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사냥제 (6)
벼락을 맞은 땅이 탄내를 풍기며 검게 그을렸고, 놀란 말이 앞발을 들고 몸을 비틀어 대며 난동을 부렸다.
“꺄아악!”
라미엘이 레이를 품에 꽉 껴안고 말 위에서 추락했다.
방심하자마자 이번엔 벼락에 낙마다. 놀란 말은 땅을 박차고 달려 도망가 버렸고 레이는 라미엘의 품 안에서 숨을 헐떡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라엘!”
라미엘이 빠르게 감싸지 않았다면 자신은 저 멀리로 튕겨 나가 크게 다쳤을 것이다. 단단한 품 안에 완전하게 보호되었지만 맨땅에 추락한 라미엘이 걱정되었다.
“라, 라엘, 라엘, 괜찮아요?”
“레이는요?”
“전 당연히 괜찮죠. 라엘이야말로 다친 곳 없어요? 어떡해.”
레이가 빠르게 라미엘의 품을 벗어나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치지 않았어요.”
라미엘도 몸을 일으켰다.
레이는 안심이 안 되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미엘이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나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안 다친 거 정말 맞는 거지?”
“말이 멈춰 있던 터라 다행입니다.”
라미엘이 일어나서 레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친 곳이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걸어가야 할 것 같은데. 레이, 걸을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내 걱정 말고 우리 빨리 여기 벗어나는 것만 생각해요.”
이 모든 것들이 레이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흙투성이 몸을 씻어 내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다.
주변은 이제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바람이 스산하게 수풀을 스치고 작게 천둥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쾅!
“깜짝이야.”
벼락이 또 근처에 떨어졌다.
레이는 이제 아예 라미엘과 하나인 수준으로 그에게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라엘, 우리 언제 도착해요. 왜 아무리 걸어도 안 나와.”
체감상으론 몇 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산속인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 뒤돌아서 걸어온 길을 한번 봐요.”
뒤를 도니 좀 전에 지나친 나무가 민망할 정도로 너무 가까이에서 보였다.
“……헤헷.”
투둑.
멋쩍게 웃음을 내보인 순간, 레이의 어깨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서둘러야겠군요.”
빗방울을 본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졌다.
“지금 속도, 당신에게 좀 빠르지 않나요?”
“아뇨, 이 정도면 충분히 갈 수, 라엘!”
레이를 신경 쓰며 걷느라 라미엘은 정작 자신의 발밑은 확인하지 못했다. 짙은 수풀에 반쯤 가려진 구덩이에 발이 빠진다고 느끼자마자 그의 온몸이 쑥 아래로 꺼졌다.
“안 돼!”
경악한 레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미엘의 몸에 깔린 풀 더미가 사라지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바닥에서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간신히 붙잡은 라미엘의 손이 보였다.
오늘 하루 겪은 여러 사건 중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다.
늑대 무리를 만났을 때보다, 절벽에서 추락했을 때보다, 광분한 곰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들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몇 배는 더 끔찍했다. 자신이 겪은 인생의 모든 일을 다 합쳐 단연코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레이는 몸을 날리듯 바닥에 엎드린 뒤 라미엘의 손목을 꽉 잡았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말도 안 돼. 라미엘은 절벽 위로 올라올 거야. 이대로 떨어질 리 없어.’
라미엘을 잡고 있는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렸다.
‘침착하자. 이렇게 떨다가 라엘의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절대 안 돼.’
레이는 최대한 숨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했다.
라미엘이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레이가 생각하는 그는 당연하게 항상 제 옆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단단한 벽처럼 든든하게 자신을 감싸 안는 유일한 반려. 그가 없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이상해. 왜 이렇게 아프지? 이럴 리가 없잖아. 이거 너무 이상하잖아.’
그 순간.
라미엘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아, 안 돼…….”
꽉 막혀 있던 숨이 터지며 비명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엘!”
레이의 손에서 허무하게도 스르륵 라미엘이 빠져나갔다. 아무리 힘을 주어 버텨도 건장한 성인 남성의 무게를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 허억…….”
목이 메어 왔다. 코가 시큰하고 심장에서 퍼진 통증이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처럼 모든 곳이 욱신거렸다.
거짓말이지. 이거 꿈일 거야. 이게 어떻게 현실일 수가 있어?
차라리 내가 곰에 물려 죽는 게 더 현실성이 있잖아!
“라엘!”
“네.”
……뭐지. 잘못 들었나.
“라, 라엘. 라미엘 님.”
“…….”
그치? 자,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지! 지금은 들은 게 맞아야 좋은 상황이잖아!
“어이, 거기 루이반 수장!”
“네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이쪽으로 와 보면 알 겁니다.”
레이는 라미엘의 목소리를 따라 엎드린 자세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가 절벽 아래로 고개를 슥 내밀었다.
“엥?”
절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안쪽으로 아주 작은 동굴처럼 움푹 파여 있는 공간에 라미엘이 서 있었다. 레이가 있는 위쪽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마냥 낭떠러지만 펼쳐진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잠시 물러나요.”
그 말에 레이는 몸을 뒤로 물린 뒤 겨우 상체를 세워 바닥에 앉았다. 라미엘이 가볍게 훌쩍 뛰어 올라와 옷에 묻은 흙을 대강 털어 내고 다가왔다.
“많이 놀랐어요?”
“……못 일어나겠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던 라미엘은 레이의 말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굳은 얼굴로 빠르게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뒤 레이의 상태를 살폈다.
“어딜 다친 겁니까. 살짝만 확인해 볼 테니까 내 손 닿는 데에 아픈 곳 있으면 말해요.”
허. 기가 막혀. 나는 그런 공간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다쳐서 못 일어나는 거겠냐? 이 멍청아! 허어엉.”
통곡이 터져 나왔다.
찰나의 시간, 죽을 만큼 아프고 무섭고 두려웠던 시간이 끝나자 서러움이 터지고 말았다. 레이는 라미엘을 있는 힘껏 때려 가며 그야말로 엉엉 울었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평생 들을 일 없을 것 같던 라미엘의 사과를 들으며 레이는 울고 또 울었다.
***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압도적으로 몸을 잠식하는 날이었다.
정신 회복이 되지 않으면 육체도 정신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라미엘의 절벽 추락 사건 이후 레이의 체력 회복이 심하게 더뎌졌다. 세 걸음에 한 번씩 레이가 주저앉기를 반복하느라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레이, 그러다 크게 다칠 겁니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 일어날 거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레이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사람을 크게 걱정시켰다는 죄명으로 라미엘은 ‘손대기 절대 금지’ 형벌에 처해졌다.
이 형벌은 레이에게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아까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나서 깨달았다. 이번에 라미엘에게 닿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임을.
끝이 정해진 사람이다. 그 사실을 계속 상기해야 했다. 위약금이 무서워서라도 멈춰야 한다.
투둑. 툭. 투둑.
천둥 번개가 그리 요란하더니 기어이 어둑한 하늘이 비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거센 빗줄기가 예상되는 굵은 빗방울이었다.
완전히 어둑해진 밤 같은 시야에 라미엘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동굴 같은 곳을 찾아 비를 피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머물러야 했다. 분명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니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단 안전한 곳을 찾아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죄목은 나중에 따지죠.”
라미엘은 고집스레 혼자 힘으로 걷는 레이를 안아 들었다.
“젖지 않게 망토 잘 여미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고 비가 오는 거대한 산속에서 어영부영하다간 삽시간에 조난이었다. 지금도 그 비슷한 상황이니 서두르는 게 맞았다.
라미엘을 꼭 끌어안으며 레이는 흔들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산행은 고된 일이다. 특히나 험하고 크기로 유명한 워크산이니 맨몸으로 걸어도 편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비가 오고 사람을 안은 채 걷고 있으니 속도가 더딘 게 당연했다.
비로 두 사람은 흠뻑 젖은 채였다. 레이는 라미엘의 눈에 비가 들어가지 않게 손차양을 만들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연신 자기 손으로 훔쳐 냈다.
“라엘, 내려 줘요, 제발.”
이미 전부터 몇 번이나 요청했던 사항이었다.
그냥 가기도 힘든 곳을 라미엘은 레이를 안고 수 분째 묵묵히 걷고 있었다. 내려서 걷겠다는 레이의 말은 사뿐히 무시하면서.
“라엘, 힘들잖아요.”
“안 힘들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열차도 무게가 많이 실리면 버거워하는데.”
“레이가 열차에 싣는 짐만큼 무거운 건 아니라서요.”
“나 이제 체력 회복 다 됐어요. 잘 걸을 수 있다니까요.”
아까 내려서 걷겠다고 라미엘의 체력만 잡아먹었던 걸 생각하면 무작정 난동을 부릴 수도 없었다.
레이가 직접 걷겠다며 내려 달라고 품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무슨 바위도 아니고 사람이 어쩜 이런지. 이제야 라미엘 앞에서 루이반 기사들이 왜 그렇게 절절매는지 알 것 같았다. 최강자의 육체란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대단하다고 해도 벌써 몇 분째 빗속에서 사람을 안고 가는데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본격적으로 비가 시작되면서 근처에 계속 벼락이 떨어졌다. 혹여나 나무가 벼락에 맞아 쓰러지진 않을까, 우리가 맞는 건 아닐까 하는 심리적인 걱정까지 더해졌다.
심지어 젖은 몸에서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베롬이 아무리 따뜻하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추위와 싸우는 두 사람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에야 저 멀리 작은 동굴이 보였다. 드디어 몸을 피할 곳이 발견되었다.
라미엘이 나무 아래에 레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라엘, 많이 힘들죠? 우리 빨리…….”
“레이.”
“네.”
라미엘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었다.
“놀라지 말고 여기서 꼼짝 말아요.”
레이를 안심시킨 라미엘은 검을 꺼내 들고 그녀를 지키듯 그녀 앞에 섰다.
‘설마 뭐가 있는 거야? 또 뭐가 남았어?’
크르르르.
이쯤 되면 워크산에 무슨 변고가 생겼고 그로 인해 생태계에 이 난리가 났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