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사냥 훈련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은 것이다.
이전에 잠깐이나마 크레하에게 훈련받았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초보자의 흔한 착각이었다.
라미엘의 훈련은 크레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레이.”
라미엘의 목소리에 레이가 구부러지던 허리를 다시 곧추세웠다. 뻐근한 감각이 허리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있는 힘껏 석궁을 다시 집어 들자 왜인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라엘.”
“네.”
내가 훈련 끝나면 1순위로 쏠 사람 이름 좀 불러 봤어요.
“……아니에요.”
레이가 무슨 말을 할지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도 이글이글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강아지가 공격하겠다고 매섭게 쳐다봐 봤자 강아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래도 강아지가 죽이겠다는 눈빛 뒤로 죽겠다는 눈빛을 더 강하게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라미엘은 마음이 약해졌다.
“여기!”
그만하자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이는 석궁을 빠르게 라미엘의 손으로 넘겼다. 조금이라도 쭈뼛거리는 기세를 보였다간 맹훈련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아는 다급한 몸짓이었다.
“푸엥 산책시킬 거예요. 나 찾지 마!”
부리나케 연무장을 벗어나는 흙투성이 훈련복 차림의 마님을 보며 루이반 기사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마님의 고통에 공감했다.
“마님께서 여긴 왜…….”
크레하는 지난번 훈련 때처럼 바지 차림에 머리를 하나로 묶고 라미엘과 함께 연무장에 나타난 레이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훈련은 예전에 다 끝나신 것 같은데요.”
“오늘부터 사냥하는 걸 배우려고!”
“사냥제 준비하십니까?”
“응. 라엘이 알려 준다고 해서.”
“아이고. 헙.”
레이의 말에 기사들 중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빨리 도망쳐야 했다.
“지독한 놈.”
여우가 아니라 고사리를 캐다 준다고 할걸.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려면 체력이 받쳐 줘야 하기 때문에 처음엔 근력 운동부터 시작했다. 라미엘 선생님은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빡빡한 일정과 고강도 훈련에 질려서 포기 선언을 하려 할 즈음이면 학생이 관심을 가질 만한 새로운 훈련을 선보여 흥미를 유발시켰다. 타고난 일타 강사였다.
오늘도 포기하겠다며 배추 셀 때나 쓴다는 말을 하려는데 무기가 등장을 했다.
“이제 힘이 제법 붙은 것 같은데, 실전 연습하죠.”
석궁은 레이가 사용하기에 가장 알맞은 무기였다. 활과 검을 쓰기엔 훈련 기간이 턱없이 짧고,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라미엘은 처음부터 석궁을 염두에 두고 레이를 가르쳤다.
라미엘이 레이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이 무기는 기존 석궁과 달리 마력석을 이용해 일반 화살 대신, 총탄같이 작고 날카로운 촉을 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또한 이런 촉만 넣어 주면 발로 대를 걸고 힘을 들여 활을 장전하거나 큰 힘을 들여 도르래를 당길 필요가 없었다.
촉이 들어간 부분의 작은 도르래를 돌리기만 하면 발사 준비가 되는,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게 고안한 반자동 방식이었다.
이는 르아넬로의 보라색 마력석같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품이었다.
“이게 뭐예요?”
“레이가 쓸 무기예요. 세상에 하나뿐인 석궁입니다.”
저 말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정말 지독하게 잘 가르치고 지독하게 굴리는 사람이야.”
레이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푸엥의 리드 줄을 쥐었다.
훈련이 끝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저택에 돌아갈 기운이 날 때까지 연무장 구석 나무 근처에서 기대 쉬곤 했다. 그때 근처에 같이 널브러져 있던 기사들과 라미엘의 뒷담화를 하다가 친분이 쌓였다.
“나 사냥제 가기 전에 과로로 죽지 않을까.”
“그래도 마님이시라고 주인님께서 어찌나 살살 훈련하시는지.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게 어떻게 살살이야? 딱 사람 목숨이 간당간당할 직전까지 몰아붙이는데.”
“아, 맞습니다. 공작께서 대단하신 게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을 때 딱 멈추시죠.”
이런 식으로 쿵짝이 맞아서 떠들다 보면 저택까지 돌아갈 힘이 났다.
“내 새끼. 어쩜 이렇게 귀엽지?”
파란 원피스를 입은 푸엥의 동그란 머리통이 오늘따라 유독 귀여웠다.
오늘의 산책 코스는 후원의 루이반 동산이었다. 매일 같은 곳만 다니면 푸엥이 질리지 않을까 싶어서 동선을 종종 바꾸곤 했다.
새로운 곳이 재밌는지 푸엥은 두 걸음에 한 번씩 멈춰서 냄새를 맡고 꼬리를 방방 흔들었다.
“오늘 괜히 여기로 왔나. 푸엥 공원에 풀어 둘걸.”
멀리까지 왔지만 돌아갈 체력은 없어 마차를 불러 둔 상태였다.
레이가 요청했던 울타리 공사는 ‘푸엥 공원’이라는 상상 이상의 크기로 끝이 났다.
가제보 근처에 침실 하나 정도 크기로 만들어지겠거니 했는데, 저택 입구 대문처럼 루이반 문장이 형상화된 흰 철문이 달려 있는 것부터가 보통이 아니었다.
분수까지 포함한 공원 크기의 너른 공간엔 푸엥이 노는 동안 레이가 쉴 수 있는 곳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바닥에 나무 데크를 깔고 위로 튼튼한 지붕을 올린 곳엔 푹신한 소파도 있었다. 소파 옆 작은 수납장에는 푸엥이 가지고 놀던 공 같은 장난감도 들어 있었다. 레이 전담 하인들의 손길이었다.
나중을 생각하면 흔적을 남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푸엥의 안위를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조금 가셨다.
루이반에 온 이후 레이는 예상을 웃도는 과분한 사랑을 받는 중이었다. 떠나기 전에 마무리 정말 잘하고 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다.
“벌써 어두워지네.”
부쩍 추워진 날씨에 해도 짧아졌다.
“푸엥, 내일 길게 산책할게. 우리 이제 가야 해.”
레이는 푸엥의 머리를 쓰다듬고 줄을 살짝 당기며 몸을 돌렸다.
“어? 라엘?”
산책로를 따라 올라오는 은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가 설마 하는 생각이 그 마음을 살짝 눌렀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나 지금은 석궁 안 쏴요. 내일 할 거야. 오늘 훈련은 끝이에요. 강요하지 마. 푸엥, 물어! 훠이. 훠이!”
악마 쫓듯 자신을 물리는 레이를 보자 라미엘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찡찡 우는 소릴 내면서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오니 언제나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훈련을 밀어붙이긴 했었다.
물론 강행한다 해도 한참 많이 말랑하게 해 주고 있긴 했다. 만약 평소 훈련 때 그에게 굴려진 기사들이 이 정도로 ‘밀어붙인다’는 소릴 들으면 기가 막혀 하고 코가 막혀 할 것이었다.
레이의 가느다란 팔뚝을 보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헐렁하게 짠 훈련인데, 의외로 근성 있게 잘 따라와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워크산은 산세가 험하다. 산을 타는 것만으로도 레이 같은 사람에겐 고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엔 그저 산에서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체력만 키우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레이가 잘하니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재미가 붙을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잘해 봤자 사냥까지 나서기에 무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쯤 되니 뭐라도 잡아야 이 힘든 게 보상이 될 것 같아.”
“마님, 뭘 잡을 생각은 마시고 털끝 하나라도 다치시지나 마십시오. 저희가 죽습니다.”
“뭐야, 너희 나 무시해?”
“아뇨, 절대! 절대 아닙니다!”
연무장을 어슬렁거리던 짐승 같은 놈들과 친해졌는지 레이는 기사들과 놀고 있었다.
기사들은 연무장에서 주인한테 이리저리 훈련당하는 안주인을 마치 자신들의 막냇동생 보듯 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쥐 한 마리라도 잡아 온다. 뭐든 잡는다.”
“마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마님이 다치지 않고 돌아오시는 게 저희에겐 가장 큰 선물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마님, 지금 손에 작게 생채기 생긴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어휴, 그 이상은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너희가 그러니까 더 오기가 생기잖아!”
“예?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마님이 걱정되는 거지, 마님의 사냥 실력이 걱정되는 게 아니…….”
“쥐 잡고 다음 내 사냥감 2순위는 너희야.”
“무섭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저렇게 뭐라도 잡겠다고 기대하는데.
루이반 안주인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라미엘의 명으로 레이가 쓸 특수 석궁이 제작되었다.
예상보다 일찍 제작된 석궁은 훈련에 나가떨어지려는 레이 앞에 모습을 선보였고 그녀는 처음으로 오늘 자신의 무기와 대면했다.
“라엘, 석궁도 쓸 줄 알아요?”
“마물들은 검으로만 휘두르기에 부족할 때가 많아서.”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여길 몸에 받치고…….”
잡는 법을 알려 주기 위해 라미엘은 레이를 등 뒤에서 감싸 안은 자세로 석궁을 잡았다.
훈련 이후 처음으로 접촉한 것인데, 품에 안긴 자그마한 몸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더불어 제 손안에 잡혀 있는 작은 손의 자잘한 상처들이 눈에 들어오자 더 이상 강행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일찍 끝내는 날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몸으로도 열심히 푸엥을 돌보는 레이를 떠올리자 그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오늘은 이쯤 하자고.
그리고 역시나 레이는 그 덜덜 떨리는 몸으로 푸엥을 챙겨 산책을 나갔다.
루이반 안주인을 지키는 케이와 엘이 뒤를 따랐다. 저택 외부로 나갈 때면 레이 모르게 그림자처럼 숨어 그녀를 지키는 기사도 둘이 더 있었다.
사냥제에 참가하면 저 넷을 루이반의 이름으로 함께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기사들에게 사랑받는 마님을 보아하니 하녀 두 자리를 제외한 기사 두 자리는 경쟁이 치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