에 놀랐을 레이가 신경 쓰였다.

“아악!”

갑자기 허공으로 뚝 떨어진 레이는 저도 모르게 헤덴을 꽉 부둥켜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괜찮다. 괜찮으니 눈 뜨고 똑바로 서렴.”

헤덴의 평온한 목소리에 눈을 뜨니 자신이 있던 방 창문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라미엘이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니 나무 꼭대기가 눈높이에 와 있었다.

“어어, 어떻, 어떻게 된 거예요오.”

내가 허공에 떠 있다니.

너무 놀라서 추운 것도 잊었다.

“좀 떨어지려무나.”

헤덴이 조금 귀찮다는 얼굴로 레이를 슬쩍 밀어냈다.

“안 돼! 아이 씨, 떨어져욧! 저 마법 못한단 말이에요!”

“허이고, 아이 씨? 어른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

“어으으으, 나 떨어져요오.”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서 봐! 너 지금 어디 있는 것 같냐.”

어디긴 어디야, 허공에 떠 있…….

“이게 뭐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게 분명한데 발이 닿은 부분이 땅을 디딘 것처럼 단단했다. 레이는 헤덴에게서 몸을 떼어 내면서 발로 허공을 다시 툭툭 밟아 보았다.

“단단한데?”

왜지? 왜 허공이 단단하지?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레이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유리 계단이라도 만들어 놨나.

“흐윽.”

3층 높이의 아찔한 허공이 맞았다.

레이는 헤덴의 옷자락을 붙들고 슬며시 쪼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만져 보았다.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다가 발 가까이 오니 단단함이 느껴졌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허공이 분명한데 무언가가 손에 걸리는 느낌이라니.

“예하, 이거, 이거 뭐예요?”

“재밌지?”

헤덴이 훌쩍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하얀 로브 자락이 레이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그녀는 혼자 덩그러니 허공에 남았다.

“이건 마법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그는 폴짝폴짝 징검다리 건너듯 허공을 걸었다. 마법이 아닌데 허공을 걷다니,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헤덴은 레이에게 보여 주듯 몇 번 더 근처를 걷더니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마법이지. 편히 앉을 수 있을 게다.”

헤덴의 말에 레이가 주변부로 손을 뻗어 면적을 확인했다. 바닥처럼 느껴지는 단단함이 한층 더 확장되어 있었다. 발 부분에만 한정되던 것이 이젠 레이가 편히 털썩 앉아도 될 만큼 넓어졌다.

“하늘 다리라고 해. 내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지.”

“예하께서요?”

“그래.”

“하늘 다리를 만들고 계신 거예요?”

“아니. 이건 절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란다. 하늘 다리는 그냥 존재하는 거야.”

“그럼 이걸 밟고 올라가면 신을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레이의 질문에 헤덴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분은 여기 안 계신단다. 그리고 하늘 다리는, 음, 시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해. 신학이 아니라.”

신관은 신학 연구만 하면서 기도하고 신이랑 소통하는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시공간을 연구하다니 의외였다.

헤덴이 고개를 숙여 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늘 다리는 이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야.”

“예에에?”

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덴이 검지에 입을 댔다.

“쉿. 이건 비밀. 아직 정확히 확인된 게 아니라서.”

순간 레이는 추락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국에 가기 전, 창에서 떨어지면서 분명 한 번 어딘가에 팔이 툭 걸쳤다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그게 벽에 닿았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하의 말대로라면!’

뭔가를 깨달은 듯한 레이의 표정을 본 헤덴은 몹시 뿌듯한 얼굴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베롬에서 해야겠구나.”

헤덴은 본인이 담당하는 명단을 떠올리며 날짜를 헤아렸다. 혹시라도 모를 남은 명단 중 이계를 경험한 인물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레이알렉시스의 도움을 받기 위한 연구도 해 놓아야 한다.

“연락할 테니 꼭 오거라. 기다리고 있으마.”

헤덴이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훌쩍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발을 디딘 부분에서 금빛으로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헤덴의 모습이 사라졌다.

‘오실 때도 이렇게 오셔서 허공에서 나타나신 거구나.’

헤덴이 사라지자 한순간에 고요해진 기분이었다. 그 조용한 틈으로 헤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야.”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주를 만날 수 있다.’

왜 신전에 찾아가 볼 생각은 못 했을까. 벼락을 맞고도 살아난 심정 같았다. 얼떨떨했다.

“레이.”

라미엘의 목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위험하니까 이제 이리 와요.”

그의 말에 레이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3층 높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 그대로다. 옆에 의지할 헤덴마저 없으니 높이감이 확 다가왔다.

“으아, 높아!”

헤덴 예하, 저 내려 주고 가셨어야죠!

“라엘,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못 움직이겠어요!”

“대신관이 직접 만든 거니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겁먹지 말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요.”

“어휴우, 진쯔아. 다음에 만나면 성질 낼 거야. 곱게 협조하나 봐라.”

레이는 엉금엉금 네 발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눈에 들어오는 높이가 확 실감 나서 절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최대한 라미엘의 얼굴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굼질굼질 거북이처럼 열심히 기어간 레이는 가까스로 창문 근처에 도착했다.

“흐으, 다 왔…….”

라미엘이 팔을 뻗어 하늘에 있는 그녀를 품으로 받아 냈다.

“……다.”

라미엘이 받아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당연히 혼자 힘으로 창틀로 뛰어내리고 바닥을 구르는 상상까지 했는데.

레이의 가슴이 뜻밖의 호의에 간질거렸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잘 받아 줬어요? 고마워요, 라엘.”

“설마 내가 레이를 집어 던질 줄 알았던 건 아니죠?”

“아뇨,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했고, 그냥 혼자 뛰어와서 구를 생각은 했고.”

“레이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레이에겐 그렇게 쓰레기 같은 사람인가요?”

“그게 아니라, 라엘은 날 싫어하잖아요.”

그 말에 라미엘은 그간 레이알렉시스와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맨 처음 만남부터 계약 과정, 결혼식을 치른 지금에 오기까지의 모든 것들을.

그저 서로의 필요에 의한 관계,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 같은 사이.

‘이전에도 한번 그랬었지. 자길 싫어한다고.’

라미엘은 레이의 존재를 무색무취의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이성으로 생각하는 범주에서나 그랬다. 그는 싫어하는 사람과 종이로라도 엮이지 않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마음을 굳이 정의해야 한다면 아마도 호감에 가까울 그런 감정. 그는 타인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호의를 베푼 적도,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챙기는 존재도 없었기에 레이에게 갖는 얕은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거워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직까지 라미엘에게 ‘감정’은 생소하고 쉽지 않은 분야였다.

“싫어한 적, 없습니다.”

불편하거나 불쾌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으니 레이가 싫지 않은 건 맞았다.

“……정말?”

뜻밖의 답변에 레이는 조금 놀랐다. 라미엘이 이리 직접적으로 대답을 줄 거라곤 예상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 좋아해요? 어머, 난 몰라. 라엘, 30로베 준비…….”

“논리가 어떻게 그렇게 튑니까.”

“계약은 성실히 이행해야죠. 라엘이 30로베를 주면 나도 마음을 활짝 열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레이알렉시스를 만난 이후 이런 식으로 제법 자주 웃었던 것 같다.

‘이 여자랑 헤어지고 난 후엔 어떻게 될까.’

막연한 가정이고 상상이지만 헤어질 때도 아마 서로 웃지 않을까.

잠시 떠오른 상념을 갈무리하며 라미엘이 입을 뗐다.

“대신관이 뭐라던가요?”

대체 헤덴이 무슨 소리를 했길래 레이가 갑자기 얼이 나간 표정을 지은 것인지 아까부터 궁금했었다.

“비밀이에요.”

헤덴이 만지작거리던 레이의 머리카락이 라미엘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이기에 남편한테 말도 못 하고?”

라미엘이 손을 뻗어 레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부드럽게 찰랑이는 머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남편이 아니라 애인이라도 말 못 해요.”

“대신관이라 하면, 이세계?”

뭐야, 이 남자. 뭘 이렇게 한 번에 맞힌담?

레이의 지진 난 눈동자를 보며 라미엘이 말을 이었다.

“헤덴의 연구는 유명해요.”

어디까지 연구를 했는지, 어떤 내용인지는 일반에 함구되는 기밀이었지만 주제 자체는 공공연히 알고 있었다.

아까 헤덴이 레이와 대화를 할 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제게도 들리지 않았다. 헤덴이 마법을 건 것이다. 이 말은 이세계에 관해 함구가 필요한 대화를 했다는 의미였다.

전혀 그쪽과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레이를 왜 헤덴이 콕 집어냈는지, 그게 궁금했다.

“음. 맞아요. 그렇긴 한데 그 이상은 예하를 뵙고 나서 이야기해 줄게요.”

자신의 계약 반려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헤덴이 접근을 한 것일까.

레이알렉시스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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