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1화 (51/160)

51화. 사냥제 (1)

마차와 열차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기진맥진해진 레이는 배를 타고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베롬 항구에 배가 닿기 직전이었다.

“마님,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엘의 부름에 레이는 1등석 선실 침대 위에서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가볍게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갑판으로 나갔다.

“……뭐야.”

눈앞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산이 보였다.

‘저게 산이 맞긴 한가? 그냥 거대한 벽 아냐?’

주변의 아름다운 배경을 가뿐히 무시하게 만드는 엄청난 크기였다. 산 수십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위용에 그저 눈만 깜빡였다.

“원근법 적용된 것 맞나.”

워크산이 베롬 땅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산이라는 건 자료로 봐서 알았는데, 막연히 수치로 아는 것과 눈으로 실감하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구름 속에 가려진 꼭대기는 그 끝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우와아.”

“레이.”

“억, 깜짝이야!”

라미엘이 어느새 레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내리죠.”

배는 이미 육지에 닿아 있었다. 항구 앞쪽으로 사냥제를 위해 베롬을 찾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환영단까지 나와 있었다.

레이는 라미엘이 내민 팔에 기계적으로 제 팔을 끼워 넣고 어색한 걸음으로 베롬 땅을 밟았다.

***

여독이 제대로 풀릴 새도 없이 바로 사냥제 시작이었기에 레이는 늘어질 틈 없이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아차.”

레이의 재킷 주머니에서 헤덴의 편지가 나왔다. 베롬에 도착해 대신전에 갈 때, 대신관이 불렀다는 확실한 증거물로 보여 주려고 까먹지 않게 아예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다.

그리고 이걸 보니 생각이 났다.

“답장 깜빡했다.”

가지의 충격이 너무도 커서 답장도 까먹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편지를 보내야 할까? 베롬에 와 있다고.

“아니지. 이미 알고 계시겠다.”

사냥제 주관이 대신전이고, 헤덴은 그곳의 최고 우두머리이니 참여자 명단을 가장 먼저 봤을 것이다.

혹여 명단을 대강 본다 하더라도 1순위로 적혀 있는 게 루이반일 테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확실히 ‘아가’네 부부가 온다는 건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여태 답장이 없어도 아무 말씀도 없으셨겠지.’

사냥제가 끝나고 기도식 참여를 위해서라도 대신전은 들러야 하는 코스였으니, 겸사겸사 찾아뵈면 될 일이었다.

“마님, 이제 나갈까요?”

레이의 준비를 돕던 케이와 엘이 물었다.

이곳은 주 수련소 건물 중 신관들이 사용하던 숙소로, 사냥제 때는 참가자를 위한 일종의 호텔 공간으로 바뀐다.

참가자별로 방을 하나씩 지정해 주지만, 신전에서는 당연히 사랑 넘치는 루이반 부부를 한 방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가 본인도 엄연한 참가자이니 따로 방을 달라고 요청해 부부는 바로 옆방에 머물게 되었다.

사냥에 참가를 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어떠한 핑계도 못 대고 라미엘과 고스란히 작은 방의 한 침대 위에서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그간 애정 넘치는 부부 행세를 잘 해 둬서인지 두 사람이 방을 따로 잡았다는 말에도 불화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첫 사냥 참여에 대한 루이반 공작 부인의 열의가 엄청난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정작 하인들은 방까지 따로 잡을 정도로 부부 사이가 냉랭해졌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잔뜩 쓰고 있었지만.

“준비 다 됐어. 나가자.”

훈련 때와 같은 사냥 복장과 무기, 날씨 변덕이 심한 산이기에 체온을 유지하게 해 주는 마법이 걸린 방수 망토까지. 여분의 탄과 촉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남은 건 사냥이었다.

방 밖을 나가자마자 복도에 기대 서 있는 라미엘이 보이자, 레이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마음의 준비를 아직 못 했는데…….’

인기척을 느낀 라미엘이 몸을 바로 세우며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옷은 또 왜 이렇게 잘 입었대? 아닌가, 옷이 라미엘을 잘 골라잡은 건가. 같은 사냥복 아냐? 라미엘 거랑 내 거랑 크기만 다르지 똑같은 거라고 했는데, 왜 느낌이 달라?

속으로 오만 생각을 하는데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맞다, 친한 척.’

레이는 라미엘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만 보면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워크산 입구에서 참가자들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것으로 사냥제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워낙 방대한 산이기에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에 각 구역별로 말뚝을 박거나 표식을 달아 구역 이름을 정해 두었다. 사냥은 그 구간의 일부에서 행해진다.

금색 리본 표시는 1부의 영역이고, 2부는 푸른색 리본이 달려 있는 곳이었다. 1부는 2부보다 좀 더 산 위로, 더 깊숙이 올라간 구역에서 행해지기에 2부보다 먼저 출발을 했다.

“여우, 기대할게요.”

라미엘이 귓가에 속삭이며 천사같이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말에 올라탔다.

레이는 갑자기 귓가에 들이닥친 천사의 인사에 놀라 제대로 된 반응도 못 한 채, 어버버하다 허무하게 그를 보내야 했다.

“1부, 건투를 빌겠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호령에 참가자들이 경쟁하듯 튀어 나가 산속으로 사라졌다.

몰이꾼을 데려오거나 팀을 짤 일이 없는 1부였지만 예년에 비해 사람이 적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몰이꾼들이 빠진 대신 기사들이 많이 출전해서 그 수를 채웠고, 분위기마저 몹시도 호전적이었다. 올해 1부는 치열한 각축이 예상된다는 기대 그대로의 분위기였다.

2부는 상대적으로 낮고 세가 험하지 않은 구역에 있기에 말을 타고 갈 필요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1부 참가자들이 사라지고 남은 2부 사람들 중 의외의 참가자가 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그스너 영애도 참가하시나요?”

레이처럼 바지 차림의 케이틀린이었다.

사냥이 여성에겐 비인기 종목이라 2부라 해도 여성 참가자는 거의 없다고 방금 오리엔테이션에서 듣고 알았다.

‘어쩐지 여자가 없더라.’

그런 와중에 라미엘은 참 편견도 없이 아내의 소원을 덥석 들어준 것이었다. 본인이 직접 훈련에 나서기까지 하면서.

“네. 전 작년부터 참여했어요. 처음이신 거죠?”

“처음이에요. 영애, 예전에 첫 출전했을 때 어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겨우 토끼 한 마리 잡아서 1등을 했답니다.”

자기 자랑이 진하게 묻어나는 말이지만 그럴 만한 결과였다.

첫 출전에 무려 1등을 했다니. 저 같으면 작년도 1위라고 현수막이라도 만들어 걸고 왔을 것이다.

크고 더 험한 동물을 잡을수록 유리한, 절대적 실력을 겨루는 1부와 달리 2부는 참여자의 실력에 비례한 순위를 정한다.

대신전에서 만든 체력, 근력 등의 신체 수치를 보여 주는 측정석의 결과와 참여 횟수에 따라 사냥감의 난이도를 조절한다.

만약 성인 남성이 여우 한 마리를 잡고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쥐를 한 마리 잡았다면 아이가 1위가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계산된, 그 누구도 불평을 갖지 않을 선정 방식이었다.

“대단하네요. 처음인데.”

레이와 한 팀으로 사냥제에 참여하게 된 톰과 허디는 첫 출전에 사냥을 성공하는 것만도 감지덕지라고 했다.

그만큼 사냥은 쉽지 않은 일이며 마님이 출전하시는 것만도 대단한 것이라 했는데, 라비던의 또 다른 천사는 문무를 겸비한, 그야말로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올해 여우는 케이틀린이 잡겠군.’

“칭찬 감사합니다. 올해엔 저 말고도 여성 참가자가 있어서 기운이 좀 나네요.”

그 말은 레이를 실력으로 처참하게 뭉개 자신의 밑밥으로 깔겠다는 소리다. 실제 그렇게 될 거라고 해도, 칭찬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다니.

“저도 기운이 나네요. 라엘이, 우리 공작께서 저 혼자 참가하는 줄 알고 어찌나 걱정을 하시던지. 무기까지 만들어 줬는데 토끼라도 한 마리 꼭 잡아갈 거예요.”

토끼 나부랭이는 나도 잡을 수 있다며 맞받아쳐 준 뒤 레이는 사람 좋은 얼굴로 씩 웃었다.

사냥제에 여자가 둘뿐이니 보나 마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두 사람의 실력을 비교하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이번 사냥에서 반드시 뭐라도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공작 부인께선 어찌 사냥에 참가하셨나요?”

그리 물고 빠는 아내면서 위험하게 왜 내보냈냐는 이야기인가, 순수하게 네가 여길 왜 왔느냐는 뜻인가. 이 말의 속뜻은 파악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저도 사냥을 해 보고 싶어서 공작님께 졸랐답니다.”

“하긴. 공작께선 부인께 워낙 다정하시니. 혹여나 공작 부인께서 사냥 때문에 다치시기라도 하면 그 짐승은 라이트가처럼 아예 사라지게 되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요.”

이게 무슨 소리지? 라이트가?

레이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놈의 라이트가, 이야기 듣는 것도 징글징글하고,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아서 관심을 아예 끊고 귀를 닫고 살고 있던 탓이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레이의 표정을 보고 케이틀린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공작 부인, 혹시 모르셨나요? 라이트 가문에 대한 소식?”

귀족들 사이에서 라미엘이 라이트 가문을 날려 버린 일은 유명했다.

라이트 가문은 망할 만해서 망한 것이지만, 황실에 서를 올려 그 가문이 무너지는 데에 박차를 가한 건 라미엘이었다.

혹자는 이전 레이의 약혼자였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라미엘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실행에 옮긴 것이라 했고, 또 다른 이는 레이알렉시스가 라미엘을 꼬셔 라이트 가문을 무너지게 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소문에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케이틀린 역시도 레이가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레이의 표정을 보니 전자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 천사 같은 남자가 칼을 다 빼어 들다니.’

라미엘의 눈빛에 찬 기운이 흐른다고 느껴졌는데 촉이 제대로 맞았나 보다. 그는 마냥 착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몰랐어요. 흐음. 망했구나.”

“백작이 도박에 빠져서 영지를 돌보지 않았다고 해요.”

“도박이요? 어머, 세상에.”

그래서 그렇게 웨버가 돈을 빼내려고 안달이었군. 백작이 도박에 미쳤다면 자신에게 떨어지는 돈이 없었을 테니.

라이트 가문과 진작 파혼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속이 후련한 결말이었다.

“훗.”

레이의 표정을 본 케이틀린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표정이라니. 공작 부인은 표정 관리를 좀 잘하셔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럼 사냥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케이틀린은 예의 있게 물러나고는 자신의 몰이꾼들 넷을 데리고 2부 무리들 속으로 사라졌다.

루이반 공작 부인은 남자 넷이 아니라 남자 둘에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하녀 둘을 데려왔다.

저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라미엘이 평소에도 자기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귀하다는 여성 무인들을 하녀로 붙여 두고 있다는 것.

당사자인 공작 부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라미엘의 아내 사랑에 사냥제 참석자들은 술렁였다.

“2부,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2부의 출발 신호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