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무한 애정
“오늘 산책은 어디로 갔지?”
라미엘의 질문에 테일러가 윌포프보다도 먼저 대답을 했다.
“후원의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마차 준비하겠습니다.”
빠릿빠릿하다 못해 준비까지 빠른 테일러를 보고 윌포프는 속으로 당황했다. 주인님께서 마님을 왜 찾는지, 마님께 가시겠다 말도 안 했는데 어찌 척척 이러는지 어리둥절했다.
라미엘이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윌포프는 주인의 자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어찌 알았습니까?”
루이반 주인의 저의를 알고 원하는 걸 파악해 내는 건 집사인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보다도 더 빠르게 주인의 의중을 파악한 데다가 처치까지 내렸다?
테일러의 조치에 별말 없이 훌쩍 집무실을 나간 걸 보면 주인도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마님께서 요즘 훈련으로 고생 많이 하시는데 오늘은 멀리까지 산책을 가셨으니 걱정이 되셨겠지요.”
“마님을 지키는 사람이 무려 넷입니다.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윌포프의 말에 테일러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집사장께서는 마님이 오시면서 루이반의 무엇이 달라진 것 같습니까?”
테일러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엉뚱한 대답에 윌포프는 잠시 레이가 온 후의 루이반 저택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방금 전에 라미엘이 레이를 찾고 있었는데도 집사는 저런 질문을 한다. 테일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그리하고 있지만 평생 루이반에 뼈를 묻을 것이며,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다 아는 사람이 윌포프였다. 그런 사람이 남녀 관계로 접근할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건지 슬픈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집사가 왜 여태 결혼을 못 했는지 알겠습니다.”
일이 바빠 결혼을 못 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시간, 라미엘은 레이와 함께 동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푸엥의 옷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파란 옷을 입은 푸엥은 어둑해지는 곳에서 보니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귀엽죠? 내 새끼 옷발도 예술이야.”
기르는 개를 이렇게나 이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자기 개의 혈통이나 영리함을 자랑하는 건 봤지만, 자식이나 다름없이 옷이며 장난감을 만들어 가며 키우는 건 처음 보았다. 강아지가 계속 주인을 바라보고 그 곁을 지키며 주인의 발걸음에 맞춰 종종 걷고 있는 것도.
마차에 오를 때까지 푸엥의 시선은 레이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반려동물과의 교감을 보는 게 라미엘에겐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라엘, 우리 푸엥 얼마나 똑똑한지 볼래요?”
맞은편에 앉은 레이가 생글생글한 얼굴로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푸엥의 몸을 톡톡 두드렸다.
“푸엥, 너의 똑똑함을 보여 줘야 할 시간이야.”
주인의 말에 푸엥이 툭 마차 바닥으로 내려가서 레이를 마주 보았다.
“라엘, 잘 봐요. 푸엥, 손.”
푸엥이 레이가 내민 손에 앞발을 하나 척 올렸다.
“이쪽 말고 다른 손. 옳지. 뒷발. 아이, 착해.”
레이의 명령에 따라 푸엥이 척척 네 다리를 내밀고 앉았다 엎드렸다가 바닥을 데굴 구르고 멍멍 대답을 했다.
“대단하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이 정도예요!”
푸엥을 품에 안고 뽀뽀를 퍼부으며 자랑에 여념이 없던 레이는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무렵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었다.
“레이?”
창문에 통통 머리를 부딪치는데도 깰 생각도 안 하는 걸 보니 오늘 하루가 고되긴 한 모양이었다.
라미엘이 다가가 레이의 머리와 창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찌푸려졌던 미간이 슬쩍 펴지고 손바닥에 편히 이마를 기대고 다시 평온을 찾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도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레이, 일어나요. 다 왔어요.”
“아, 씨이잉…….”
여전히 잠투정 있는 마님은 설핏 눈을 뜬 것 같은데도 정신을 못 차렸다.
“안 갈래……. 여기서…….”
라미엘은 두말 않고 바로 레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푸엥, 먼저 내려가.”
라미엘의 말도 알아듣는지 마차 문이 열리자 주인바라기 푸엥이 먼저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꼬리를 방방 흔들며 뒤따라 나온 라미엘 곁에서 걸음을 맞춰 걸었다.
푸엥의 눈은 여전히 자신의 품에 안긴 주인을 향해 있었다.
맹목적이고 무한한 애정을 담은 검은 눈동자를 보니 라미엘은 낮에 마님 곁에 있던 기사들이 생각났다.
***
“집사가 왜 여태 결혼을 못 했는지 알겠습니다.”
테일러의 말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누구 결혼 못 한 걸 놀리는 것도 아니고.’
윌포프와 테일러는 선을 지키는 사이였다.
서로 함께 일한 지 오래되었지만 공적으로 알고 지냈지, 사적으로는 그리 친하진 않았다. 루이반에 대한 이상이 같다는 점 때문에 함께 일하면 수월하긴 했지만, 그 외로 딱히 얽힐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하다니.
무례한 말인데, 자신을 몹시도 안타깝게 보는 테일러의 진심 어린 표정과 그 말을 내뱉은 후 화들짝 놀라며 실언이라고 바로 사과를 해서 그 불쾌함은 희석되었다.
“집사장께서는 마님이 오시면서 루이반의 무엇이 달라진 것 같습니까?”
어젯밤, 주인은 마차에서 잠든 마님을 품에 안고 내렸다.
그간의 라미엘이란 사람을 생각해 보면, 마차에서 누가 잠들었을 때 깨워 주는 정도가 최대의 친절이었을 터다.
그런데 깨워서 부축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잘 자는 걸 깨우고 싶지 않은 것처럼 소중히 안고 내렸다.
레이알렉시스.
라미엘의 짝으로, 루이반의 안주인으로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그녀가 귀족이 아니란 것은 둘째 치고, 그 어느 면에서도 루이반과 맞는 게 없었다.
미모 하나 때문이라기엔 그만큼 예쁜 영애는 많았다. 무언가 특출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심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주인님은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서로에게 푹 빠진, 사랑하는 부부 사이인 척하기로 했다니까 아마도 라미엘은 헤어지기 전까지 그녀를 제 반려로 대할 것이다. 그 기간까지는 집사, 행정관의 눈마저 속일 정도로 정말 진심인 것처럼.
주인이 저 정도로 하시겠다면 그의 종인 자신 역시도 그래야 할 것이다.
“진짜 마님이라 생각하고 있어야겠군.”
윌포프는 결론을 내렸다.
오는 방향은 틀렸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테일러가 알면 속이 터질 과정이겠지만.
***
“맞혔다.”
과녁을 확인한 레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과녁의 오른쪽 위 귀퉁이에 레이가 쏜 특수 촉이 박혀 있었다.
“꺄아아! 이거 봐요, 라엘!”
오늘도 흙과 한 몸이 되어 꾀죄죄한 몰골을 한 마님이 햇살처럼 맑게 웃으며 쩌렁쩌렁 소리를 쳤다.
“다들 와서 봐 봐! 내가 한 거야!”
매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새것이나 다름없던 과녁에 드디어 흠이 생겼다.
“우리 마님께서 드디어 과녁 맞히셨다!”
레이 본인보다도 기사들이 더 신이 나서 난리였다. 우리 마님은 천재라느니, 이러다 워크산 동물들 멸종이 되겠다느니.
짐승 같은 놈들이 사회생활은 언제 저렇게 잘 배운 건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생활이라기보단 늦둥이 막내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것에 좀 더 가까워 보이긴 했지만.
스승이자 남편인 자신보다도 더 먼저 우르르 달려 나가 박수를 치고 헤벌쭉 다 녹아내린 얼굴로 웃고 있으니, 라미엘이 그들의 무례를 혼내기엔 분위기가 영 애매했다.
“라엘, 봐요!”
기사 무리를 헤치고 레이가 다가와 라미엘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제는 예전처럼 심하게 달달 떨리지 않는다. 마냥 따뜻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여우 가능하겠죠?”
레이는 훈련 전보다 체력이 붙은 걸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전에 무거웠던 것들이 가볍게 느껴지고, 여간한 일이 아니면 피곤하지도 않았다.
푸엥의 산책이 끝나면 힘은 들지만 이전처럼 비실비실 시체처럼 저택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다. 식욕도 왕성해졌고 얼굴에 생기가 더 반짝반짝 돌았다.
“네. 레이 덕분에 이번 겨울엔 추울 일 없겠습니다.”
처음으로 라미엘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자 레이가 더 활짝 웃었다.
기사들은 마님의 눈부신 웃음에 헤실헤실 웃다가 주인의 입에서 나온 달달한 소리에 충격을 받아 굳었다.
마님에게 무르디무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입으로까지 말랑말랑한 소리를 하는 건 그야말로 처음 들었다. 매번 라미엘에게 싸늘한 눈빛을 받고, 욕이나 다름없는 험한 말만 듣던 기사들에겐 천지가 개벽할 충격이었다.
─저 남자, 저런 말도 해 줄 줄 알아?
─역시 사랑이야.
─사랑은 위대하네.
기사들은 입 밖으론 차마 표현을 못 하고 눈빛으로 쑥덕거렸다.
“아, 예하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레이는 마침 생각난 이야기를 꺼냈다.
헤덴에게 연락이 왔다.
레이가 방에 혼자 있을 때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편지가 둥실둥실 그녀의 손으로 떨어졌다.
봉투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는데,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어떤 내용인지 레이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집사에게 아무 소리 못 들었는데. 아, 알겠군.”
루이반에 오는 모든 소식은 윌포프가 1차적으로 무조건 검수를 하는데 집사가 모른다는 건 뻔했다.
루이반에 정식으로 보낸 게 아니라 지난번 레이에게 표식을 심어 두고 직접 보낸 것이다. 딱 헤덴, 그다운 일이었다.
“편지를 이런 식으로 자주 보내시나 봐요? 라엘한테 신기하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헤덴의 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훈련, 마저 하죠.”
훈련을 더 한다고 하면 늘 울상이던 레이는 과녁에 명중시킨 덕분인지 군소리 없이 씩씩하게 석궁을 다시 챙겨 들었다.
“크레하.”
레이의 자세를 다시 봐 주며 라미엘이 크레하를 찾았다.
“예.”
“기사 두 명 뽑아서 따로 훈련시켜. 사냥제 내보낼 거니까.”
이번 사냥제는 개인전이라 들었다. 집안 몰이꾼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사냥을 해야 하니 루이반 소속 기사들이 사냥제에 나설 일은 없다.
그런데 사람을 뽑으라니. 이 말인즉, 2부에 출전하는 마님의 사냥을 도와줄 기사를 뽑는다는 말이었다.
‘따로 훈련’이란 말은 기사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마님과 함께하는 사냥이라는 사실만 그들의 마음에 팍 꽂혔다.
라미엘은 푸엥의 눈빛 같은 기사들의 눈동자를 보며, 사냥제에 차출된 기사들이 열의를 다해 레이를 지킬 것을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