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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9화 (59/160)

59화. 선처

욕조에서 졸다가 익사할 뻔했다. 레이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초록빛 욕조 물 사이로 온몸에 뜬 알록달록 무지개와 여기저기 난 생채기가 보였다.

상처가 낫는 약이라고 했던가, 통증을 가라앉게 해 주는 약이라고 했던가. 풀 냄새가 진하게 나는 약이 풀린 물이었다. 처음에는 욕조에 몸을 담그자마자 너무 따가워서 울 뻔했는데 그런 와중에 잠이 들었다.

길고 긴 하루를 끝내고 돌아오자 라미엘을 만나서 긴장이 풀어졌을 때처럼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공작 부인!”

하산하자마자 케이틀린의 눈물 어린 환영을 받았고, 모든 이들의 안도 속에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있던 의사는 빠르게 진료를 보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초를 조합해 만든 약을 내밀었다. 다행히 뼈에 금이 가거나 큰 상처가 없어 상처만 진정되면 끝이라고 했다.

“마님, 들어가겠습니다.”

목욕 시중을 위해 대기하던 두 사람이 죽을죄를 진 죄인의 얼굴로 비장하게 레이의 몸시중을 들었다.

머리까지 다 말리고 침대에 눕자 몸아 노곤해졌다. 고단했던 하루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도 오늘 고생 많았는데 빨리 가서 쉬어.”

자신들은 마님을 지키라는 임무 하나 제대로 수행 못 한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마님은 따뜻하게 치하하고 있어 마음이 더 불편했다. 이런 천사 같은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님이 보듬어 줄수록 더더욱 죄송해졌다.

“저흰 마님께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님.”

이들의 잘못이 있던가?

이제는 어제가 되어 버린 오늘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우연이 가져온 일이었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불의의 사고였다.

레이가 실족했을 때, 그 동선을 알아내기 위해 늑대를 처치하자마자 허디가 바로 절벽으로 뒤따라 떨어져 내려왔다고 들었다.

레이가 지나간 길목마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놓은 표식을 따라 수월하게 추적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 표식이 끊겨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곰이 나타난 후 도망가느라 못 남긴 거니 걱정할 만한 일이긴 했다. 천운으로 라미엘을 만나 극적으로 살아남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그렇지만 비록 자신을 찾지 못했다고 해도 저들은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폭우에도 험한 산행을 감행했는데, 그런 이들을 어찌 질책할 수 있을까.

심지어 허디는 수색 중에 무리를 하다 팔까지 크게 다쳤다.

“나 정말 괜찮아. 너희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그때 방문이 열리며 라미엘이 모습을 보였다.

“몸은 어때요?”

“지금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만큼 좋아요.”

작은 방 안에 부부 둘만 있도록 케이와 엘이 바로 자리를 비켰다.

라미엘이 레이가 누운 침대 옆으로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약초 정도로 되겠어요?”

“이 정도로 신관 안 불러도 된다니까요.”

의사가 아니라 치유 신관을 불러오라는 라미엘의 명령을 말린 건 레이였다. 밤이 너무 늦고 기상이 좋지 않아 즉시 치료 신관들을 부를 수 없어 다행이었다.

타박상으로 그 비싼 신관 치료까지 받겠다니 극성도 그런 극성이 없다. 라미엘이 자신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것과 상관없이 계약에 따른 유별난 부부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 줘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라도 그럴 사람이니 레이는 단호히 말려야 했다.

이미 라미엘은 그런 용도로 1,800억 파브를 썼다. 그러니 치료 신관이야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마음을 자각하지 않았다면 마린의 거미줄처럼 주변에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무조건 신관을 호출했을 것이다. 그가 레이의 말을 제대로 알아주었기 때문에 참는 것이었다.

“괜찮다니까요, 정말.”

오물오물 움직이는 레이의 입술에 절로 시선이 갔다. 아직도 발갛게 살짝 부은 그 입술을 보자 라미엘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레이의 입술에 살짝 손을 댔을 때, 그녀가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하지 마요.”

“아파요?”

“아뇨, 그게 아니라. 기사들, 하지 말라고요.”

“뭘 하지 말라는 거죠?”

“라엘이 생각하는 거요. 난 무사히 돌아왔고 그들은 최선을 다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라미엘의 성정에 기사들을 그냥 둘 리 없다. 분명, 반드시 큰 처벌을 내릴 것이다. 표정을 보니 정확히 적중한 듯 보였다. 심지어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처벌이 예정된 모양이었다.

레이는 해고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미엘의 기색을 보아하니 무섭게도 모가지, 그것인 듯했다. 더불어 지금 제 만류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라엘, 그들이 이 세상에 없으면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그러지 말아요.”

라미엘의 마음을 흔들 수 없으면, 이쪽의 동정심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잖아요.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들까지 슬프게 만들지 않았으면 해요.”

“…….”

라미엘은 레이의 말에 별 반응이 없었다.

‘에효, 아직은 조금 무리였나.’

레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라미엘의 양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당신이 사람을 조금 더 소중히 여겨 줬으면 좋겠어요. 날 위해서.”

라미엘 당신을 위하라고 하면 가차 없이 죽일 사람이니 그녀는 자신을 들먹였다. 제게는 무른 사람이니까.

레이도 확실하게 알았다.

라미엘은 레이알렉시스에게 약했다.

그가 자신에게 어디까지 약해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날 위해 내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먹히는 정도는 된다는 걸 알았다.

“당신을 위해 처벌하려는 겁니다. 레이가 혹 날 만나지 못했다면…….”

“그럴 때는 처벌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그딴 무서운 가정, 무서운 소리하는 거 아닙니다.”

라미엘의 표정이 영 시원찮다.

‘나한테 하나도 말랑말랑 안 하잖아? 이건 뭐야, 입술 먹튀야?’

레이의 미간에 서서히 주름이 잡혔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표정으로 그녀가 씩씩거렸다.

“그냥 누나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좀!”

결국 레이는 버럭 성질을 내며 풀썩 침대로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휙 돌아누웠다.

“어휴, 저 쫌팽이 저거, 말이 안 통해.”

이불 속에서 쫑알쫑알 험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라미엘이 이불을 살짝 들추니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쌕쌕 잠든 레이가 보였다. 고된 하루였으니 기절하듯 잠든 게 당연했다.

라미엘은 잠시 레이를 바라보다가 이부자리를 손수 정리해 주고 방 밖으로 나왔다.

라미엘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처분을 기다리는 네 명의 루이반 기사가 열을 맞춰 섰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 그들 역시도 뒤를 따라 주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두 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 죽음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라미엘이 의자에 앉자마자 넷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처분만 바란다는 듯 잘 벼린 검을 라미엘 앞에 두었다. 모든 것을 각오한 비장한 얼굴이었다.

라미엘은 자신의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네 명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내리시는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말조차 없었다. 그저 자책하고 또 자책하는 얼굴.

라미엘 곁에 선 크레하조차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당연하게 모두가 담담히 죽을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한참 만에 라미엘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마님 덕분에 살아 있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예상외의 처분에 다들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두 번은 없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가차 없이 목을 날리려 했다. 그런데 결심과 달리 머릿속은 복잡했다.

꼬질꼬질한 상처투성이의 레이와 푸른 눈동자 가득히 눈물을 달고 슬퍼하고 있는 레이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둘 다 화가 치미는 일은 맞는데 전자는 화가 나서 속이 끓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숨이 막혀서 어쩌질 못하겠는 그런 느낌이었다.

“처벌은 안 내리십니까.”

크레하가 놀라서 물었다.

“가서 치료받아.”

마님의 호위 넷은 방에 들어선 순간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을 것이다. 라미엘의 처분이라면 그래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팔이나 다리 하나를 날려 버려 영영 검을 못 쥐게 만드는 게 최대한의 선처였을 것이다.

마님의 배려가 있었다고는 하나 라미엘이 그걸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치료까지 받으라니!

그 자그마한 사람이 이루어 낸 엄청난 변화에 크레하는 물론 기사들까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랐다.

다음 날 오후.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난 레이는 급하게 줄을 당겨 보았다.

“케이! 엘!”

처음 보는 얼굴이 다가올까 봐 겁이 났는데 낯익은 두 사람이 보이자마자 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 있다. 그것도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허디랑 톰은?”

“마님께서 돌봐 주신 덕분에 저희 모두 무사합니다.”

“이 은혜를 저희가 어찌 갚아야 할지…….”

두 사람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톰! 허디!”

레이의 외침에 밖에 있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크흡, 마님!”

라미엘이 레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크레하와 그녀의 방에 갔을 때.

둘은 왜인지 공작 부인과 그녀 휘하의 기사 넷 모두 다함께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희한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

전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폭우가 내린 것과는 달리 날씨가 화창했다.

휴양지란 명성답게 햇살이 맑게 내리쬐고 푸른 하늘이 눈부시게 빛났다. 시야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보이지만 않는다면 여름이나 가을처럼 보일 정도로 쾌청한 날이었다.

본디 사냥제 다음 날이면 우승자 발표를 했는데 조난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사후 수습과 정리를 위해 시상식이 하루 뒤로 연기되었다. 하루의 여유가 생긴 셈이라, 참가자들은 자신의 별장에 가거나 베롬 관광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좋다.”

레이는 창가 바로 옆으로 옮긴 침대에 앉아 이불을 몸에 돌돌 감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지만 창틀에 놓인 찻잔 안의 차가 따뜻해서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마력이 깃든 찻주전자에 담긴 차는 아무리 차가운 곳에 두어도 식지 않았다. 다과를 담은 접시도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가장 좋아하는 한때였다. 침대에서 창가를 내다보며 다과를 즐기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똑똑.

“마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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