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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48화 (48/160)

48화. 루이반 토너먼트

라미엘의 생각은 완벽히 적중했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시합?”

“예.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마님을 따라가겠다는 기사들이 너무 많아 두 명만 뽑기 어렵다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선발 방식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마님께서 직접 고르기’, ‘제비뽑기’, ‘사다리 타기’ 등등은 실력이 형편없는 놈이 뽑힐 수도 있다며 제외되었다.

여러 논의 끝에 최종 승자 두 명을 뽑아내는 토너먼트식의 시합을 벌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그들 나름의 시합의 규칙을 정하고 최종권자인 라미엘에게 허락을 구하러 크레하가 찾아온 것이었다.

“너희는 대체…….”

왜 레이를 좋아하는지를 묻기에는 입이 텁텁했다. 그들이 레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뭐 어쨌다는 건지. 이걸 왜 물으려는 건지도 이상하다.

라미엘은 입을 다물었다.

“격의 없이 잘 어울려 주시니까요. 딱히 기사들 차별도 안 하시고.”

크레하는 라미엘이 뭘 궁금해하는지 알아차린 듯 냉큼 대답했다.

귀족들은 타고나길 신분에 얽매여 있는지라 누군가를 만날 때 서열을 따지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예의를 차린다고 해도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자란 게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느껴지게 마련이었다.

서자라고 대우도 제대로 못 받고 자란 열네 살의 라미엘에게서조차도 느껴지는 ‘신분’이라는 벽. 그런데 루이반의 안주인은 그 벽이 아주 얇았다.

레이가 꼭 평민 출신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신흥 귀족이나 거상, 웬만한 부자들도 세상을 구르다 보면 자연스레 귀족 같은 서열의 벽이 세워졌다.

하지만 레이에게서는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고 서열질 하는 그 어떠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도 참가할 건가.”

크레하가 서운한 얼굴로 대답했다.

“못 합니다.”

“기사단장이 루이반을 지켜야지 왜 여길 껴요?”

“라미엘 님 호위 담당이잖아요. 거기 가시지 2부 오시게?”

“지금 지위로 누르겠다는 거야, 뭐야?”

“기사들 노는 데 단장이 끼다니. 용병 때도 없을 상도덕이네.”

“마님이 편애한다고 자만심 가지지 마십쇼, 단장.”

“누가 단장을 편애해? 우리 마님이? 절대 그럴 분 아니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크레하는 편애하지 않을 거라고. 싫으면 싫었지.”

같이 용병 생활을 했던, 못 하는 말이 없는 기사들을 크레하는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엄한 훈련 속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일 만한 게 있다면 크레하 본인의 앞담화를 하는 것과 요즘 부쩍 친해진 마님의 귀여움을 찬양하는 정도니, 그는 기사들의 언행을 너그러이 봐주기로 했다.

이후 훈련은 단단히 각오해야 하겠지만.

본인이 토너먼트에 참여한다면 ‘크레하 외 기사 1인’이 선발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렇듯 기사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최종적으로 크레하는 숟가락을 얹는 데에 실패했다.

주인의 호위 기사라 토너먼트엔 참여도 못 하고 탈락했다는 슬픈 사실이었다. 라미엘은 자신 같은 호위가 전혀 필요 없는 인물인데도 기사단장이란 자리가 그랬다.

‘실력과 명예가 발목을 잡는 일도 있다니.’

그렇게 슬픈 단장의 지휘 아래 신난 기사들의 토너먼트가 열렸다.

***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1대 1로 시합을 한다고 한다. 이제 곧 시작될 토너먼트를 알리기 위해 크레하가 라미엘을 찾았다.

“명 내리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라미엘의 집무실에 왔다가 크레하를 만난 레이는 요 며칠 저택이 시끄럽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냥제 참가를 위한 최종 2인을 결정하기 위한 토너먼트라는데, 레이는 사냥제가 이렇게 인기 있는 것이라곤 생각 못 했다.

“사냥제 인기가 엄청 많네요. 기사들이라 그런가? 안 한다고 했을 때 많이 서운했겠어요.”

사냥제가 인기가 많은 게 아니라 마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탓이었다.

“그래서 레이 훈련은 오늘 하루…….”

“쉬는 거죠? 오예!”

시간을 저녁때로 미룬다고 할 참이었는데 레이가 라미엘의 말을 똑 잘라먹고 세상을 다 가진 양 활짝 웃었다.

“시합 구경 갈래요.”

레이의 말에 크레하가 대답했다.

“마님이 오신다고 하면 기사들이 더 흥이 날 겁니다.”

“라엘은? 라엘, 일할 거 많아요? 안 바쁘면 같이 가서 구경해요.”

“공작님은 쉬시는 게…….”

레이의 말에 냉큼 대답을 하던 크레하는 라미엘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승자는 내가 직접 훈련시킨다고 해.”

토너먼트에 참여도 못 하고 뒷구석으로 밀려났던 크레하에게 단비 같은 명령이었다.

우승하는 놈들, 라미엘의 지옥 훈련이나 받으라지.

“넵!”

마님이 구경 오신다는 좋은 소식과 주인이 훈련시킬 거라는 나쁜 소식 두 가지를 들고 크레하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시합은 레이의 생각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기합 소리에 정신이 없고, 가뜩이나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와중에 연무장을 가득 채운 흙먼지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연무장 단상에 급히 마련된 의자에 앉아 구경하고 있자니 열심히 하는 기사들에겐 미안하지만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두툼한 담요를 두르고 있지만 좀 춥기도 하고.

유주와 영화에서 본 경기장에서는 우리 기사들 같은 몸 좋은 검투사들이 멋들어지게 싸우더만.

몸 좋은 거 말고는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여긴 그냥 떼싸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마저도 잘 안 보이고.

역시 영화와 현실은 다른 건가.

“콜록.”

와중에 기사들 수십 명이 만드는 먼지는 왜 이렇게 심한 건지.

“들어가죠. 재미도 없어 보이는데.”

라미엘이 손수건을 챙겨 주며 말했다. 가려운 곳을 벅벅 긁어 주는 말에 하마터면 함박웃음을 지을 뻔했다.

“아닌데? 재밌어요.”

기사들이 마님 온다고 그렇게 좋아했다는데 재미가 없어서 들어간다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까.

라미엘은 누가 봐도 영혼 없는 눈빛을 하고선 꿋꿋하게 앉아 있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레이가 저택으로 간다고 해도 기사들은 자기 싸움에 바빠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안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상처받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터였다. 혹 상심한다 하더라도 주인마님을 상대로 어쩔 수나 있을까.

그런데도 레이는 라미엘이 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 가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라비던의 천사, 이건 자신보단 레이알렉시스에게 훨씬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기사들의 토너먼트에서 눈을 떼고 라미엘은 아예 몸을 틀어 레이를 관찰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사들 싸움보다는 그녀의 반응이나 보는 게 훨씬 재미있을 테니까.

“어? 어어?”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레이의 눈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탈락자들이 솎아진 뒤 상위 실력자들 몇 팀이 남아 경기를 펼치자 상황이 바뀌었다.

흙먼지도 함성도 잦아든 상태가 되자 보기 훨씬 편해졌고, 영화 속 장면 같은 결투가 펼쳐지니 흥미가 쭉 올랐다. 아까는 침대가 필요했다면 지금 필요한 건 팝콘이었다.

목검을 쥐고 흔드는데 진검으로 보일 만큼 치열한 결투가 펼쳐졌다. 바닥부터 계속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또 물리치며 올라온 기사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으나 검만 잡으면 기세가 달라졌다.

“어어어! 아잇, 어머! 미쳤네, 미쳤다.”

엉덩이까지 들썩들썩해 가며 레이는 눈앞에 펼쳐지는 경기에 푹 빠졌다.

‘유주가 이 맛에 격투기를 봤구나.’

“저걸 저렇게도. 와. 라엘 봤어요?”

레이가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옆자리의 라미엘을 톡톡 치며 말했는데 눈이 마주쳤다.

마치 계속 자신만 바라보고 있던 것 같은 시선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앞서 나간 걸까. 지난번부터 라미엘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종종 생긴다.

‘설마 라미엘 나한테 빠져들…….’

허튼 생각을 하다 자신의 손이 라미엘의 단단한 팔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레이는 빠르게 치웠다.

예전에 그가 웨버와 악수한 장갑을 태워 버리는 걸 보지 않았던가. 예상외의 터치를 당한 옷소매를 뜯어내진 못하겠으나 기분이 상했을 수가 있다.

“미안합니다.”

급히 사과를 하는 와중에도 손바닥에 단단한 팔의 감촉이 남아 있다.

‘통나무인가. 벽돌인가. 이게 사람 팔이라니.’

가끔 팔짱을 낄 때도 느끼는 바지만 사람 팔이 아니라 무슨 광물이나 조각상을 만지는 것 같다.

“왜 사과를 해요?”

“아, 그게 저기, 라엘의 동의 없이 방금 내가 팔을 만져서.”

“레이가 내 동의 없이 날 만지는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새삼 사과는 왜 하나요.”

그랬던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친한 척하느라고 팔짱을 몇 번 끼긴 했지만 그건 계약의 일종이었다.

“아니죠. 그런 건 암묵적 동의가 있었잖아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친한 척해야 했으니까.”

“지금도 기사들이 있으니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흔쾌한 허락이었다.

“음, 그럼 허락했으니까 좀 더 만지는 건……?”

라미엘이 거부하기 전에 레이가 냉큼 그의 팔을 쑥 훑어내려 보았다.

“와.”

생긴 건 천사님인데 몸은 지옥불에 사람 던져 넣느라 맹렬히 단련된 악마 같다.

‘하긴. 온몸이 돌덩이처럼 단단한데 팔이라고 다를 리가.’

석궁 훈련을 시작하면서 자세를 잡느라 품에 몇 번 안겨 봐서 그의 단단함을 잘 안다. 레이는 옷 속에 감춰진 라미엘의 몸매를 투시하듯 훑어보았다.

‘몸이 얼마나 좋으면 이래.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좋을 것 같은데.’

훈련할 때 수박바나 다른 기사들처럼 한 번쯤 셔츠 좀 벗어 보면 안 되나. 맨날 꽁꽁 싸매고 있어.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있다고.

있지. 두툼한 몸통 탓인지 쇄골 부분의 셔츠 깃이 둥둥 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대단했다.

레이는 자문자답을 하며 라미엘의 미모에 가려져 후순위로 밀렸던 조각같이 대단하고 멋진 몸매에 대한 상념을 이어 갔다.

“레이, 지금…….”

“군침이 싹 도, 네? 뭐. 뭔데, 뭐, 왜? 왜요?”

침 흘렸나? 아니겠지?

당황한 얼굴을 빠르게 갈무리하며 레이가 슬쩍 입가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보송보송하다. 다행인데. 내 눈빛 너무 더러웠나? 아냐, 이건 이 남자 잘못이야. 왜 이렇게 잘생겼어, 잘생기길. 몸매라도 안 좋아 보이든가. 뭐 이리 완벽해.’

레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미엘은 조금 전과 같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너먼트 끝났습니다.”

“네?”

연무장으로 고갤 돌리니 기사들의 함성과 박수 속에 두 남자가 만세를 하며 소리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언제 끝났어요? 대체 언제? 나 결승전 하나도 못 봤는데! 우승자 누구지? 톰이랑 허디인가?”

“많이 지친 상태에서 치른 거라 단번에 기량이 판가름 났습니다.”

아무리 단판이었대도 결승인데 그걸 못 봤다. 라미엘 몸에 홀려서 그만. 평소에 얼마든지 훔쳐봐도 됐었던 것에 정신이 팔려 단 한 번뿐인 경기를 놓치다니.

“내가 그걸 놓쳤네. 어휴, 아까워라. 진짜 재미있었는데.”

“이게 정말 재미있었습니까?”

“그럼요. 재밌던데. 왜요? 라엘은 아니었어요?”

“글쎄요. 가르칠 것들이 보이긴 했습니다만.”

보는 관점이 이렇게나 달랐다니.

“그래도 싸움 중 제일 재밌는 건 X밥 싸움이라고 그랬는데.”

“……요즘 기사들하고 자주 놀더니 좋은 말을 배웠군요. 윌포프가 알면 아주 좋아하겠어요.”

“크레하 경이 했던 말이에요. 난 듣기만 했는걸.”

저는 죄가 없소이다, 하는 눈빛의 레이는 단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우승자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옆에서 피식, 라미엘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겼어? 승자 너희 둘이야?”

“예! 마님.”

“사냥 열심히 돕겠습니다.”

“나도! 열심히 할게.”

샤냥제 동승자로 최종 선발된 2인인 톰과 허디는 열의를 태우는 마님의 눈동자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나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레이가 뭐든 잡아 오려면.”

라미엘이 웃으며 다정하게 말하는데 왜인지 그를 바라보는 세 명은 소름이 돋았다.

“어, 라엘은 적당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럴 순 없죠. 레이는 저녁에 석궁 조금만 더 연습해 보기로 하고…….”

거짓말쟁이. 오늘 훈련 안 한다고 했잖아요.

이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라미엘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의자에 툭 던져 버리듯 놓고 단상을 내려갔다. 그리고 우승자 두 명을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뭐 해? 준비 안 하고.”

크레하에게 전해 듣긴 했다.

우승자는 주인님이 ‘직접’ 훈련시키신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방금 전까지 수십 판의 싸움을 끝내 기진맥진한 사람한테 훈련을 하자니.

해도 너무한 처사지만 단상에 남은 마님의 눈동자에 영혼이 빠져나간 걸 보니 오히려 저쪽이 위로를 받아야 할 것 같아 보였다.

“으, 씨……. 저 나쁜…….”

마님이 작게 읊조린 욕은 아무도 듣지 못한 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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