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8화 (58/160)

58화. 사냥제 (8)

“……레이, 잠시만.”

라미엘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레이의 얼굴을 쓰다듬은 뒤 몸을 일으켰다.

동굴 입구에 나타난 짐승 때문에 여운을 느낄 새도 없었다. 레이는 멍한 얼굴로 입구의 짐승을 바라보았다.

‘오늘 무슨 날이냐?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다. 또 짐승이야.’

동굴 방문자는 새하얀 털을 가진 늑대였다. 아직 새끼인지 늑대는 푸엥과 비슷해 보이는 덩치로, 레이처럼 선명한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워크산에는 특이 동물도 있다더니. 마물은 아닌 것 같으니 특이 동물이란 게 눈앞의 늑대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얀 털에 파란 눈이 달린 늑대도 다 있구나.’

라미엘한테 좀 더 들러붙어 보려고 했는데, 저 늑대 때문에 분위기가 왕창 다 깨졌다. 짐승 때문에 애정 행각도 못 하네.

“……이게 아니라.”

중요한 건 여운 따위가 아니었다. 많이 어려 보이는데 근처에 부모 늑대 무리라도 있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안전을 위해 저걸 사냥해야 하나, 새끼는 건드리지 말아야 하니 그냥 쫓아야 하나.

‘라엘이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퍼런 날이 보였다.

“라엘! 잠깐, 잠깐! 멈춰요!”

저 남자 검은 언제 들고 간 거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레이가 라미엘에게 달려갔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근처에 늑대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어린 짐승은 안 잡고 놔주는 거라면서요.”

방금 전까지도 사냥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나온 반응이었다. 직전까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어린 새끼를 사냥한다고 생각하니 잔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짐승은 약하니까 부모가 버린…….”

약하다고 죽이는 게 어디 있어!

레이가 라미엘의 말을 끊고 다다다 급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가 버린 거면 더더욱 놔둬야죠! 어차피 죽을 확률이 높은데 그렇다고 굳이 죽일 필요는 없잖…….”

“울프 드래곤입니다.”

“뭐?”

라미엘이 처음으로 곰을 잡았던 때, 그는 수풀 사이에 누워 당장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숨을 몰아쉬는 짐승을 발견했다. 눈이라도 내렸다면 잘 몰랐을 테지만 색이 하얘 수풀 사이에 있는 게 확 눈에 튀었다.

‘흰 늑대 새끼인가. 아니, 이건 늑대가 아니라…….’

돌연변이 늑대 새끼라 생각했는데, 밭은 숨을 내쉬는 주둥이 부분의 얇은 나뭇가지가 검게 타 부서지는 것을 보고 울프 드래곤이란 걸 알아차렸다.

울프 드래곤은 오래전에 자취를 감췄지만, 워크산에서 흔적이 발견되어 아마 산꼭대기에 몇 마리만 남아 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었다.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울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이름답게 불을 뿜는 게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들은 생후 2, 3년간은 부모 밑에서 생존법을 배우고 사회성을 키우며 그 후에 독립된 개체로 살아간다.

“크기 전에 버려졌군.”

이 아이는 많이 약해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 여겼는지 부모 드래곤이 일찍이 버린 모양이었다. 관리되지 않은 털은 꼬질꼬질했고 갈빗대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몸이 앙상했다.

부모가 돌보지 않은 어린 짐승은 다른 동물의 먹잇감이 된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불을 제대로 조절할 만큼 자라지도 못했고, 강하지도 않으니 약체나 다름없었다.

워크산의 꼭대기엔 인간들이 모르는 수많은 강력한 짐승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니 이 어린 짐승은 부모에게 버려진 채 다른 짐승에게 쫓기고 쫓기다 산 아래까지 떠밀린 게 분명했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기라도 한 건가.’

어찌 되었든 이 약해 빠진 짐승이 저도 드래곤이라고 사냥이라도 해 보겠다며 하울링을 해 대는 통에 잠자던 곰들을 깨운 듯했다. 곰 한 마리 상대할 방법도 모르고 힘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하울링은 울프 드래곤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 어느 것도 부모에게 배우지 못한, 어리고 약한 짐승은 사냥을 못 해 오랫동안 굶어 아사 직전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제 몸이 스스로의 몸을 잡아먹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죽을 게 뻔했다.

“……편하게 해 주마.”

어린 짐승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자비를 베풀어 한 방에 보내 주려 하는데, 쌕쌕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짐승이 힘겹게 눈을 떠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푸른 눈동자일까. 지금쯤 아래 구역에서 열심히 석궁을 쏘아 대고 있을 레이가 떠올랐다.

“…….”

라미엘은 마음을 바꿔 조금 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그는 곰의 앞발을 베어 내 새끼 울프 드래곤 옆에 가져다 두었다. 죽기 전에 포식이라도 한번 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자신이 레이를 만나는 동안 아사 직전의 울프 드래곤이 곰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우고 힘을 내서 저를 쫓아오는 건 꿈에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여기 놔둬 봤자 혼자서 살아남긴 힘들 겁니다. 차라리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게 나아요.”

곰 한 마리 내주었다고 쫄래쫄래 쫓아온 것부터가 야생에서 살아남긴 그른 성정이었다. 부모에게 배운 게 없어도 너무 없는 어린 울프 드래곤의 앞날은 뻔했다. 자칫 인간들 눈에라도 띄면 그야말로 최악일 테고.

레이는 라미엘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고통을 없애 준다는 섣부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레이에겐 죽을 뻔한 몸으로 여기까지 열심히 몸을 움직인 작은 생명의 절박함이 먼저 느껴졌다.

“라엘, 사람이건 짐승이건 사는 게 힘들고 괴로운 존재들이 분명 있겠지만, 그걸 고통이라고 여기는 건 당사자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남이 재단할 수 없어요.”

숨만 붙어 있던 아사 직전의 짐승이 라미엘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힘을 내서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건 살고자 하는 의지일 터였다.

“우리가 보기에 비참하게 살다가 죽는 것처럼 보여도 이 아이에겐 안 비참할 수 있는 거고 또 이 아이가 선택한 거니, 우린 관여해선 안 돼요.”

레이가 직접 라미엘의 검을 거두었다.

“얘가 공격해도 우리 피할 수 있는 거죠?”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자신들의 목숨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에너지를 쏟아 가며 어린 짐승을 사지로 내몰 필요는 없었다.

“하던 거나 마저 해요.”

레이가 라미엘의 멱살을 쥐듯 옷깃을 꽉 잡은 뒤 눈을 감고 까치발을 했다. 감은 눈으로도 라미엘이 가볍게 웃는 게 느껴졌다.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라미엘의 입술이 느껴지질 않는 건 뭘까.

레이가 슬쩍 눈을 뜨니 울프 드래곤이 동굴 안으로 성큼 들어와 있었다.

요놈이 있어서 라엘이 입술 안 줬나 보네.

“얀마, 가.”

레이는 근처로 다가온 새끼 울프 드래곤을 크레하가 푸엥에게 하듯 발로 슥 밀었다.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울프 드래곤의 털은 한 가닥도 젖지 않고 보송보송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자기도 불 쓰는 드래곤이라고 비에 젖지는 않는 듯했다.

레이에게 밀린 울프 드래곤은 그만큼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가라니까.”

또 한 번 밀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라엘, 보고 있지만 말고 좀 쫓아 봐요.”

뽀뽀 좀 하게.

“……안 쫓아질 것 같은데요.”

자신을 밀어내려는 걸 눈치챈 것인지 울프 드래곤은 성큼 안으로 들어와 라미엘이 벗어 놓은 옷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거참. 뽀뽀 한 번 하기 되게 힘드네.”

속마음이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술술 흘러나왔다는 걸 레이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무 시선도 없는 곳에서 진하게 키스나 하고 싶은데 짐승이 말을 안 들어, 왜!’

레이의 심경을 들은 라미엘이 울프 드래곤을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한 짐승은 갑작스레 몸이 들리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라미엘의 몸에서 한기가 가시며 젖은 옷이 삽시간에 전부 말랐다.

“어머나.”

순식간에 보송보송해진 라미엘의 옷자락을 레이가 더듬거렸다.

“어떻게 이런…….”

그러고 보니 라미엘을 안고 있느라 같이 젖었던 제 옷도 보송해진 상태다.

“내 옷도 말랐어요. 얘를 만져서 그런가?”

바닥에 놓인 라미엘의 옷을 확인해 보니 흠뻑 젖어 있던 게 건조기에라도 돌린 것처럼 싹 말라 있었다.

‘요 작은 늑대가 정말 드래곤이 맞긴 맞구나.’

어설프게 사람 손을 탔다가 나쁜 일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될 것이다.

“라엘, 안 좋은 거죠? 얘가 사람 찾아온 거.”

라미엘 역시도 레이가 무얼 염려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부모에게 인간을 피해야 한다는 것조차 배우지 못한 짐승이 산의 낮은 곳에 있다는 건 인간이 데려가 악용하기 딱 좋을 일이다.

“사람 냄새가 남아 있으면 좋지 않은 일만 당할 겁니다. 특히나 울프 드래곤은 후각이 워낙 좋은 터라.”

“라엘, 그럼 빨리 내려…….”

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미엘이 동굴 밖으로 울프 드래곤을 내던졌다. 새하얀 짐승은 비를 뚫고 저 멀리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 그렇게까지 치워 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애 잡겠어요!”

“드래곤이잖아요. 이 정도로 안 죽습니다.”

“정말이에요?”

라미엘은 레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저기 동굴이 보입니다!”

앞서가던 엘이 외쳤다. 험악한 빗줄기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다들 눈앞에 있는 동굴을 보고 있었다.

비가 거세서 수색이 중단되었으나 루이반 기사들은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루이반 공작 부부가 나란히 실종된 상태였다. 사냥제 참가자 모두가 하산을 했음에도 두 주인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마그스너 영애의 증언으로 부부가 함께 있을 거란 희망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불안한 징조였다.

혹여 하산 중에 비를 피하느라 늦는 건 아닐까, 이런 추측을 하는 중 라미엘의 말이 주인도 없이 곰 머리만 태운 채 산 어귀에 나타났다. 이는 필시 사건이 터졌다는 말이었다.

하여 루이반 기사들은 주변 사람들과 신전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동선을 좇아 거센 빗속을 헤매고 있었다. 주인이 처음 입산했던 때의 위치를 고려해 부부가 있을 법한 곳을 뒤지던 중, 동굴을 발견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거, 흠흠.”

고생 끝에 마님과 주인을 발견한 루이반 기사들은 기뻐할 새도 없이 기척을 죽였다.

“……마님께서 결국 용서하신 거겠죠?”

“시끄러워요.”

“조용히 하십시오.”

기사들은 부부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허공을 바라보면서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