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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49화 (49/160)

49화. 악마의 가지

“진짜 해요?”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은 미소로 대답했다.

“후우.”

단전에서 끌어 올린 한숨을 내쉰 훈련복 차림의 레이는 어깨를 축 떨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가 커다란 상자 안의 석궁을 챙겨 들어 어깨에 멨다.

아까 낮에 나쁜 놈이라고 욕한 거, 아무래도 들은 것 같다.

들은 게 분명해. 그러니까 내내 기사들 훈련시키고도 나까지 한다고 하지.

사람 체력은 무한대가 아닌데 어떻게 하루 종일 몸을 쓰냐고. 로봇이야? 이 훈련은 복수인 게 분명해.

레이는 속으로 쉴 새 없이 구시렁거렸다.

“레이.”

“네.”

“입술 좀 집어넣죠?”

“원래 도톰하니 섹시한 돌출 입술입니다.”

강아지가 또 심통이 났다.

뒤통수에 대고 자그맣게 욕까지 했던 걸 보아 단단히 심술이 난 것 같은데, 그러면서 착실하게 옷 챙겨 입고 무기 들고 종종 따라오는 걸 보면 마냥 귀엽고 웃음이 나온다.

“레이가 석궁에 사용할 특수 촉 말고 탄도 만들어 왔는데 안 쏴 볼 겁니까.”

밀당의 대가 지옥 훈련 라 선생께서 또 새로운 떡밥을 가져오셨다.

“뭐, 뭔데요. 더 좋은 거야?”

그리고 레이 물고기는 역시나 이번에도 낚여 버린다.

라미엘이 손에 들고 있던 상자가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미끼였구나.

“연무장 가면 알려 줄게요.”

나는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고.

“라엘, 당신 악마 같아요. 유혹의 대가야. 왜 이렇게 조련을 잘해? 지옥인 거 알면서도 넘어가잖아요.”

“훈련이 지옥이라야 실전에서 지옥을 피해 갈 수 있으니까요.”

“나 마물 잡으러 가는 거 아닌데.”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한 마디도 안 지네, 요 악마 놈.

“……네. 훈련해요. 열심히 합시다.”

연무장은 비어 있었다.

라미엘의 훈련에 전부 쓰러지기라도 했는지, 이 시간쯤이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뒷정리를 하거나 쉬고 있을 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훈련이 일찍 끝난 그들이 부럽거나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라미엘이 참가한 훈련인데 일찍 끝났다? 내용을 압축한, 그야말로 고강도 훈련을 해서 사람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악마다, 악마.”

강아지의 눈에 경악이 깃든 게 보인다. 자신이 주도한 훈련인데 예정보다 일찍 끝이 났다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 이제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라미엘이 내민 상자엔 촉의 3분의 2 크기의 총알 비슷한 모양의 검은 탄이 열 맞춰 들어 있었다.

“총알같이 생겼네.”

“총알?”

“음, 친구네 동네에 그런 게 있었어요. 이거 혹시 터지는 거예요?”

“어떻게 알았나요? 힘을 응축해 쏘아 날려서 가볍게 터트리는 방식입니다.”

라미엘이 석궁에 탄을 넣고 작은 도르래를 돌린 뒤 과녁을 향해 한 발 쏘았다.

슉 소릴 내며 날아간 탄은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고, 맞은 부분의 과녁이 뚫릴 것처럼 움푹 파였다가 후드득 부서져 나갔다.

“우와. 이 정도 위력이면 촉 안 쓰고 이 탄만 쓰면 되겠는데요.”

“촉은 탄보다 살상력이 더 셉니다. 사냥감을 발견했는데 놓칠 것 같으면 탄으로 먼저 힘을 뺀 뒤에 촉을 사용해요.”

탄과 촉을 상황에 맞춰 번갈아 가면서 쓰면 성공률을 더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도 특수 제작된 거예요?”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 제작 신문물에 레이의 흥미가 동했다.

“빨리 쏴 보고 싶어요.”

“탄은 반동이 제법 있을 겁니다. 처음은 잡아 줄게요.”

레이가 석궁을 들자 라미엘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듯 안고 자세를 잡아 주었다. 석궁으로 본격 훈련을 시작한 이후 으레 하던 자세였다.

레이가 탄을 장착한 석궁을 새로운 과녁에 조준한 뒤 발사했다.

“으앗!”

반동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라미엘이 쐈을 때 미동도 없기에 자신이 하면 약간 흔들리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큰 반동에 레이는 석궁을 놓치고 라미엘의 품에 확 밀렸다.

“어어, 어으.”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신이 예측한 것보다 탄은 반동이 심하게 컸다.

석궁 놓쳤다고 또 혼나겠구나 하는 생각조차 못 하고, 레이는 라미엘에게 기대 벌렁이는 심장을 다독였다. 놀라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손이 달달 떨렸다.

“허으으. 깜짝이야아.”

체중 실린 몸이 부딪쳐 왔는데도 라미엘은 미동도 없이 단단한 벽처럼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라미엘은 품 안에서 얼어서 꼼짝도 않고 있는 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 진정하라는 의미였다.

레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 건 아닐 터였다. 그저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반동이 커서 놀랐을 뿐이란 걸 안다.

“아으, 하으…….”

머리로 느끼는 것보다 더 크게 놀랐는지 몸이 너무 떨려서 레이는 진정하고자 더 깊게 벽같이 든든한 라미엘에게 기댔다.

“응?”

오른쪽 손바닥에 무언가가 닿았다.

‘이건 뭐야.’

레이는 물체를 더듬거렸다.

‘오이? ……보다는 큰데. 가지인가.’

라미엘이 주머니에 왜 가지를 넣고 다니지, 같은 말도 안 되는 의문이 떠올랐을 때.

레이는 제 어깨를 잡고 있는 라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어……?”

지금 아주 제대로 사고를 친 것 같다. 이건 술 처먹고 주둥이 내미는 수준이 아니다. 그건 술 때문이라고 우길 수나 있지.

황급히 손을 떼어 냈지만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차마 닦을 수 없었다. 땀방울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레이는 삐걱삐걱 라미엘에게 붙은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달렸다.

젖 먹던 힘까지, 있는 힘껏, 평생 가장 최선을 다한 속도로 레이는 도망치듯 연무장을 떠났다.

***

레이의 손에서 펜이 툭 굴러떨어졌다. 달달 떨리던 손이 기어이 펜을 놓치고 말았다. 펜이 굴러간 자리에 잉크가 뚝뚝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편지지 다시 새 걸로…….”

굴러간 펜을 주워 드는데 오른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끄아악!”

펜을 집어 던지고 레이가 오른손을 치맛자락에 벅벅 비볐다.

“지워져라! 지워져, 좀!”

레이의 발치에 엎드려 있던 푸엥이 그녀가 집어 던진 펜을 입에 물고 와 건넸다.

“세상에, 말도 안 했는데 엄마한테 갖다 준 거야? 내 새끼, 보통 천재가 아니구나.”

이 와중에도 푸엥은 몹시 똑똑하고 귀여웠다. 레이는 푸엥의 동그란 머리에 뽀뽀를 퍼붓고 다시 괴로운 표정으로 책상에 엎드렸다.

그놈의 감촉이 오른손만 보면 스멀스멀 자동 재생 됐다.

“환장하겠다.”

너무 놀라서 사과도 못 했다.

주사 부렸을 때처럼 제대로 사과를 할 생각도 못 하고, 어버버하다가 그대로 후다닥 달려 저택으로 도망쳤다.

어떻게든 저녁의 사건을 잊어 보려 온갖 짓을 다 했지만 그럴수록 민망함이 몰려왔다.

레이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한국을 떠올렸고, 그 연관으로 헤덴의 편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답장을 쓰는 중인데 또 원점이다.

레이는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뺨을 찰싹 내려친 뒤 다시 편지에 집중하려 했다.

“헤덴 예하, 글씨도 예쁘네.”

글씨도 아이돌 사인 같다. 필기체지만 정자처럼 매끈하게 쓰인 서체는 헤덴의 말투와는 딴판으로 젊고 예뻤다.

“서체도 얼굴 따라가나.”

헤덴이 보낸 편지 말미엔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편지 봉투를 봉하는 실링 같은 붉은 인이 얇게 찍혀 있는데 라미엘은 그게 헤덴을 나타내는, ‘진짜’라는 표식이라고 했다. 헤덴의 명성을 이용해 사기 치는 사람들이 없도록 특수 인을 찍는다던가.

편지 내용은 단순했다.

준비가 됐으니 베롬에 놀러 오라는 말이었다. 마침 사냥제로 베롬에 가게 됐으니 한 번에 큰일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 간 김에 루이반 베롬 별장도 구경하자고 해야지. 아직 찜한 게 없으니까.”

귀족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한 곳이 베롬이다. 저택처럼 크진 않아도 예쁘고 독특한 건물들이 많아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베롬은 남쪽 섬이라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본토보다 훨씬 기온이 따뜻할 것이다.

‘따뜻, 했지…….’

장갑이라도 끼고 있었으면 좀 나았을까. 왜 하필 오늘 맨손으로 훈련을 받았지? 날도 추운데.

이 정도 잘못이면 정말 라미엘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라엘, 화 많이 나면 어떻게 할까?”

폭력인가, 욕설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뭐가 있으려나.

풀 수 있나? 웬만한 사과로 풀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누구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까?

문득 라엘의 화를 가장 많이 돋울 것 같은 사람이 떠오르자 레이는 지체 없이 그를 호출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님.”

윌포프에게 기별을 받고 크레하가 레이의 방에 들어섰다. 부부 침실과 별도로 레이가 푸엥과 함께 지내는 공간이었다.

“응. 궁금한 게 있어서.”

크레하는 어딘가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이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뭔 사고라도 쳤나?’

“저기…….”

“무슨 일이시기에?”

“라엘 화난 거 본 적 있지?”

“그럼요. 오늘도 그랬는데요.”

라미엘이 화내는 게 일상인 듯 크레하의 대답엔 거침이 없었다.

“오늘? 오, 오늘 언제?”

“아까 훈련할 때? 훈련할 때면 언제나 주인님, 아니 공작님께선 화가 나 계시긴 합니다만.”

기사들 훈련이라면 가지 전이다.

안 돼, 미친, 가지라니. 가지 생각 하지 말자.

“그 후엔?”

“마님이랑 훈련하시고 그 후론 뵌 적이 없어서 마님께서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구나.

“혹시 오늘 말고 이전에 엄청 많이 화가 난 적 있어? 훈련 때 화나 있는 것 말고. 정말 극대노한 그런 일?”

레이의 질문에 크레하는 곰곰이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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