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4화 (54/160)

54화. 사냥제 (4)

조금씩 주변이 어두워졌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어두워지는 게 아니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빠르게 채우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르릉, 하는 작은 천둥소리도 들렸다.

이곳의 따뜻한 기온을 고려하건대 조만간 이 워크산에 찾아올 건 눈이 아니라 비였다.

비라도 내리면 수색은 더 힘들어진다. 시야가 좁아지고 사람들이 찾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불어 바위가 많은 산이기에 자칫 젖은 바위를 잘못 디디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미끄러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이쯤이면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제법 많이 걸어 내려온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파란 리본은커녕 영역 표시도 보이질 않았다.

날씨마저 이 모양이니 아무리 평정을 찾으려 해도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레이는 짜증을 꾹 눌러 참으며 발에 걸리는 돌을 걷어찼다.

“무식하게 크기만 한 이놈의 산 때문에 돌겠네, 진짜.”

적당히 커야 할 거 아냐, 적당히.

케이틀린이 겁을 더 먹을까 봐 꾹 참아 왔던 불만이 둑 터진 것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돌아가면 헤덴 예하한테 성력으로 워크산 다 불태워 버리라고 요청드릴 거야.”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이 무서움과 빡침을 고려한다면 이런 요청 정도는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예하를 만나 뵌 적이 있으세요?”

“이전에 잠깐 뵈었었어요. 아, 작년도 사냥제 우승자니까 영애도 만났었겠네요.”

내내 무서움에 떨고 있는 와중에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되자 두려움이 조금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네. 기도는 예하께서 직접 주관하시니까요.”

“헤덴 예하 외모랑 말투가 너무 차이 나지 않나요?”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은 조난 후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얼굴은 라미엘 님 뺨치게 생겼는데 말투…….”

여느 십 대같이 조잘거리던 케이틀린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실수였다. 루이반 안주인 앞에서 루이반 공작을 입에 올리다니. 너무 무서워서 잠깐 정신을 놓은 게 분명했다.

“저, 저기, 공작 부인. 죄송…….”

“흐음. 마그스너 영애는 귀염상 좋아하는구나?”

“네. 그쪽이 좀 더 울리, 네에에?”

술술 이야기하다가 실수를 인지하고 다급하게 마무리하려는 케이틀린이 귀여워서 레이가 먼저 판을 깔았다.

“난 사실 결혼 생각이 없었거든요.”

케이틀린은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결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수도에서 태어난 귀족이라면, 여자라면 더 그랬다. 아무리 레이가 평민 출신이라고 해도, 르아넬로 가문 수준이면 인정하긴 싫어도 귀족이나 다름없을 정도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혼자서 좋아하는 일이나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케이틀린은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혼자, 좋아하는 일.’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여자가 혼자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는 건 이상하고 괴상하고 특이하고 말도 안 되는데.

……마음이 끌리는 소리였다.

“그런데 남편 만나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 그렇죠. 아무래도 루이반 공작님이 워낙 다방면으로 출중하시니…….”

두근두근.

쿵쿵대던 케이틀린의 심장이 조금 평온을 찾았다.

역시 그렇지? 저게 맞는 거지.

케이틀린이 다시 발을 움직였다.

“음. 배경도 배경이지만 공작님 외모가 정말 대단하긴 하죠. 그런데 그런 것들 말고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어떤 이유이신지 여쭤도 될까요?”

“공작님은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대로 살게 해 준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약속을 하다 못 해 계약서까지 확실하게 적어 놓은 사이였다.

“자, 그래서 우리 마그스너 영애께선 어떤 분이 마음에 있으신지?”

눈높이에 있는 나뭇가지를 똑 부러뜨리며 레이가 물었다.

“전 절대로! 진심으로 정말 절대! 루이반 공작 각하께 마음이 있었던 적 없어요!”

“네. 알아요. 전혀 마음 없어 보였어요.”

둘 사이에서 혼담이 오갔으면 자신이 뭘 하기도 전에 진작 게임이 끝났을 것이다. 라비던 1순위 결혼 상대자들이었으니 혼담의 ‘호’ 소리만 나왔어도 진행이 되었을 터였다.

“……저는.”

“혼자서 좋아하는 일이나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레이가 방금 전에 비밀 같은 속마음을 털어놓은 게 생각났다.

케이틀린은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조금 드러내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좋지 않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진 것인지, 상대방이 먼저 속을 털어놔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말을 하고 싶어졌다.

“저는 강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강하지 않은 사람이요?”

“제가 울려도 되는 남자요. 내가 하는 말에 무조건 넙죽하고, 고분고분하게 살 사람을 원해요. 아, 울 때 눈가가 좀 빨개지면 더 좋겠다.”

술술 터져 나온 케이틀린의 본심에 레이는 크게 놀랐다.

‘뭐야, 이거. 고분고분? 울 때, 라고? 심지어 눈가가 빨개져?’

반면에 레이의 표정을 본 케이틀린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너무 당황해서 케이틀린은 수습할 말도 생각해 내질 못했다. 그저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려 대는데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케이틀린 영애,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배운 사람이네요.”

“예?”

“좀 처연하게 눈물 뚝뚝 떨구면, 어휴. 맞아. 울리는 맛이 또 보통이 아니지.”

공작 부인 손에서 또 나뭇가지가 똑 부러져 나갔다.

“고, 공작 부인?”

“응? 왜애. 이거 아니에요? 내 말대로 다 하면서 가끔 앙탈 부릴 때 확 울려 버리고 싶은.”

“어, 어떻,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책에서 배웠답니다.

한국 생활에서 뒤늦게 비엘에 입문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한글을 떼자마자 시작했어야 했는데.

키워드 안 가리고 온갖 걸 다 먹었지만, 그중 제일은 울보였다. 너무 좋아서 울어 버리면 독자인 내가 더 좋지요.

“……하. 내 남편은 절대 그런 재밌는 일이 없겠네.”

라미엘이 보통 매운맛이어야지. 아, 매운맛이 울면 진짜 더 맛있는데.

그런데 어떠한 경우를 대입해도 라미엘이 우는 건 상상조차 안 됐다. 매운맛도 어느 정도 여지가 좀 있어야 하나 보다.

“영애가 착해서 그보다 더 순한 사람 찾기가 어렵겠어요.”

“전혀요. 울리려면 독하게 나가야죠. 밖에선 세상 착한 양인데 집에 돌아와서 남편 울리고 있다고 상상하면 짜릿해요.”

캬. 케이틀린 정말 진국이다. 제대로 배웠네, 제대로 배웠어.

“밖에선 착해야 해요. 그래야 내 뜻대로 살기 편하니까요.”

케이틀린의 또 다른, 남자 취향보다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듯한 진심이 꺼내졌다.

착하다는 이미지가 쌓이면 사람들은 알아서 선한 방향으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그러면 같은 짓을 해도 욕을 먹지 않을 선이 남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진다.

사람을 부리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선량한 듯, 해맑게 웃으며 너를 위한 일이라는 한마디만 하면 뭐든지 다 해결되었다.

이 좋은 껍데기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긴 하지만 그에 비해 이점이 훨씬 많으니 괜찮은 투자인 셈이었다.

“마그스너 영애가 원하는 뜻은 뭔가요?”

‘밖에선’ 착하다는 건 본인은 그리 착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지난 티파티에서 케이틀린에게 어렴풋하게 느낀 감정이 선명해졌다.

“……잘 모르겠어요.”

남들의 시선에 비치는 내 모습을 따로 가장해야 하는 사람에게 느낀 동질감이었다.

레이알렉시스는 마녀로.

케이틀린은 천사로.

자신의 세계를 위해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이런 저는 역시 이상한가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속 시원한 얼굴을 하며 케이틀린이 물었다.

여기서 이상하다고 대답해도 케이틀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혹여 그녀의 실체에 대한 소문을 내도 천사 이미지에 가려 저만 우스운 꼴이 될 테니까.

“뭐가 이상해요? 내 질문이 좀 별로였네요. 뜻,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살아 봐야 아는 건데.”

레이는 케이틀린이 이상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어떤 열여덟이 자신의 뜻을 알고 그 길을 찾아가겠는가. 이 시기에 다들 약혼이나 결혼을 하니 한 번도 어리다고 생각된 적이 없던 것이다.

하지만 십 대는 많이 어린 나이였다.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하고 어른이 되기 위해 자신의 것들을 쌓아야 하는 시기라는 걸 레이도 한국에서 배우고 왔다.

“마그스너 영애는 이상하지도 않고, 조급해할 것도 없어요. 길을 찾기도 전에 무언가를 선택하지 말아요.”

밖에서 착한 척을 해야 쉽다는 걸 벌써부터 깨닫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야무지게 제 앞가림 잘할 것 같지만, 그래도 언니로서의 오지랖이 발동되었다.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은 예상 못 한 응원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공작 부인.”

“네.”

케이틀린이 울 듯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부끄러운 것 같은 얼굴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 돌아가면 부인과 티파티 하고 싶어요. 단둘이서요.”

갑자기 피아나가 생각났다면 무슨 뜻이려나.

레이는 작게 웃었다.

“그래요. 언니랑 둘이서 티파티 한번 하자.”

대화를 마치자마자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렇게 찾아 헤매던 영역 표시 푯말과 리본이 보였다.

“공작 부인. 저기, 리본처럼 펄럭이는 게 보여요!”

케이틀린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정말 구역 이름이 박힌 푯말과 리본이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지려는 찰나.

“……저거.”

뒷목이 뻐근해지는 게 긴장이 풀리려는 건지 더 긴장을 해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금빛 리본이 펄럭이고 있었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