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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7화 (57/160)

57화. 사냥제 (7)

곰이라니.

‘또 곰이야!’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곰들이 왜 산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곰이 난폭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자다가 깼는데 당연히 성질이 나지.

“흡!”

레이는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막았다. 곰이 빠른 건 아까 봐서 알고 있었지만 이번은 유독 재빠른 듯했다.

라미엘이 순식간에 달려드는 곰을 가뿐하게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달려온 곰이 속도를 제어 못 해 쿵 소리 나게 부딪친 나무가 으직 소릴 내며 움푹 파였다.

곰이 비틀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라미엘이 매섭게 급소를 찔렀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저 큰 남자를 덜컥 물어 던질 것 같은 거대한 곰과 그런 곰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인간이라니.

라미엘이 밀릴 때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흐읏.”

뭐라도 도울 수 없을까 궁리하던 레이는 석궁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언제 잃어버린 거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낙마 이후 석궁을 메고 걸은 기억이 없다.

‘아, 그때.’

어차피 있었다 한들 남아 있는 촉도 탄도 없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 라미엘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저 이곳에 가만히 서서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훈련 더 열심히 할걸.’

무력감이 들고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제발 그가 다치지 않기를. 곰이 지쳐서 그냥 빨리 가 버리길.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 라미엘의 몸이 일순 휘청거렸다. 그가 디딘 바위가 물에 젖어 미끄러운 탓이었다.

“라엘!”

곰은 지금이 기회란 걸 알아차린 듯 라미엘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맹렬히 달려왔다.

레이를 향해서.

방금 전의 비명 소리를 듣고 곰은 타깃을 바꾸었다. 약한 짐승을 빨리 알아보는 동물의 감이었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레이!”

멀리서 다급하게 외치는 라미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미엘이 올 때까지 아주 찰나의 시간만 벌면 된다! 그때까지 몇 초만 버티면 돼!’

레이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돌을 곰에게 집어 던졌다.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싶어 챙겨 둔 무기는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 빛을 발했다. 빗줄기를 뚫고 날아간 돌이 곰의 눈을 맞혔다.

“됐다!”

곰의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이에 질세라 레이는 주머니 속에 남아 있던 빈 마력석까지 꺼내 던졌다.

쿠르릉, 쾅!

하늘이 도운 것일까. 빈 마력석이 곰에게 맞는 것과 동시에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아앗! 헉!”

빈 마력석과 곰을 벼락이 삼켰다. 눈이 멀 듯한 엄청난 섬광이 번쩍여 절로 눈이 감겼다.

“레이!”

라미엘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검게 그을린 채 쓰러진 거대한 곰이 보였다.

“하…….”

살면서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오늘 하루에 몰아서 다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라미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안부는 뒤로하고 레이부터 살폈다. 지금도 그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추위에 희게 질린 얼굴로 레이를 먼저 살피고 있었다.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잖아요.”

레이는 라미엘을 꼭 껴안았다.

라미엘이 넘겨 준 망토 덕분에 춥지 않았다. 그만큼 많이 젖지도 않았고 그가 계속 안고 와 줬기에 힘들지도 않았다.

“난 괜찮아요, 레이.”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정말 끝이겠지?’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라미엘이 검으로 그을린 곰의 머리를 베어 냈다. 곰이 벼락을 맞은 충격으로 기절만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이제 쓸모없어져 버렸다.

“어?”

곰의 사체 옆에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라미엘이 서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위치였기에 그는 아직 발견을 못 한 듯했다.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처음 보는 이질적인 빛이었다.

“아까 못 봤던 건데.”

레이가 곰 사체에 다가가자 라미엘이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 주었다. 본인들도 자각하지 못한 듯 아주 자연스럽게.

“……이건 내가 던진 마력석인데.”

다이아몬드가 되려다 만 육각형 모양이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제가 던진 빈 마력석이었다.

“그런데 왜 이게 이렇게 진초록색으로 빛나는 거지?”

처음 보는 색이었다. 붉은 마력석은 숱하게 봤지만 초록색으로 빛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거 빈 마력석이 아닌가. 빈 마력석이 선명하게 초록빛으로 가득 찬 이 경우는 대체 무엇일까.

“라엘, 이게 뭔지 알아요?”

“처음 보는 마력석입니다. 이거 아까 레이가 집어 던졌던 게 맞죠?”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산을 여러 개 소유한 라미엘조차도 모르는 새로운 마력석이라니.

“라엘, 대신전에서 워크산 에너지에 대해서도 연구할까요?”

워크산에 무언가 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워크산은 워낙에 방대하고 큰 산이라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대신전에서 매년 관련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긴 하지만 주로 동식물과 워크산의 기후와 환경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금 상황과 관련한 에너지 논문이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신전에 가져가서 검사를 의뢰해 봐야겠군요.”

쏴아아아.

순간 빗줄기가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세졌다.

“레이, 일단 비부터 피합시다.”

“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

‘제발 이 비가 소나기여야 할 텐데.’

도착 시간을 훨씬 넘겼는데도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으니, 워크산 아래서 루이반 부부가 나란히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 정도 빗줄기면 수색도 중단되겠군요.”

라미엘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역시 그렇겠죠?”

루이반 기사들 네 명은 거의 반쯤 정신을 놓았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레이가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나보단 라엘, 당신이 걱정인데.”

레이는 동굴 벽에 기대앉은 라미엘 가까이로 다가가 털썩 앞에 앉았다.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간 체온 유지가 안 될 것 같아 라미엘은 두꺼운 겉옷을 모두 벗어 두고 얇은 셔츠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흠뻑 젖은 그에 비하면 레이는 라미엘의 커다란 망토 덕분에 비교적 멀쩡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어린애도 아니고.”

당연히 레이는 망토를 라미엘에게 다시 돌려주려 했으나 그는 꿈쩍도 않고 거절했다.

하루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레이가 감기라도 걸려 콜록대느니 자신이 조금 추운 걸 참는 게 낫다.

“……왜.”

방금까지 떠오른 생각에 라미엘은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왜 내가 아픈 것보다 레이가 아픈 게 더 싫은 거지.’

무의식으로 생각하던 걸 천천히 되짚어 보자 놀라운 사실이 튀어나왔다.

산에서 레이를 만난 순간부터, 어쩌면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늘 웃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이와 관련된 모든 일에 관심을 쏟았고 처리해 온 것 역시도.

라미엘은 앞에 앉아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레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왜긴 왜겠어요?”

라미엘의 작은 혼잣말에 레이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라엘이 사람 맞다면 말리지 마요.”

레이는 망토를 넓게 펼쳐 최대한 자신과 라미엘을 함께 감싼 뒤, 그를 꼭 껴안았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당신 진짜 얼어 죽을 수도 있어요.”

망토가 싫다니 인간 체온으로 보듬는 수밖에.

라미엘이 미련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니 레이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애써 끝을 생각하며 발버둥 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불이라도 피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비 때문에 마른 나뭇가지를 구할 수도 없었다. 철인인 줄 알았던 라미엘도 사람이 맞는지 레이의 뺨과 맞닿은 그의 몸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데서 고집 부리고 있어.”

라미엘은 종알종알 품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레이를 좀 더 끌어당겨 꼭 껴안았다. 여리고 자그마한 몸에서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마음까지 녹이는 것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돌아갔을 때 라엘, 당신 조금이라도 아프면 아까 나 놀라게 했던 사건의 죄까지 싹 물어서 가만 안 둘 거예요.”

추락 사건은 라미엘 입장에선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그 역시도 떨어질 줄 알았지 공간이 있는지는 몰랐으니까.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나무뿌리를 잡아 버티고 나니 발에 지면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위에서 보기엔 천 길 낭떠러지지만 의외의 공간이 숨어 있던 셈이었다.

시선을 돌리니 발 닿는 부분에 그리 좁지 않은 공간이 있었다. 이 부분을 디디고 나무뿌리를 지지대 삼으면 충분히 원래 있던 길로 올라갈 수 있었다.

“라엘!”

다만 안도한 것과 다르게 숨넘어갈 듯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레이의 목소리를 듣자 추락할 때도 멀쩡했던 심장이 철렁했다.

이런 감정은…….

“레이, 그만둬요.”

잠시 상념에 빠진 틈을 탄 레이가 주섬주섬 망토를 라미엘에게 두르려 하고 있었다.

“새벽엔 더 추워져요. 그러니까 당신이 입고 있어요.”

“그럼 더더욱 많이 젖은 라엘이 입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두근두근.

‘내 심장 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착각일까.’

레이는 느릿한 손길로 라미엘의 볼을 감쌌다.

“얼굴이 차요.”

라미엘이 볼에 닿은 손을 감싸고 더 깊이 얼굴을 기댔다.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던 게 무색해졌다. 지금 마음이,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는 건 굳이 참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라는 신호였다. 레이를 바라보는 라미엘의 눈빛에 열이 돌기 시작했다. 무언의 동의였다.

작은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가볍게 빨 듯이 입에 머금자 미미하게 단맛이 난다.

“……입술도 차네요.”

그 차가운 입술이 레이의 입술 위에 닿았다. 레이의 손을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뺨을 감쌌다.

가볍게 맞닿았던 젖은 입술에 열이 올랐다. 입 안에 서로의 숨이 느껴지고 입술에서 전해지는 달콤한 향과 단맛에 혀가 아렸다.

“하아.”

이제 더 이상 차갑다고 할 수 없는 따뜻한 입술이 떨어졌다.

“……레이,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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