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사냥의 계절
“장사는 어렵구나.”
“이제 알았습니까.”
레이가 한숨을 쉬듯 내뱉은 말에 맞은편에 앉은 라미엘이 무심히 대꾸했다.
루이반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르아넬로에서 챙겨 준 레이의 짐과 선물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작님, 좀 도와주시죠.”
레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르아넬로의 골칫거리 광산은 그럭저럭 해결이 되었다.
“오늘 오전 내내 고민하다가 이렇게 됐는데 나라고 별수 있을까요.”
“아니, 라엘 지금 당장이 아니고요. 천천히 시간을 좀 두면서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려 주거나 사업 수단이 엄청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주거나…….”
빈 마력석은 아무리 가공법을 떠올려도 돈이 안 되고, 피뢰침을 다시 제작하려니 너무 비싸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평지에 툭하면 벼락이 내려치니 웬만한 저가 아니고서는 팔리지도 않을 테고.
혹시라도 모르니 광산을 좀 더 파 보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1년이나 채굴하고도 저 모양이면 이곳에 마력석의 맥은 끊긴 것으로 봐야 한다, 괜히 큰돈 써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는 광산 전문가의 의견이 쐐기를 박았다.
결국 조금이라도 받고 팔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을 때, 레이는 그게 조금 찝찝했다.
“낮에 물 들어오고 밤에 물 빠져서 밤에만 내 땅인 게 아닌 이상 부동산은 쥐고 있어야 한다구욧!”
아마 저때,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이 튀어나왔을 것으로 레이는 추정하고 있다.
한국에서 살았던 그 세월 동안, 자고 일어나면 불쑥불쑥 올라 있는 부동산 가격을 보며 그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생각해 보니 리담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값은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진 않는다. 귀족이 너무 무능해서 본인 저택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상황을 빼면, 한국이나 리담이나 부동산은 불패신화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에서 직접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땐 그걸 더더욱 크게 실감했다. 또한 입 하나 늘어난 게 유주의 살림에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지도.
잠옷 주머니에 보석 브로치가 하나 들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신세 지는 내내 정말 고맙고 미안했던 친구에게 그걸로나마 보은할 수 있어서 어찌나 좋던지.
기적적으로 만약 다시 한번 한국에 간다면 그땐 온몸에 보석을 두르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금은보화, 보석의 가치가 이곳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다행인 일이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쓸모없는 광석만 가득한 광산이야 내버려 둔다고 쳐도 광산 주변의 너른 평지는 탐이 났다. 비록 벼락이 내려치지만 그 부분만 잘 해결하면 큰 마을 하나를 생성하거나 뭔가 시설을 세워도 될 곳이다.
하여 레이는 충동적으로 거수했다.
“저 주세요!”
당연히 공짜로 줄 거라 생각했건만 하버트는 르아넬로 소속의 경영인으로서 냉큼 넘기지 않았다.
“1라블은 공작 부인께서 너무 싸다고 직접 말씀하셨죠?”
“에? 오호호. 일단 5라블 부르고 1라블까지 차츰 낮추려고 했는걸?”
“광산에 평지까지 그 너른 땅을 가져가시는 건데요.”
“광산도 가져가야 해?”
“당연합니다. 나중에 광산이 팔린다면 광산 주인은 어떻게 광산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앞이 전부 공작 부인 땅인데.”
결국 논쟁 끝에 레이는 3라블에 광산과 평지를 인수했다.
이게 아닌데 싶었을 땐 이미 늦었고 돈이 없다고 우기기에 루이반은 너무 부자였다. 광산을 사지 않기 위해 계약 결혼임을 밝힐 순 없으니 결국 레이는 인수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매매금 3라블은 레이의 수중에 돈이 생기는 1년 뒤 지급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루이반의 대출을 받아 얼결에 사게 된 셈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사냥제 때 내 광산 땅의 평온과 안정을 빌어 주세요.”
대신전에서는 겨울에 연례행사로 사냥제를 연다.
베롬의 북서쪽에 있는 거대한 워크산은 초보 신관들이 대신전에 들어오기 전 수련을 하는 곳이다. 산 초입부에 있는 수련소에서 심신의 안정을 찾고 외부의 때를 닦아 낸 뒤 대신관에 들어온다는 명목이었다.
이 워크산은 워낙 장대해서 온갖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겨울이 되면 먹을 것이 부족해지는 탓에 짐승들이 신관들의 수련소까지 와서 사람을 공격하거나 건물을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대신관 측에서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고, 황실은 매년 일정 기사들 혹은 귀족 가문의 자원봉사 신청을 받아 사람을 보내 짐승들을 쫓아내고 사냥하게 했다. 그것이 사냥제의 시초였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귀족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출전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사냥제에서 큰 공을 세운 1등 두 명은 내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 영광을 얻는다.
“그런데 사냥제 1등은 당연히 루이반일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재미는 없겠어요.”
“내가 1등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에나. 라미엘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다.
“너무 당연한 걸 물으시니 어이가 없네요.”
토벌전에서 마물들을 쓸어 담던 게 라미엘과 수박바 일당들 아니던가. 그 공으로 훈장에 공작위까지 받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기가 좀 막힌다.
마물 잡던 사람이 그냥 짐승을 사냥하는 건데, 생각할 것도 없이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참가 안 합니다.”
“1등이 너무 확고하니 2등 싸움이 치열하겠, 네?”
“레이 말 그대로 너무 확고하니 참가 안 하려고 합니다.”
모든 이들이 1등은 루이반이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참여할 필요는 없다.
작년 초겨울까지 내내 마물들과 싸우다 온 루이반 공작과 휘하의 기사단이다. 그러니 이래저래 참석 여부를 두고 공정이니 어쩌니 시끄러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올해는 불참하고 내년부터 참석하려 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냥제 궁금했는데 다음에…….”
다음을 기약하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다음이 없다. 내년 겨울이면 계약 종료 시점이다. 자신은 더 이상 귀족이 아니며, 라비던에도 없을 것이다.
조금 아쉽게 됐지만 레이는 어쩔 수 없이 사냥제는 영영 미지의 상태로 남겠다고 생각했다.
“푸엥이랑 공놀이나 해야지.”
울 애기 이틀이나 못 봤는데 잘 있으려나. 수박바가 케어 잘했겠지?
레이가 저택을 떠나 있을 때는 검은 개에 편견이 없는 사람 중 가장 지위가 높은 크레하가 펫 시터였다.
하지만 그는 때 되면 밥만 주고 배변 산책이나 해 주는 게 전부지, 놀아 준다거나 푸엥의 마음에 찰 만큼 긴 산책을 시켜 주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라미엘이 검은 개를 피하는 하인들을 싹 다 갈아엎어 줬으니 이제 푸엥은 자유였다.
눈치 볼 필요 없이 얼마든지 저택을 돌아다니고 정원에 배변 때가 아니더라도 산책을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푸엥을 위해 무언가를 선물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산책 줄을 하나 마련해 볼까. 밤에 어두워서 애가 안 보이니까 옷도 좀 만들어 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루이반에 도착했다.
“우리 집, 다 왔다.”
고작 두 달 정도 있었는데 이곳이 더 익숙해지다니 신기했다.
“짐은 전부 내 방, 왜요?”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자마자 라미엘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지금 딱 눈이 마주친 걸까.
“사냥제, 가고 싶습니까.”
라미엘의 질문에 레이는 조금 놀랐다.
“……네?”
혹시 아까 혼잣말한 걸 여태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까?
“어떤 건지 궁금하긴 한데, 라엘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몇 년 동안 내내 마물들 사냥하느라 진이 빠졌을 사람이다. 올해는 참석 않고 쉰다는데 자신이 궁금하다고 참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더 친밀한 사이였다면 사냥은 하지 말고 그냥 구경만 하면 안 되냐고 슬쩍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요청할 만큼 라미엘과 자신은 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종이 한 장에 쓰인, 강력하면서도 약하디약한 사이, 딱 이 정도일까.
“원하는 게 있다면 내게 요구해요.”
“네?”
“레이는 내게 뭐든 요구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바라는 게 있다면 바로 요청해요.”
놀랐다. 레이는 정말 많이 놀랐다. 마치 진심인 것 같은, 진짜 사랑하는 아내에게 하는 말 같아서.
라미엘의 눈을 레이는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처음에 냉하던 눈빛보다 많이 부드러워지고 느슨해진 눈매가 자신을 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됐지?’
싫어한 적 없다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게 와닿았다.
왜냐고 물을 수는 없다. ‘아내이기 때문에’ 혹은 ‘계약이니까’ 하는 대답이 나올 것이 뻔하니까.
뻔한 대답을 피해, 레이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즐기기로 했다.
“사냥제, 가 보고 싶어요.”
***
테일러가 변경된 스케줄을 눈으로 확인하며 서류를 바지런히 읽어 내렸다. 일정하게 톡톡 서류를 두드리던 검지가 점점 느려지고 그가 작게 혼잣말을 했다.
“참가, 하신다고.”
커다란 창이 있어 채광이 좋은 테일러의 집무실. 칼같이 퇴근하는 그에겐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방이었다.
창만큼 커다란 책상 위엔 언제나 그날 처리해야 하는 일거리들이 쌓여 있었고 책장에는 서류 뭉치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일거리가 딱 한 무더기 남아 있던 테일러의 책상 위로 새로운 서류 하나가 도착했다.
사냥제 참가에 관한 것이.
‘분명 올해는 참석 않겠다고 하셨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라미엘은 한 번 내린 결정은 번복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떠한 효율과 이익이 있는지 손익을 빠르게 따져 보고 여간한 일이 아닌 이상 초심을 따랐다.
사냥제 1등이라고 해 봤자 상금을 받고 기도를 올리는 것인데. 리담의 대표로 기도 올리는 일을 영광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인 데다가 상금이 탐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남은 건 가문을 높이는 영광인데, 올해 초까지 토벌전 마무리를 해야 했으니 루이반이 최후까지 완벽하게 공을 세웠다는 명예는 충분했다. 그러니 올해는 굳이 움직일 것도 없이 그냥 쉬면 될 일이었다.
참가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기에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라미엘답게 재고 없이 불참하기로 결정됐던 일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갑자기 결심을 바꾸는 데 무슨 일이 있었을지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다.
“푸엥, 손. 세상에, 손 했어! 가르친 적도 없는데! 내 새끼 천재야!”
테일러의 상념을 가르는 발랄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물갈이 이후 레이는 저택 내를 푸엥과 함께 돌아다니곤 했다. 이전에는 침실에 연결된 작은 방에 두고 정원에 나갈 때에나 모습을 보였는데, 제한이 사라지니 저택 전체가 푸엥의 공간이 되었다.
‘저 검은 개가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라미엘 님……. 잠깐 저 개가 들어오고 나서가 아니라.’
루이반 저택의 유일한 변수.
“설마…….”
레이알렉시스가 루이반을 움직인다?
테일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레이알렉시스를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라미엘의 특이 행동을 되짚기 시작했다.
“하.”
한참의 시간 후.
테일러의 손에 있던 펜이 바닥으로 툭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