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계륵
“이거야, 원.”
오스카의 스트레스 원인 중 하나인 빈 마력석 부지에 수습을 해야 할 만큼의 큰 벼락이 떨어졌다. 피뢰침이 또 망가졌다는 소리였다.
쓸모없는 마력석만 가득한, 엄청나게 커다란 광산은 앞에 너른 땅을 품고 있었다.
평지에 산이 둘러싸여 있어 군락이 생겨나기 좋은 위치지만 그곳은 그저 허허벌판이었다. 툭하면 벼락이 떨어져서 마을을 형성하거나 시설을 두기에 위험했기 때문이다.
광산은 버리더라도 땅이라도 활용하기 위해 근처에 높은 첨탑을 만들어 두고 피뢰침을 설치했지만 낙뢰하는 땅에 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홍보를 하고 마력석이 주렁주렁 달린 피뢰침을 둔다고 해도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벼락이 피뢰침을 툭툭 터트리는 꼴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피로연 마치자마자 말썽이 터지네.”
레이의 결혼 피로연이 바로 어제였다. 연회의 만족감을 되새기기도 전에 이리 큰 똥이 떨어지다니.
“설마 또 그랬어요?”
르아넬로가에서 벼락은 주어 목적어 없이도 추측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래. 또다. 후우. 한 2년 잠잠하더니 오른쪽 하나가 터지…….”
오스카가 대답을 하다가 말을 멈췄다. 느지막하게 일어난 큰딸이 몸치장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차림으로 하품을 하며 다가오는 걸 보고 기겁한 것이다.
“공작 부인 몰골이 그게 뭐냐.”
“왜요. 옷 제대로 입었고 깨끗이 씻었는데.”
“아니, 그 머리 좀 예쁘게 묶고. 여느 귀족 부인들처럼 우아하게 치장 좀 하면 안 되겠니? 너 어제 피로연 끝낸 신부야!”
어제의 파티를 끝으로 레비는 자유를 찾았는걸요. 더 이상 빡세게 품위를 유지할 필요는 없어요.
라미엘이 깽값은 물어 준다 말했다. 그 말인즉, 앞으로 레이알렉시스 네 마음대로 해라, 이 말이 아닌가. 그러니 루이반의 품위가 손상되지 않을 정도의 체면치레만 하면 될 일이었다.
여긴 르아넬로고 레이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평생을 자라 온 곳이다. 집 안에 외부 손님들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딱 가족뿐인 상태니 굳이 여기서 더 치장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쵸. 어제 다 끝났지. 이제 라미엘은 잡은 물고기야. 원래 잡은 물고기한텐 먹이 안 주는 거래요.”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해!”
오스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급하게 집무실 주변을 살피고는 레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딸아, 내가 너 때문에 심장이 다 아파.”
오스카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레이의 말에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여긴 왜 내려왔어? 공작님은 어디 계시고?”
“라엘은 지금 루이반 행정관하고 이야기 나누는 중이고 전 아버지 보러 내려왔죠.”
라미엘은 마린의 거미줄을 루이반으로 가져가기 위한 경호 동선 보고를 받고 있었고, 레이는 마지막으로 르아넬로가를 만끽하기 위해 집을 천천히 산책하는 중이었다.
피아나가 일어났다면 같이 돌아다녔을 텐데 어려서 그런지 잠이 많아서 아직도 취침 중이다.
집무실도 마지막이었다. 르아넬로가 망할까 봐 오스카를 도운 것도 벌써 추억이 되어 버리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찬찬히 저택 내부를 돌다 보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어쩌면 꽤나 오랫동안 여긴 못 올지도 모르고.’
“근데 왜 공작님이 너한테 존대를 하시는 거냐.”
사람들은 모두 천사가 예의를 갖추느라 예비 신부에게 존대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나고도, 피로연이 끝나도록 두 사람은 서로에게 높임말을 썼다. 그 사실 또한 라비던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라미엘의 존대에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다. 정식 공작위를 받은 그는 더 이상 상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만 상놈이야.’
라미엘이 반말로 5로베를 지불해서 그렇게 됐다고 하면 아버지는 또 뒷목을 잡겠지. 레이는 가장 말이 안 되면서도 합당해 보이는, 사랑에 빠진 루이반 부부의 대답을 했다.
“날 너무 사랑하셔서 그래요.”
“……그, 그러냐.”
오스카는 몹시 떨떠름한 얼굴을 했지만,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높은 지위에 있는 라미엘이 자신과 에이나에게도 말을 높이던 걸 떠올리며 수긍했다. 자식이 존대 받으니 부모까지 덩달아 존대를 받는다.
“그런데 아버지,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피뢰침 고쳐야 하잖아요.”
“하아. 그렇지. 그게 또 돈이 얼마나 들지 모르겠다.”
르아넬로의 피뢰침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피뢰침을 설치한 첨탑 아래로 번개를 없애 버리는 마력석을 설치한 상태였다.
처음에 벼락을 그대로 두었더니 땅이 다 타 버리고 쑥대밭이 되었다. 땅을 활용하기 위해 피뢰침을 설치했는데 벼락이 어찌나 세게 치는지 피뢰침과 첨탑을 몇 번이나 망가뜨렸다.
너른 땅을 버려두기에 너무 아까워 오스카는 황실 마법부까지 찾아가 에너지를 상쇄해 버리는 마법 기구를 만들어 내 피뢰침 아래에 연결시켜 땅속에 묻었다.
그제야 벼락이 내리쳐도 땅에 아무런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땅의 이미지는 회복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황실 마법부에 비싼 돈을 주고 거금을 들여 만든 시설인데 돈만 날리고, 이미지가 좋아지기는커녕 큰 벼락에 피뢰침이 날아갔다. 이 정도면 정말 그른 땅이다.
“그냥 내버려 둘까.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땅인데 괜히 미련이 남아서 헛돈만 쓰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렇긴 하죠?”
잠시 고민하던 오스카는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놈의 골칫덩이. 말 나온 김에 아주 헐값에라도 팔아야겠구나.”
“살 사람이 있긴 할까요?”
“흐음, 광산까지 싹 포함해서 1라블이면 살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오스카의 말에 레이는 기겁했다.
그 땅이랑 광산 크기가 얼만데!
“아무리 빈 마력석에 벼락 꽂히는 땅이라도, 그게 얼마나 넓고 큰데 고작 1라블을 불러요!”
“크기가 문제가 아니잖니. 광산은 실속 없고, 맨 땅엔 툭하면 벼락이 수십 개씩 꽂혀서 쓸 수가 없는데.”
“그래도 그건 너무한데. 일단 좀 높게 부르고 그다음에 안 팔리면 값을 깎는 게 어떨까요.”
똑똑.
그때 두 사람의 말을 가르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식사 후, 하버트와 함께 논의하는 걸로 끝이 났다.
***
레이가 물에 젖은 바위를 밟고 휘청거리자 라미엘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앗, 깜짝이야. 고마워요, 라엘.”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요.”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 레이는 슬쩍 라미엘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었다. 르아넬로 사람들에게 손도 안 잡고 팔짱도 안 끼고 따로 떨어져 걷고 있는 티를 낼 뻔했다.
지난밤에 비라도 왔는지 광산 입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곳은 르아넬로의 무쓸모 광산.
혹시라도, 정말 아주 약간이라도 마력석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최종 확인을 하러 온 참이었다.
처음 채굴을 시작하고 꺼멓게 죽어 있는 광산을 보며 그래도 혹시, 혹시 하며 파내길 1년. 르아넬로 광산은 끝끝내 붉은 빛을 내지 못했다.
마력석은 석영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흰색의 투명한 광물인데 속에 붉은 빛이 나는 게 특징이었다. 붉은색이 바로 마력석이 지닌 마력이자 에너지였고, 마력이 많이 담길수록 진하고 선명한 붉은 빛을 뿜어냈다.
이런 마력석을 가공하면 가공된 성질에 따라 빛깔이 바뀌었다. 물이나 차가운 속성이면 푸른색으로, 열이나 불 같은 속성이면 붉은빛에 주황색이 더해져 촛불 같았다.
저 두 종류가 가공 마력석의 대부분인데 르아넬로 가문의 피뢰침에 달린 마력석은 보라색이었다.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색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금액이 상상 초월일 것이란 것도.
마력석의 에너지가 다하면 빛은 점점 흐릿해지고 마지막엔 아무 빛도 없이 텅 비게 된다. 빈 마력석은 더 이상 연료로 쓸 수 없다. 마력석 자체가 뿌옇고 이물질도 많아, 보석으로 가공할 가치도 없었다. 빈 마력석은 그야말로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르아넬로의 빈 마력석 광산의 처치를 두고 가문의 수장과 전문 경영인, 사업을 도왔던 딸이 출동했다.
마지막으로 뭐라도 건져 보자는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한 광산 나들이에 아내 사랑 지극한 라미엘의 동참은 필수였다.
“엄청난데.”
광산 입구만 보고 예상했던 크기보다 훨씬 컸다. 채굴 중단한 게 이 정도 크기라니. 이런 크기의 광산에 산을 품은 너른 평지까지. 라미엘은 레이가 1라블에 팔자는 말에 길길이 날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희미한 붉은 빛도 없이, 천장에 걸린 조명에도 반사되는 빛조차 없는 유독 불투명한 빈 마력석들을 보면 오스카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굳이 끝까지 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레일 위의 광산 수레를 보며 하버트가 냉정히 평가를 내렸다. 저걸 탈 필요도 없이 걸어 들어오면서 봤던 광경만으로도 충분하단 이야기였다.
하버트는 숱하게 많이 봐 온 굵직한 대형 광산들을 떠올렸다. 그런 것들과 견주어 크기는 손색이 없지만 이렇게까지 실속 없는 건 또 처음이었다.
아무리 빈 마력석만 있다고 해도 근근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게 마련인데, 이곳처럼 텅 빈 건 정말 처음 봤다.
너른 땅에 그렇지 못한 내용물들. 여길 어떻게 굴려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일단 저택 도착해서 이야기하십시다.”
오스카는 라미엘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집안의 골칫거리를 보여 민망한 기분이었다. 라미엘은 개의치 않는 모습이지만 괜히 이쪽에서는 신경 쓰이고 민망한 그런 감정.
딸을 좋아해서 여기까지 따라나섰다지만, 오스카에게 이 사위는 어지간히 불편한 상대였다.
“에효, 역시 쓸모없는 건 그대로구나.”
레이가 발에 차이는 주먹만 한 크기의 빈 마력석을 주워 들었다. 오묘한 모양새로, 다이아몬드로 조각하려다가 만 듯한 육각형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그냥 이렇게 대강 보면 그럭저럭 보석 같고 괜찮은 것 같은데. 저렴한 보석으로 가공할 순 없을까요? 좀 지저분하더라도 그걸 특이점으로 내세우면 안 되려나.”
레이의 말에 하버트가 대답했다.
“아마 책정되는 제품 가격보다 보석 가공비가 더 많이 들 겁니다.”
“제품 단가를 올리면 되는 거 아닌가?”
“음, 리담에서 빈 마력석을 돈 주고 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레이 자신 같아도 빈 마력석을 가공해 만든 장신구는 10파브라도 선뜻 살 것 같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보석도 실용성, 필요성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단지 티끌이 없이 선명한 색을 지녔다고 해서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 구입하는 것일 뿐. 사회적 이미지라는 것은 그만큼 큰 힘을 발휘했다.
“차라리 관광지로 개발을 할까. 툭하면 벼락이 쾅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보고 싶으면 오세요. 르아넬로의 광산으로!”
“푸흡!”
레이의 우스갯소리에 하버트는 웃음을 터트렸고 오스카는 아침에 잡은 물고기 이야기할 때 봤던 표정을 지었다.
라미엘만이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하단 얼굴로 ‘레이, 발밑 조심해요.’라며 그녀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이가 라미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남편이 있었네. 라엘, 이거 살래요? 싸게 팔게.”
“대체 날 뭘로…….”
“흐흠! 흠! 흠!”
오스카의 헛기침에 레이가 화들짝 놀라 라미엘에게서 떨어졌다.
귓속말이 되게 달라붙어야 할 수 있는 거였구나.
“가서 이야기하시지요?”
그 소심한 오스카가 딸네 공작 부부에게 이 정도 표현을 했다는 건 단전에서부터 용기를 끌어 올렸단 말이다.
“넵.”
레이가 들고 있던 빈 마력석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