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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5화 (55/160)

55화. 사냥제 (5)

워크산은 워낙 방대하다 보니, 마물이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 외에는 아직도 파악 못 한 부분이 많았다.

다만, 깊은 곳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짐승 말고 특이 동물도 있다고 했다. 마물 못지않은 짐승이. 우리가 익히 아는 상위 포식자들마저 그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마 여간해서 파란 리본이 있는 구역까지는 내려오지 않을 늑대들이 무리지어 밀려온 걸 보면 무언가에 쫓겼다는 게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뛰어요!”

“아아악!”

표시된 영역을 보면 금빛 리본이 막 시작되는 구간이었다. 금빛 중 가장 낮은 구역이며 파란 리본의 근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금빛 리본을 보자마자 곰을 만나다니. 아까 만났던 늑대 무리처럼 곰도 푸른 리본 구역까지 내려왔다는 말이 된다.

야생에서 만났을 때 가장 위험한 짐승이 곰이라 했다. 미련 곰탱이란 말과 달리 머리가 좋은 이 짐승은 달리기도 몹시 빠르며 나무도 잘 타고 수영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곰을 만났을 때 할 일은 90도 인사라고 했던가. 머리부터 먹혀서 고통 없이 가는 게 최선이라고. 이딴 말이 생각났지만 일단은 살기 위해 발버둥은 쳐 봐야 했다.

‘티파티 약속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죽기 살기로 도망치던 둘은 눈앞에 나타난 벽처럼 거대한 나무에서 갈라섰다. 누구 한 사람이 곰을 유인하고자 나눠 달린 게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해 각자 눈에 보이는 길로 달려 나간 것이었다.

“허억, 헉!”

끔찍한 사실은 그 와중에 곰이 레이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조금 지나면 다시 만나겠지만 잠시라도 혼자가 되어 곰에게 쫓기고 있다는 점은 정말 끔찍했다.

“으앗!”

뒤에서 곰이 쫓아오는데 발이 걸려 넘어졌을 때의 심정을 서술하자면.

‘나 죽는구나.’

다시 벌떡 일어나 달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인생 주마등이나 곧 보겠거니 하는 자포자기의 생각이 들었을 때.

“의외의 허점을 찾을 수도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해요.”

“무기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손 똑바로 안 합니까!”

훈련받으면서 라미엘한테 혼났던 것만 떠올랐다.

“……기가 막혀서 정말.”

그와 동시에, 어이없게도 죽기 전까지 발버둥이나 쳐 보겠다는 의지가 솟아났다.

최대한 반동이 없도록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고 레이가 석궁을 겨눴다. 곰의 움직임에 변칙이 없어 다행이었다.

‘남은 탄은 다섯 발, 촉은 두 개.’

탕! 탕! 탕!

세 발은 빗나갔고 남은 두 발이 곰의 앞다리를 맞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푹 고꾸라진 곰이 울부짖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곰이 넘어지자마자 레이는 남은 촉 두 발을 모두 곰의 정수리에 날렸다. 한 발은 곰의 볼을 스치고 날아갔지만 남은 한 발은 제대로 꽂혔다.

“돼, 됐다……!”

아무리 촉의 강도가 더 세다고 해도 석궁은 레이가 감당할 수 있는 역량에 맞춘 무기였다. 커다란 곰 같은 걸 죽일 만큼의 살상력이 없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번 것일 뿐.

“빠, 빨리, 빨리 가야……!”

잠시라도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곰이 벌겋게 핏대가 선 눈으로 광분해 더 빠르게 날뛰기 시작했다.

‘진짜 끝이구나.’

레이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크아아아!”

괴성을 내며 달려오는 곰을 보며 레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고통 없이 갈 수 있기를.

쿵.

감은 눈앞으로 무언가가 쓰러지면서 일으킨 바람이 느껴졌다.

“레이?”

그리고 아주 잘 아는 목소리도 들렸다. 레이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서서히 눈을 떴다.

“……라엘.”

덜덜 떨리는 몸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닿았다.

그 후론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이 들어요?”

오래 지나지 않아 레이가 눈을 떴다.

대체 왜 레이가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도 없이 홀로 1부 구역까지 들어온 것, 옷차림이 심하게 더러운 걸로 봐선 분명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엘. 진짜 라엘 맞죠?”

레이는 자신이 라미엘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윽.”

그간 잔뜩 쌓였던 긴장이 확 풀리면서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도 몰려왔다.

레이는 라미엘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그의 허리를 꽉 껴안고 품 안에서 엉엉 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어색한 손길로 등을 토닥이던 라미엘은 레이의 통곡이 잦아들자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게…….”

눈물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레이는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흰 여우를 쫓다 만난 늑대 떼, 절벽에서 추락하고 곰을 만나기까지.

품 안의 레이가 다시 달달 떠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제법 다정해진 손길로 라미엘이 다시 그녀의 등을 토닥여 달랬다.

“…….”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레이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화를 참기 위해 그는 이를 사리물어야 했다.

‘늑대고 뭐고, 지켰어야지. 감히 이 꼴을 만들다니.’

그들은 같이 절벽을 굴러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레이 곁에 있어야 했다.

“레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라엘, 화났어요?”

라미엘은 대답 대신 레이의 몸을 가볍게 더듬어 보며 물었다.

“다친 곳은? 아픈 데 있습니까?”

“온몸이 다 아파요.”

“아픈 몸으로 잘 버텼군요.”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제자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싸웠다. 라미엘이 곰을 쉽게 해치울 수 있었던 건 레이가 쏜 촉에 맞아 녀석의 힘이 조금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진짜. 너무 무서웠는데.”

레이는 여전히 라미엘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는 상태였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주마등이 보인다는데 난 훈련 때 라엘한테 혼난 것만 생각이 나더라고요.”

기분이 극저점을 내리찍고 있는데 레이의 말에 한순간에 평점으로 끌어올려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쐈어요.”

라미엘이 레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닦아 냈다.

“루이반 기사들이 마님의 절반만 닮았어도 가르치는 데 재미가 있을 겁니다.”

“……칭찬이죠?”

사냥제 이후 처음으로 레이가 활짝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에 라미엘은 혹시나 트라우마가 남진 않을까 하던 불안이 가셨다.

“이제 움직일까요.”

사위는 빠르게 어두워지는 중이고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산은 해가 빨리 진다. 그런데 비까지 몰려오고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라엘, 잠깐만요. 케이틀린 데려가야 해요.”

도망은 잘 갔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혹시 자신이 잠시 기절한 사이에 다른 위험한 짐승이라도 만나진 않았는지 걱정이 됐다.

“나한테는 당신이 있지만 그 영애는 지금 많이 무서울 텐데. 빨리 가요.”

“레이가 말한 방향이라면 기사들이 있어요.”

“진짜예요?”

“내려오는 길에 기사들을 만났습니다. 아마 영애도 당신이 날 만났다는 소릴 들었을 겁니다.”

라미엘에겐 케이틀린이 간 곳에 기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마그스너 영애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눈앞의 레이에게 난 상처들만이 문제였을 뿐.

만약 반대편 길에 기사들이 없었다면 레이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케이틀린을 찾으러 가겠지만, 레이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 역시도 무신경했을 것이었다.

멀리서 부우, 하고 나팔 소리가 들렸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울리는 신호로 저 소리가 들린다면 사냥은 즉각 종료하고 돌아가야 했다.

두 귀부인의 실족 사실이 사냥제 진행 측에 알려진 듯했다. 케이틀린이 누군가를 만나서 현재 상황을 전달했다는 확실한 증표였다.

“다행이다. 진짜, 정말 다행이다.”

레이가 다시 눈물을 훌쩍이며 라엘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가요.”

레이는 어떻게든 저와 닿아 있으려고 했다. 그동안 그녀가 느꼈던 불안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되는 듯했다.

“이리 와요.”

“네? 엇.”

라미엘이 레이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훌쩍 들린 레이가 자연스레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프다면서 왜 평소처럼 칭얼댈 생각은 안 합니까.”

힐난하는 어조도 아니었고 평소 같은 평이한 말투도 아니었다.

라미엘이 하는 말은 다정했다. 심장이, 마음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부드러워서 어쩌질 못하겠는 그런 심정에 레이는 그를 더 꼭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미엘한테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너무 뛰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라미엘은 근처에 묶어 놓았던 말 위에 레이를 태우고 방금 사냥한 곰의 목을 베어 냈다.

“으으윽. 그걸 왜…….”

“사냥한 건 챙겨야죠.”

“알뜰하시네요.”

“아까 잡은 곰 한 마릴 뺏겨서요. 마침 하나가 더 생겨 다행이네요.”

“그럼 지금까지 곰 두 마릴 잡은 거예요?”

이 남자 대체 뭐야. 아무리 마물 토벌을 하다 왔다지만 어떻게 사람이 혼자 곰을 두 마리나 잡아?

“잠깐만. 뺏겨요?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남의 사냥감을, 그것도 루이반 공작 걸 뺏었대?”

“내가 루이반 공작인 걸 모르는 녀석이요.”

라미엘이 대답을 하며 말에 훌쩍 올라탔다.

“그런 사람이 사냥제에 참가를 했어요? 별일이 다 있네.”

“……그러게요.”

라미엘이 망토를 벗어 레이의 어깨를 감싸 준 뒤, 자신에게 기대게 한 다음 천천히 말을 몰았다.

추운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라미엘이 망토를 둘러 주자 냉한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도는 게 느껴졌다.

‘이제 다 끝났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에 레이는 좀 더 깊게 라미엘에게 몸을 기댔다. 석궁을 배울 때처럼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자 까맣게 잊고 있던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살 만한가 보다. 그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민망한 감정에 레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흠흠. 워크산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난 분명 내려가고 있었는데 왜 1부 구역이지?”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무조건 하산하는 건 아닙니다. 오르는 중에도 내리막길이 나오고 내려가는 중에 오르막길이 나오기도 합니다.”

“……뭔 길이 그 따위야.”

인생에서 산이라곤 유주랑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까미 산책시키러 갈 때나 가 봤지, 이럴 줄 알았나.

“다신 산 안 탈 거예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요란하게 천둥이 울렸다.

“푸르르.”

소리에 놀란 말이 걸음을 우뚝 멈추며 투레질을 했다.

“레이, 괜찮아요?”

말보다 더 놀란 레이가 품 안에서 움찔 굳은 게 느껴지자 라미엘이 그녀를 토닥이며 달랬다.

씩씩하던 레이가 계속 겁을 집어먹는 걸 보니, 차라리 자신이 2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참여할 생각도 없었던 사냥제인데 레이가 참석하겠다면 자신은 몰이꾼 역할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랬다면 레이가 털끝 하나 다칠 일 없이 무사히…….’

거기까지 생각하던 라미엘은 당혹스러웠다.

‘내가 곁에서 상처 하나 없이 레이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 한다고?’

번쩍. 콰쾅!

그 순간 벼락이 눈앞에 내리꽂혔다.

“히히히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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