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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3화 (53/160)

53화. 사냥제 (3)

인간이 정해 놓은 구역은 짐승들에겐 아무 소용 없는 표식이었다. 푸른 리본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인간들이나 아는 표시이지, 짐승들은 자유로이 돌아다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망각을 했다.

흰 여우를 쫓아 달리던 중 몰이꾼들은 여우보다 더 큰 개체의 존재를 눈치챘다. 금빛 리본이 달려 있을 곳에나 존재할 늑대였다.

마님의 안전을 위해 늑대를 처치하려던 셋은 늑대의 특성을 생각하며 멈칫했다.

무리 동물.

급히 주변을 확인해 보니 늑대 발자국들이 수도 없이 보였다.

근처에 있던 마그스너 가문의 몰이꾼들도 바로 알아차렸다. 서로 짠 것처럼 몰이꾼들은 한데 뭉쳤다.

“늑대 무리, 맞습니까.”

“예에. 확실합니다.”

“기척을 보니 이리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쪽 영역에서 쫓겨 내려온 것인지 먹잇감들의 기척을 느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늑대 무리가 인간들을 공격하려 한다는 건 아주 잘 알았다.

루이반 가문과 마그스너 가문에 비상이 걸렸다. 사냥꾼인 마그스너 몰이꾼들의 지휘 아래 루이반도 착착 늑대 맞이 준비를 했다.

“동물 사냥은 좀 해 보셨습니까. 보아하니 그쪽들도 전문인 거 같은데.”

마그스너 몰이꾼들이 한마디만 해도 척척 알아서 열까지 다 준비하는 루이반 몰이꾼들에게 물었다.

“아아. 동물이라기보단 예전에 마물이나 좀 잡아 본 게 전부라.”

“마, 마물? 설마 그쪽들…….”

동물 사냥이 처음이라고 하지만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서 전문 훈련을 잘 받은 초보 사냥꾼인 줄만 알았더니 마물 토벌을 나섰던 기사였다는 말이다.

“신분 얘긴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럽시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님과 영애가 다치지 않게 보호까지 해야 하기에 마음은 더 초조했다.

“늑대 무리라고?”

“예. 마님과 영애께선 걱정 마시되, 제 곁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케이가 검을 뽑아 들며 두 사람을 보호하듯 앞에 섰다.

“히에엑!”

먼저 정찰을 나섰던 마그스너 가문의 몰이꾼 한 명이 사색이 되어 나타났다.

“큰 무리예요! 우리 수로는 못 당해!”

예닐곱 마리 정도가 아니라 열다섯이 넘는 거대 무리였다. 아무리 전문 사냥꾼에 토벌전 출신 기사가 있더라도 사람 둘을 지키면서 해치우기에 무리가 있는 수였다.

순식간에 공포감이 엄습했지만 늑대를 피해 도망가기엔 이미 늦었다. 여간해서 이리 낮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는 늑대인데 흰 여우에 정신이 팔려 흔적을 너무 뒤늦게 발견하고 말았다.

“크르르르.”

선두에 매서운 눈빛을 한 리더 늑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왜 막연히 늑대를 대형견만 한 크기라고 생각했을까.

괜히 맹수가 아니었다.

거대한 네 발 짐승이 사람 무리를 가늠하듯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그 후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수십의 늑대가 덤벼들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열악한 상황에 마냥 보호만 받을 순 없어 레이도 석궁을 마구 쏴 댔다.

라미엘이 왜 기본 동작만 수백 번씩 계속 알려 줬는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반면에 몸은 그간 습득한 자세를 잡고 매뉴얼처럼 움직였다.

하체에 힘을 주어 무기가 흔들리지 않게 몸을 단단히 먼저 고정한 뒤에 잠시 호흡을 멈추고 쏜다.

“꺄아악!”

옆에서 죽을 듯 비명을 지르고 있는 케이틀린의 목소리가 거슬리지도 않을 정도로 집중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생에 없던 집중력이 발휘되었다.

“훈련이 지옥이라야 실전에서 지옥을 피해 갈 수 있으니까요.”

라미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거였구나.

그의 지옥 훈련이 처음으로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마님!”

“피하십시오!”

레이와 케이틀린이 있는 뒤쪽 수풀이 요란하게 움직이더니 커다란 늑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람 무리 중 가장 약한 이가 누군지 알고 애초부터 기척을 숨기고 숨어 있던 영악한 놈이었다.

곁에 있던 케이가 막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늑대가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아악!”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레이는 하얗게 굳어 그저 비명만 지르는 케이틀린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몸을 굴렸다.

두 사람의 몸 위로 늑대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둘 중 하나의 신체가 늑대 입 속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살았…….”

수풀 너머는 절벽이었던가.

넘어진 몸 뒤로 바닥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깨닫는 순간 두 사람의 몸은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악!”

“꺄아악!”

나뭇가지에 크게 한 번 턱 걸린 몸이 사정없이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허디의 놀란 눈을 본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후로 레이는 케이틀린과 비명도 못 지르고 여기저기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툭툭 걸려 가며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갔다.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레이가 정신을 차렸다.

“허으…….”

살아 있는 게 자각되자마자 길게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케이틀린은 어디 있지?

같이 굴러떨어졌으니 그녀도 분명 근처에 있을 터였다.

레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절벽을 구르느라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뻐근하게 아팠으나 부러지거나 터진 곳 없이 타박상 정도에 그친 듯했다.

두 사람이 구른 곳이 천만다행하게도 바위가 아니라 흙 절벽이었고 중간에 나무에 몇 번 걸린 것도 충격을 완화하는 데 한몫했다.

“끄으윽. 어후, 아파.”

후드득. 퉁.

그 순간 무언가가 레이의 발치에 뚝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는데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서, 석궁, 석궁이구나.”

같이 추락한 모양인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레이의 석궁이 주인을 찾아오듯 발치로 떨어졌다.

“어후우, 씨이. 깜짝이야. 짐승이라도 뛰어나온 줄 알았네.”

허리에 매어 둔, 여분으로 챙겨 왔던 탄과 촉은 보이지 않았다. 떨어질 때 충격으로 몸에서 떨어져 나간 듯했다.

레이는 석궁을 챙겨 들고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부서진 곳은 없는 듯했다. 탄과 촉을 장착하는 곳을 열어 보니 안에는 탄 다섯 발, 촉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지켜 줄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석궁이라도 구해서 다행이었다.

혹시 주머니에 뭐라도 쓸 만한 게 있나 재킷을 뒤져 보는데 의외의 물건이 잡혔다.

“어? 이건 왜 여기 있어?”

르아넬로에서 들고 왔던 빈 마력석이었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걸 깜빡하고 세탁을 넘겼더니 빨래방 하인들이 세탁하고 그대로 다시 넣어 둔 모양이었다.

“중요한 건 줄 알고 그대로 뒀나 보네.”

급할 땐 이거라도 필요할지 모른다. 레이는 마력석을 다시 주머니에 잘 집어넣어 두었다. 그리고 추가로 돌멩이보다는 큰, 작은 돌덩이 몇 개도 주머니에 챙겨 넣은 뒤 석궁을 메고 큰 소리로 기사들을 불러 보았다.

“케이! 엘! 톰! 허디!”

몇 번을 외쳤지만 커다란 산은 삽시간에 레이의 목소리를 삼켰다.

애타게 이름을 부르던 레이는 기사들을 포기하고 같이 구른 케이틀린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그스너 영애! 영애, 어디 있어요?”

케이틀린마저 잃어버린 건 아닐까, 혹시 저와 달리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을 무렵.

“저 여기 있어요. 공작 부인!”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오른편 수풀 쪽에서 들려왔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쉰 레이가 크게 소리쳤다.

“어디 있어요? 내가 갈 테니까 소리 좀 계속 내 줘요!”

“이쪽이요! 여기로 오세요!”

목소리를 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가지와 수풀이 어지러이 뒤엉킨 곳에 눈물범벅인 케이틀린의 모습이 보였다.

절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오른팔을 감싸 쥐고 있던 그녀는 레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겨우 참고 있던 설움이 복받친 듯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흐아아앙.”

정말 너무 무서웠다. 케이틀린은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일은 처음 겪었다.

짐승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고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일 같은 건 당연히 케이틀린이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작년처럼 몰이꾼들이 잡아온 짐승에 자기 검으로 슬쩍 상처를 내고 사냥제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늑대 떼에 추락이라니.

처음엔 너무 놀라서 무서운 것도 몰랐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오른팔에선 피가 철철 나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음침하게까지 보이는 숲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고 이대로 정신을 잃고 싶었다.

‘그 누구든 빨리 와서 날 좀 구해 줘!’

케이틀린이 패닉으로 접어들기 직전에 들린 레이의 목소리는 그녀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는 듯했다.

레이는 제 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우는 케이틀린을 달래느라 무서운 내색을 할 틈도 없었다.

이제 열여덟이라고 했던가. 온실에서 크는 화초처럼 곱게만 자라 온 어린 친구가 겪기에 지금 일은 심히 험악하긴 했다.

물론 역시나 온실 화초 인생인 레이에게도 지극히 험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제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해 봤고, 조금 더 어른이라고 케이틀린보다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 둘 다 패닉에 빠지면 그게 가장 위험한 일일 것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많이 아파요? 어디 다친 거예요. 부러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흐윽, 여기요.”

어느 정도 진정된 케이틀린이 레이의 질문에 오른팔을 슥 들어 보였다.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옷자락이 쭉 찢어졌고 그 사이로 벌겋게 터진 상처가 보였다.

“여기 말고 다른 데는?”

“온몸이 막 아파요.”

“그건 나도 그래요. 다행이다. 크게 다친 데는 없어서.”

레이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팔에 이렇게 심하게 상처가 났는데 어떻게 크게 다친 데가 없다는 거지?’

그러나 케이틀린이 의아해할 틈도 없이 레이의 말이 이어졌다.

“뼈가 부러졌거나 내장이 터졌음 벌써 죽었을 거예요. 이 정도면 우리 운이 아주 좋은가 봐요.”

너무나도 충격적인 표현에 그녀는 속이 싸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뭐가 부러져? 뭐가 터져?’

레이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다친 케이틀린의 팔을 감쌌다. 피가 계속 나니 뭐라도 감아 둬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한편, 케이틀린은 레이가 울거나 떨지도 않고 침착하게 자신을 위로하고 주변을 탐색하는 모습에 놀랐다.

“고, 공작 부인은 어떻게 이렇게 평온하신지 모르겠어요.”

“평온은요. 나도 아까 죽는 줄 알고 진짜 무서웠어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지금도 무서워요.”

“하나도 안 그래 보이시는데…….”

“아까 봤던 제 가솔들이 분명 늑대들을 잘 수습하고 우릴 찾고 있을 걸 아니까 조금 침착한 거지 겁나는 건 같아요.”

“어떻게 그걸 확신하세요? 그들이 부인을 찾을 거라는 걸?”

“응? 당연한걸요. 우리 기사들 저 엄청 좋아해요.”

가문의 기사니 당연히 목숨 걸고 마님을 사수해야 하는 사명이 있지만, 이런 대외적인 이유를 배제하고라도 레이에게는 기사들이 반드시 자신을 찾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라미엘 밑에서 훈련하며 쌓아 온 동지애가 있지 않던가.

“기사요? 설마 부인께서 데리고 있던 분들, 몰이꾼이 아니라…….”

“네. 루이반 기사들이에요.”

루이반 공작이 아내 아끼는 거야 유명하다지만 하다 하다 이젠 사냥 놀이 나가는 데 기사까지 붙여 주다니. 놀람의 연속이었다.

“영애, 웬만하면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고 싶은데, 여긴 영역 표시도 안 보이고 근처에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우릴 찾기 힘들 것 같아요.”

“네? 그럼 어떡해요?”

“영역 푯말이 있는 곳이나 파란 리본 영역까지 가야 할 것 같은데. 걸을 수 있죠?”

레이 본인도 지금 이 상황이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케이틀린이 얼이 빠져나간 얼굴이라 이쪽이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후우. 레이알렉시스, 정신 바짝 차리자. 영혼 빠진 고딩이 뭘 하겠다고. 어른이 나서야지 어쩌겠냐.’

위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해지고 위험한 짐승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우리 아래쪽으로 조금만 내려가 봐요.”

푸른 리본 표식을 찾아 두 사람은 조심조심 아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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