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60화 (60/160)

60화. 베롬 휴양

“들어와.”

케이가 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이걸 전해 드리려 왔습니다.”

다음 날의 시상식을 위해 사냥한 동물들의 집계가 한창이었다.

원래는 사냥 참가자가 잡아 온 동물들로 집계를 했는데, 긴급 회귀 명령 때문에 사냥한 동물을 챙겨 오지 못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어 산을 돌면서 동물들의 사체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다시 산을 돌게 되면서 루이반 기사들은 레이가 잃어버린 석궁을 발견했고,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소중히 챙겨 왔다.

“이걸 찾았어?”

특수 제작한 석궁이라 잃어버린 게 못내 아까웠는데 다시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낙마하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간 석궁은 그 이후 곰에, 마력석에, 울프 드래곤까지 만나느라 기억에서 완전히 잊혔다.

석궁보다 강력한 라미엘이라는 무기를 만났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평소 훈련하면서 무기를 절대 놓지 말라고 혼내던 그를 떠올려 보면 빵점짜리 학생이었다.

“찾아 줘서 고마워. 영영 잃어버릴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마님. 가지고 계셨던 탄과 촉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찾은 거야? 사냥감 확인하러 간 김이 아니라?”

“예. 꼭 찾아 드리고 싶었습니다.”

석궁을 찾았다는 걸 레이에게 빨리 알려 주기 위해서 케이가 혼자 먼저 하산해서 왔다. 다른 기사들은 아직도 산속에서 사냥감을 찾는 척하며 레이의 탄과 촉을 찾고 있을 터였다.

“저도 다시 돌아가서 합세하겠습니다.”

“꼭 안 찾아 와도 되니까 무리하지 마. 모두에게도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 줘.”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레이의 말은 전하겠지만 그들은 아마 최선을 다해 찾아 올 것이다.

‘허디는 팔도 성치 않은데.’

걱정은 되지만 그냥 오라는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아 레이는 그냥 네 사람의 무사만 빌기로 했다.

“마님, 베롬의 석양이 아주 아름답다고 하는데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래?”

베롬은 거리가 멀어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기회가 있을 때 즐겨야 했다. 케이의 말에 레이는 남은 차를 빠르게 마시고 이불 더미에서 빠져나왔다.

***

발목 위로 올라오는 도톰한 드레스에 부츠를 신고, 귀까지 감싸는 양털 모자를 쓰고 방한 재킷을 걸친 뒤, 숙소에서 20분 정도를 걸어 나가자 바로 바다가 보였다.

“후와아.”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림 같은 광경에 추위도 잠시 잊었다.

“이걸 못 봤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저무는 태양에 붉게 물든 금빛 바다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어쩐지 이 근처에 별장이 많이 보인다 했더니만 다들 명당에 자리 잡은 거였네요.”

레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라미엘은 문득 별장이 생각났다. 루이반의 여느 별장과 내부 디자인이 조금 다른 양식이라 구경할 만한 재미는 있을 것이다.

“루이반 별장에도 한번 가 볼래요? 레이, 아직 별장 못 골랐잖아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정말요? 당연히 갈래! 이 근처예요?”

루이반의 베롬 별장은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에 있었다. 신전에서 마차를 타고 30분쯤 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석양을 볼 때 봤던 별장들과는 외관과 크기부터 전혀 다른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훨씬 더 해변 가까이에 지어져 있었고 규모가 컸다. 휘황찬란한 건물들이 한 마을을 이뤄 모여 있었다.

해가 지면서 어두워지는 주변 조도에 따라 서서히 밝아진 조명이 건물을 비추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조명 조형물같이 보였다.

“저 위쪽! 바다 제일 잘 보일 것 같은 쟤가 루이반 거죠?”

마차 창문에 반쯤 몸을 내밀고 밖을 구경하던 레이가 안으로 쑥 들어오며 물었다.

혹여나 창문에 걸쳐지듯 한 레이가 굴러떨어지기라도 할까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라미엘이 쥐고 있던 손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시 어디든 루이반의 별장을 찾아내기는 쉬울 것 같다. 제일 좋은 위치에 있는 게 정답이니까.

마차는 본격적으로 휴양지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지금까진 평범한 흙길이었던 것과 달리 길도 하얀 돌을 깎아 만들어 깨끗했고 조명이 곳곳에 있어 마차가 지나가자 불이 들어왔다.

곳곳에 설치된 조명에 작은 분수들도 보이고 유명 관광지처럼 정말 예쁜 곳이었다. 이 길을 마차로 휙 지나가기에 너무 아까웠다.

“나 여기서 내릴래요. 그냥 스쳐 가기에는 아쉬워요.”

레이의 요청에 라미엘이 창을 두드려 마차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호위로 동행한 크레하가 다가와 물었다.

“여기서부터 걸어갈 테니까 먼저 가.”

호위 기사니 당연히 크레하는 부부와 동행해야 했지만 라미엘의 기색을 살펴보니 임무고 뭐고 자신도 꺼져 줘야 하는 느낌이었다.

크레하는 자연스레 손을 잡고 길을 걷는 루이반 부부를 보며 영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저 광경이 사실이라니.’

어젯밤의 선처도 그렇고, 아무래도 주인이 제대로 마님한테 넘어간 듯해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도 않는 것이 아무튼 간에 묘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마님한테 영 무르게 군다 싶었다. 이제야 자각을 한 건지 어쩐 건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온기가 보인다.

“이런 날도 다 있네. 저 붉은 천사가.”

하여간 마님이 웬만하지 않게 잘못한 일은 해결이 된 모양이다. 닭살이 오르는 팔을 툭툭 털어내며 크레하가 말을 몰았다.

“라엘, 저기 보여요? 담쟁이덩굴 집. 매달린 조명 진짜 예쁘다.”

골목길의 끝이 보일 때마다 눈앞에는 파란 바다가 넘실거렸다. 해가 져서 어둑하게 보이지만 날이 밝을 때였다면 근처에서 차라도 한잔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일 것이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꼭 저기서 차 마실 거예요.”

찻잔과 빵이 그려진 작은 간판이 있었으니 가게라는 말이다. 역시 명당에 가게가 있는 건 어딜 가도 진리였다.

시상식이 열리는 시간이 오후 1시니 이왕 온 거, 이곳에서 점심까지 먹고 가면 좋을 듯했다.

“라엘, 여기 몇 번이나 와 봤어요? 올 때마다 기분 좋았겠다.”

“베롬 별장은 처음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라엘도 그럼 처음 보는 거예요?”

“네.”

“그럼 가주님 첫 방문이네요.”

직원들 첫 대면이라 긴장 많이 되겠다는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부부는 베롬의 밤거리를 느긋하게 걸었다.

별장에 도착해 보니 웅장한 흰 기둥 여덟 개가 한 줄로 저택 앞을 지키듯 서 있었다. 베르니나 레이가 봤던 다른 별장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조명만큼은 단연코 압권인 건물이었다. 어떻게 빛을 내면 건물이 더 아름다울지를 연구해서 만든 듯했다.

저택 정원을 둘러싼 흰 벽 바깥쪽으로 계단이 있는데 이곳을 내려가면 개인 해변이 나온다고 했다.

“밤에 와서 다행이네요. 낮에 왔으면 이걸 못 봤겠네.”

“루이즈 별장보다 조명은 조금 더 신경 써 지었다고 하더군요.”

“루이즈 별장이요?”

“여기와 루이즈에 있는 별장은 똑같습니다. 선대 공작 부인이 바다를 좋아해 두 채를 똑같이 지어 한 군데씩 두었다더군요.”

그래서 라미엘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베롬의 별장을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건물 내부가 다른 별장들과 달라서 레이가 보면 재밌을 거예요.”

저택 입구에서 마중 나온 여덟 명의 하인들과 인사한 뒤 레이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내부는 화려함을 강조하던 여타 루이반의 건물과 달리 깔끔했다. 외부의 조명과 거대한 기둥 아치들을 생각하면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흰색이 주색이었지만 밤하늘 같은 진한 파란색을 강조 색으로 두었다.

화려한 그림도 조각상이나 대리석 아치도 없고, 허전할 것 같은 지점엔 작은 조명이 달린 정도가 전부였다.

다만 풍경만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별장의 모든 방은 바다를 바라보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시야에 걸리는 나무나 건물도 없었다. 단조로울 정도로 있을 것들만 갖춘 이곳의 인테리어는 한국에서 살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감각 있는 미니멀리스트였나 보다.’

병으로 일찍 가지만 않았다면 그녀의 멋진 인테리어 감각으로 만든 루이반의 별장이 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아쉬웠다.

“와아.”

메인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침대가 있는 벽은 진파랑, 나머지 흰 벽에는 작은 책장과 별 꾸밈이 없는 흰 장식장이 있고 동그란 조명이 달린 게 전부였다.

침대도 독특했다. 여느 귀족 집에서 흔히 보듯 프레임이 화려한 침대가 아니고 한국에서 봤던 커다란 패밀리 침대처럼 생겼다. 레이의 허리 정도 오는, 낮지 않은 프레임 위로 네 면이 폭신하게 사방을 감싸는 형식의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라엘, 여태 봤던 곳 중에서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크기가 너무 크지 않은 것도 좋고, 색이랑 그냥 전부 어디 하나 성에 안 차는 게 없네요.”

그러면서 레이는 침실과 연결된 욕실 문을 열어 보았다.

한 면이 전부 유리로 된 욕실은 지금껏 봤던 방 중에서 가장 경치가 좋았다. 커다랗게 트인 창 때문에 정원부터 개인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 이어지는 푸른 바다까지 모든 것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사냥 끝나고 바로 여기로 올걸. 이 욕조에 몸을 담가야 했어.”

베롬 별장이나 제대로 봐 둘 걸 그랬다. 베롬은 라비던에서 너무 멀어서 쉽게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이곳의 별장은 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레이, 이걸로 하겠어요?”

“음, 마음 같아선 당장 그러고 싶은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조금 고민이 돼요.”

“그럼 루이즈 별장을 가져요.”

“거기도 여기처럼 풍경이 예뻐요?”

“여기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나쁘지 않을 겁니다.”

“좋아요. 올여름엔 루이즈로 피서 가야지. 아, 잠깐만요. 보고 나서 마음 바꿔도 돼요? 맘에 안 들면 어떡해?”

“마음대로 해요.”

라미엘의 허락을 받아 낸 레이가 양 주먹을 쥐고 신나게 흔들었다.

“그럼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빨리 잘래요. 잘 자요, 라엘.”

레이가 침대로 들어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라엘, 뭐 해요?”

라미엘이 나가질 않는다.

“레이,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요?”

“별장이잖아요.”

아무리 작은 별장이라고 해도 방만 여덟 개인 곳이다. 잘 곳은 널리고 널렸다. 구경하면서 봤던 방 중에 너른 침대가 있는 곳도 세 개나 됐으니 아무 데나 골라잡으면 될 일이었다.

“아, 라엘, 여기가 맘에 든 거예요? 그럼 내가 양보할게요.”

“레이.”

“네.”

“여기 귀족들의 별장입니다.”

“네. 알아요. 별장인…….”

맞다. 별장이라면…… 사랑과 정열의 뜨거운 집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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