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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0화 (50/160)

50화. 남만도 못한 사이

라미엘은 화가 난다고 큰 소리를 내고 열을 내며 불타오르지 않는다.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 냉기를 멋모르고 건드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난다.

토벌전에서 라미엘은 눈에 띄는 남자였다. 아직 덜 여문 그의 얼굴은 여자나 다름없이 곱상하고 어여뻤다. 거기에 뒷배 없는, 버려진 귀족이라는 지위까지.

험하게 구르다가 토벌전에 합류된 일부 질 나쁜 기사들에겐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먹잇감이었다.

그런 기사들의 눈을 멀게 하고 손목을 잘라 내며 차근차근 위로 올라간 게 라미엘이었다고 들었다.

욕정 해결을 위해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 가장 약한 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토벌대장은 사기 진작이라는 명분으로 후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애써 귀 닫고 눈 감으려 했으나, 인력 하나하나가 귀한 상황에서 기사가 도륙이 나고 있으니 조치를 취해야 했다.

뒤늦게 기사단 내 성폭력 금지 명령을 다시 알리고 위반 시 하극상으로 간주하고 그 처리를 라미엘에게 맡기기로 했다.

원래 본인이 직접 처벌하려 했으나 바빠서 차일피일 벌이 미뤄지게 되었고, 다른 기사에게 맡기니 같은 동기랍시고 어영부영 친우를 감쌌다. 하여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라미엘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붉은 천사의 처벌에 기사들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고 그게 굳어져 토벌전 내 더러운 범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음. 마님께서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공작님이 만약 사람 때문에 극도로 화가 나셨다면 그 상대는 지금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큽니다.”

크레하 본인 딴에는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내뱉고 나니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극도로 화가 날 일은 없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지금의 라미엘 루이반의 신경을 누가 긁을 수 있단 말인가.

소속 기사들에게 화를 내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 그건 화도 아닌 것이고, 마님을 만난 이후 예전처럼 냉하지도 않으니 그 남자의 화는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최고점을 찍을 일이 없다.

“실언했습니다. 그런 일 없고 공작님은 여간해선……. 마님?”

크레하의 말에 레이의 안색이 서서히 나빠졌다.

죽는구나. 허, 세상에나, 죽는구나. 죽는 거야.

‘사람이 실수 좀 할 수 있는 거지!’

죽기 전에 사과하면 용서해 주지 않을까. 실수인 거 라미엘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누가 미쳤다고 루이반 공작의 그, 어, 그, 그걸, 대놓고 그렇, 그렇게 하겠냐고. 아무리 봐도 실수지.

머릿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라미엘 얼굴 보고 사과는 할 수 있겠니? 그걸 못 해서 도망친 거 아냐?

그렇지, 그게 문제지.

“아아, 어떡해애.”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공작님한테 뭔가 문제라도?”

“아니.”

“뭔진 모르겠습니다만, 공작께서는 마님한테 엄청 무르시니까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 주실걸요? 걱정 마세요.”

“웬만하지 않으면?”

레이의 질문에 크레하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치신 겁니까?”

사고 친 게 아니라 라미엘 가지를 쳤어.

“……아냐.”

“뭡니까. 제가 알아야 돕죠.”

이건 수박바 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못 도와.

“아니라니까. 사고 같은 거 없었어. 매번 기사들이 하도 무서워하길래 라엘이 진짜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궁금해져서 그랬어.”

찝찝한데.

이런 소소한 게 궁금했으면 집사를 부르기보단 훈련 때 직접 자신한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아까 안색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는데 대체 공작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레이는 끝끝내 아무 일 없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라미엘이 부부 침실에 자는 척하러 올 텐데.’

등에 식은땀이 다시 맺히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하고…… 어우, 당장은 라엘 얼굴 못 보겠어!’

오늘은 일단 빨리 침대로 가서 자는 척하고, 내일 화가 좀 누그러졌을 즈음에 사과를 하고 독살을 당하든 척살을 당하든 하자.

그런데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밤이 무르익는데도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경, 가기 전에 나 부탁이 있어.”

“말씀하세요.”

“내 뒷목 좀 후려쳐 줘.”

“예에?”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크레하가 레이를 바라보았다.

“이왕이면 내일 점심 지나서 일어날 수 있을 강도로.”

농담이 아니었는지 레이는 크레하가 치기 쉽도록 제 뒷목을 보이게 고개를 푹 숙여 주기까지 했다.

“마님? 대체 왜, 무슨 그런 말씀을?”

크레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제발 묻지 말고 쳐 줘. 부담 갖지 마. 전에도 한번 맞아 본 적 있어서 괜찮아. 얼른 때려.”

수박바, 제발 좀 쳐 줘.

레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크레하를 바라보았다.

***

“마님.”

“응?”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레이를 케이가 불렀다.

“저…….”

뜸을 들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싶었다.

“왜? 무슨 일이야?”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이제 마음을 좀 푸시고 용서를 하셨으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를 소리였다.

누가 마음을 풀어야 하고 누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던가.

“무슨 말이야?”

“공작님께서 마님께 어떤 잘못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벌써 열흘이나 지났고, 이제 사냥제 시작이기도 하니 이번 한 번만 마님께서 너그러이 마음 풀어 주시면…….”

라미엘이 저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니.

“잠깐, 잠깐. 케이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라엘을 용서해야 한다고?”

“아, 아뇨! 마님께서 무조건 봐주시라는 말이 아니라 저는 그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용서하세요, 마님.”

용서는 내가 구해야 하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지.

사건이 일어난 날 밤.

끝끝내 크레하는 마님의 괴상한 청을 거절하고 방을 나섰다. 하여 레이는 잠든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내 심장 졸이며 침대 구석에 찌그러지듯 누워 있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라미엘의 움직임에 바로 깼다.

침대에서 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하인들이 조용히 옷가지를 찾아 올리는 소리, 그가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레이는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렇게 점심때까지 어찌어찌 넘겼는데 이후는 도저히 그 어떤 핑계로도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장 오후의 훈련이 문제였다.

모른 척하기엔 너무 잘 알아서 놀란 모습을 보였기에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뻔뻔하게 그게 뭔지 모른 척하기로 했다…… 는 무슨.

훈련장에 있는 라미엘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서 아래로 시선이 떨어지려고 해서 식겁했다. 모른 척은 그른 방법이었다.

라미엘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그냥 파리가 앉았다 날아갔다 생각하는지 평소와 다른 게 없었다.

그래서 레이는 라비던의 천사라는 그의 별명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라미엘의 말에 토 하나 달지 않고 묵묵히 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후 샤워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푸엥과 놀고, 산책하고 하루를 마쳤다.

사냥제가 시작되기까지 마지막 열흘간 레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평소보다 더 완벽하게 스케줄을 마쳤다. 단 한 번도 라미엘과 눈을 마주치는 일 없이.

레이는 저 멀리 떨어진 나무 같은 걸 바라보며 라미엘과 대화를 했다. 당연지사 단둘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했다.

때 아닌 부부의 냉전에 가슴 졸이는 건 루이반의 하인들이었다. 사냥제로 두 부부가 저택을 떠날 때까지 온 집안이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마님이 저리 주인님을 피하는 걸 보니, 주인님이 큰 잘못을 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냥제를 위해 저택을 떠나는 날.

간만에 찾아온 공식 행사에 누구보다 사랑이 넘쳐야 할 부부는 남만도 못한 사이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베롬에 가려면 마차로 역까지 이동한 다음 열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가서 한 시간 반 정도 배를 타야 했다.

이 말인즉, 세 가지 이동 수단 중 부부만의 공간이 있는 마차와 열차에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 펼쳐진다는 말이었다.

레이는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윌포프가 정리해 준 사냥제에 관한 자료를 꺼내 들고 코를 박았다. 그간 윌포프가 준 자료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으며 평소에 대강 읽는 척만 하고 내버려 두었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이 자료들을 모두 정독할 것이다.

‘차라리 빨리 사과를 했어야 하나.’

타이밍을 한 번 놓치니 그 이후 사과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니게 어색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라미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레이, 나한테…….”

“어머, 더워라. 환기 좀 해야겠다.”

겨울에 덥기는 퍽이나.

하지만 라미엘의 말 때문에 당황해서 얼굴에 열이 불쑥 올랐으니 덥긴 더운 게 맞았다.

레이는 창문을 벌컥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마차 안으로 들어오며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고 있던 크레하가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별일 아냐. 그냥 환기.”

“날이 많이 춥습니다. 감기 걸리실 수 있으니…….”

“안 걸려. 절대 그럴 일 없어. 내가 이겨.”

“뭘 이겨요, 이기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창문 닫으라고 하고 싶은데, 레이의 눈빛이 어딘가 너무 절박해 보여서 크레하는 더 이상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잘못했다 한마디 하고 끝내지.’

지난날 마님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저택 사람들이야 다들 공작이 마님께 잘못한 줄 알고 있지만, 그날 레이의 눈을 봤다면 절대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다. 분명 잘못은 마님 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라미엘이 너무도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마님이 절절맬 정도의 잘못이라면 분명 심경에 변화가 있을 텐데 그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별일이 다 있네.’

크레하가 별말 없이 시선을 앞으로 돌리는 것을 보며 레이는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이거 단위가 잘못된 것 같은데.”

워크산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부분을 읽는데 단위가 유독 튀었다. 이게 맞는 수치인가.

“그게 맞을 겁니다.”

“네?”

열하루 만에 레이가 라미엘과 눈을 마주쳤다.

“레이가 말하는 거 워크산 크기 같은데.”

“맞, 맞아요.”

라미엘 눈동자가 금색이었던가.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낯설고 어색했다.

이 남자 열흘 동안 뭘 먹은 거야? 나랑 같은 거 먹은 거 아니었나? 왜 더 잘생겨졌지?

“그래서 할 말은?”

“네, 네?”

“나한테 할 말 있어 보이는데.”

얼굴에 홀려서 잠시 어색함을 잊었다가 지뢰를 밟은 기분이었다.

레이의 눈에 다시금 초점이 사라지고 입만 붕어처럼 뻐끔대는 광경을 보며, 라미엘은 창문을 닫고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살면서 그렇게 황당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반동에 놀란 레이가 실수를 한 건 알겠는데, 그다음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이전처럼 비장하게 사과하러 올 줄 알았더니 사신 보듯 피할 줄이야. 실수한 상대가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니 오히려 당한 쪽에서 달래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주, 주주, 죽이지 말…….”

레이는 지금 이 순간 마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신이 어떻게 죽고 싶으냐고 너그러이 묻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네?”

“죽이지만 말아 주세, 아니, 죽일 거면 사전에 예고라도…….”

레이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진 않았지만 죽는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녀가 쥐고 있던 서류가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피해자는 이쪽임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너무 겁을 먹은 것 같아서 라미엘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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