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2화 (52/160)

52화. 사냥제 (2)

“마님, 가시죠.”

케이와 엘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앞장을 서고 레이 뒤로 톰과 허디가 바로 따라붙었다.

낮에 하녀로 있느라 밤늦게만 훈련복을 입고 훈련을 해 오던 케이와 엘이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정식으로 검을 차고 제대로 마님의 수호인 역할을 하게 되어 들뜬 상태였다.

비록 몰이꾼 역할이지만 톰과 허디 역시 루이반의 이름으로 처음 마님과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기분은 최고조였다. 이 기세라면 마님이 뭐든 사냥할 수 있게 깡그리 몰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 역시 다시 한번 석궁을 고쳐 메고 씩씩하게 입산했다.

워크산은 어마어마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갔음에도 근처에서 목소리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산의 크기가 새삼 느껴졌다.

입산한 지 30분.

사냥감을 찾으러 간 톰과 허디를 제외하고 레이 주변엔 케이와 엘뿐이었다. 마님의 체력 보존을 위해 사냥감들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건 남기사 둘이 맡기로 했다.

“나 잡을 수 있겠지?”

“물론이죠, 마님.”

당연히 잡을 수 있다는, 신뢰 가득한 얼굴의 엘과 케이를 보니 자신감이 차는 것 같았다.

‘전문가가 저리 말해 주니 빈말일지언정 기분은 좋네.’

마린의 거미줄을 착용할 때 왜 이 둘이 전담 하녀가 되었는지 레이는 오늘에서야 알았다.

‘라엘, 엄청 신경 써 주고 있었잖아?’

마린의 거미줄이 없어도 여전히 이 두 사람은 레이의 시중을 들고 있는 중이다. 일상의 위급한 순간에도 대비할 수 있게 라미엘이 조치해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을 남들뿐만 아니라 레이 본인도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으니, 이건 사람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사이좋은 척을 하려고 안배해 둔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자꾸 생각이, 마음이 예상 못 한 방향으로 흐르려고 한다. 간질간질하다.

“저희가 잘 몰아올게요. 마님께선 걱정 마시고 잡기만 하세요.”

성공률은 제법 높았다. 라미엘과 있는 게 어색해 훈련에만 집중했더니 마지막 열흘간은 한 번도 놓치는 것 없이 과녁에 명중이었다.

물론 움직이는 표적과 가만히 있는 과녁의 명중률을 비교할 순 없겠지만.

“여우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잠시 후 톰과 허디가 돌아와 살펴본 내용을 알렸다.

베롬의 날씨가 따뜻한 데다 지대가 낮은 쪽에 있어 눈이 쌓인 곳은 없었다. 다만, 비가 온 듯 동물들이 남긴 진흙 자국이 여기저기 보였다.

작은 짐승들, 사슴같이 발굽이 있는 동물들과 그를 먹이로 하는 상위 짐승들의 발자국도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여러 동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자.”

“바위가 젖어 많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응.”

10분 정도 산속으로 더 들어갔을 때, ‘저쪽으로 몰아!’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곁에서 레이를 지키는 엘을 제외한 세 명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레이는 석궁에 탄을 장착하면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

레이가 쏜 촉이 바닥에 꽂혔다.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한 흰 여우가 날래게 바닥을 박차고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서쪽!”

“몰아!”

그냥 여우도 아닌 흰 여우를 발견하고 흥분한 건 옛일이 되었다. 너무 귀여워서 저걸 어떻게 잡냐, 산 채로 잡아가자고 말한 것이 대체 누구인가.

레이는 살아 있는 채로 포획하는 게 죽이는 것보다 배는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배웠다. 이제 초심은 잊은 지 오래였다. 살아 있건 죽어 있건, 여우건 사슴이건 뭐든 잡고 싶었다.

“헉, 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흰 여우라니. 우리 마님이 오시니까 저 귀한 짐승도 마중을 다 나오네요!”

처음 흰 여우를 발견하고 즐거워하던 루이반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만큼 레이의 체력은 한계에 닿아 있는 상태였다.

‘몰이꾼이 다 몰아 주며 하는 사냥이 이렇게 힘들어도 되는 겁니까? 난 열심히 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레이가 달려가 몸을 날리듯 자세를 잡고 다시 석궁을 겨누는 순간 남자들의 굵직한 목소리가 뒤엉켜 들렸다.

“으앗!”

“엇!”

“어억!”

“무슨 일이야?”

레이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묻자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

나무 숲속에서 낯익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그스너 영애?”

그리고 숲에서 여우를 몰던 남자들이 우르르 뒤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루이반의 기사 둘과 엘 그리고 마그스너 문장을 가슴에 달고 있는 남자 넷.

“영애, 혹시 흰 여우 잡는 중인가요?”

“예. 사냥감을 발견해서……. 공작 부인께서도 흰 여우를 쫓고 계셨습니까.”

같은 사냥감을 두 팀이 쫓고 있었다. 어쩐지 인근에서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 했더니 마그스너 가문이었던 모양이다.

‘실력이 수준급인가. 어쩜 저리 처음 출발할 때랑 달라진 게 없지?’

바닥에 무릎을 딛느라, 바위에 오르느라, 여러 가지 이유로 꼬질꼬질해진 레이와 달리 케이틀린은 비교적 멀끔한 차림새였다.

“영애와 내가 서로 같은 걸 원하는 모양입니다. 양보 같은 건 사치니 각자 열심히 하죠.”

레이는 최대한 호흡을 다스리며 여유 있는 척 말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케이틀린이 멀찍이 레이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자신의 몰이꾼들을 불러 모았다.

레이도 케이틀린에게 보이지 않게 뒤로 돌아서며 앞으로 다가온 세 사람에게 물었다.

“여우는?”

“기척이 많아서인지 나무 숲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쫓을 수 있겠어? 저쪽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는 있고?”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표물이 같다 보니.”

“저쪽의 몰이꾼들은 전문 사냥꾼이더군요.”

숲에서 여우를 쫓다 만난 몰이꾼들은 사냥에 최적화된 몸놀림을 보였다. 아마도 말로만 몰이꾼인 저들이 짐승을 다 잡아 바치고 그들의 주인은 기꺼이 승리를 얻어 낼 것이다.

사냥제는 처음인 데다가 2부가 이런 분위기인지 전혀 몰라 마님만 고생시킨 것 같아서 네 사람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죄송합니다. 마님. 저희가 잘 몰라서 이런 실례를 범했습니다.”

“응? 뭐가? 뭘 모르고 뭐가 미안한데?”

갑작스러운 사과에 레이는 어리둥절했다.

“마님은 그저 여기 편히 계십시오.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흰 여우를 꼭 잡아다 드리겠습니다.”

대강의 설명으로 레이는 케이틀린의 옷차림이 말끔한 이유와 전년도 1위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았다.

백날 대신전에서 신체 수치를 측정하면 뭘 하나. 정작 주변인들이 능력자였는걸. 허무한 일이었다.

‘라미엘도 이건 몰랐나 본데.’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사람 잡는 맹훈련을 해 줬을 리 없다.

“아니. 여태 배운 게 아까워서라도 내가 잡을래. 그딴 게 뭔 1등이야. 난 꼴등 하더라도 내 손으로 잡을 거야.”

“아이고, 우리 마님.”

“아이, 안 다쳐. 나 지금까지 생채기 하나 안 났어. 봐.”

저들의 염려를 잘 알고 있지만 상처 없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조심할게. 내 곁에 너희가 있는데 무슨 큰일이 나겠어. 나 안 지켜 줄 거야?”

“그럴 일 없습니다.”

“지켜 드려야지요!”

“그게 저희들 임무입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루이반의 다섯 명은 간단히 작전 회의를 하고 씩씩하게 전진했다.

흩어지는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조금씩 푸른 하늘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

“마님!”

“아가씨!”

경악에 찬 비명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아아악! 안 돼!”

허디와 눈을 마주쳤던 게 마지막이었다.

콰드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레이와 케이틀린이 한 덩어리가 되어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두 사람의 행방은 요란한 흙먼지 속으로 사라져 눈으로도 좇을 수 없게 되었다.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사냥제 단둘뿐인 여성 참가인들의 실족.

심지어 그 둘은 루이반 공작이 애지중지하는 아내와 사교계의 왕이다.

여러모로 파장이 어마어마하게 클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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