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후유증
“라엘, 베르니 때처럼 바쁘게 해결해야 할 일 같은 건…….”
“없습니다.”
따흑. 어쩜 좋아.
어쩐지 라미엘이 자신처럼 편한 복장을 하고 있더라니.
부부 사이가 냉하다는 건 사냥제 전에나 말이 되는 이야기였고 그 어떤 핑계거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레이는 침대 한가운데 멍하니 앉아 수를 내 보려 애썼지만 피곤한 뇌는 더 이상의 활동을 거부하고 있었다.
“라엘, 좋은 생각 없죠? 어쩔 수 없는 것 같은데 이리 와요.”
침대가 아주 큰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라미엘이 침대로 들어오자 최소 여섯 명은 넉넉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은 침대가 3인용으로 확 좁아진 기분이었다.
‘이 느낌, 이 기시감. 분명 전에도 느낀 적 있다.’
평소에도 라미엘과 대화할 때는 언제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가 크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나란한 눈높이로 있으면 새삼 그의 체격이 좋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들었다.
“가운데에 베개나 쿠션으로 금을 긋는다거나 하진 않을게요.”
“그런 짓을 할 생각이었습니까?”
“아니, 뭐어, 음, 그게. 덮치면 안 되니까 방호벽 같은…….”
내가 너를요.
“내가 레이를요?”
아니, 아니요, 그 반대…….
“레이가 날 덮치겠는데. 이미 전적도 있고.”
“당연히 내가 라엘을, 뭐? 뭐라고요? 이미 뭐?”
라미엘이 침대 위에 다소곳하게 누우며 말을 이었다.
“레이한테 계속 추행당하던 건 나 아니었나?”
예상치도 못한 라미엘의 어택에 레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주사와 가지 사건, 기타 등등 이래저래 라미엘의 팔에 들러붙어 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어, 예, 그렇습니다. 그게 맞는데…….”
레이는 라미엘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단 사과 받으세요, 공작 각하. 본의는 아니었으나 크게 누를 끼쳤습니다.”
라미엘이 앞에서 키득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왕 분위기 탄 거, 가지 사건은 제대로 사과를 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건 정말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실수였어요. 기분 나빴을 거 아는데 바로 사과 못 해서 미안해요. 음, 그리고 또…….”
어물어물 사과하는 레이가 귀여워서 라미엘은 계속 말을 이으려는 그녀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어엇?”
레이의 몸이 맥없이 라미엘의 품으로 풀썩 끌려왔다.
“라엘? 갑자기 왜…….”
“사과는 충분해요.”
그리 말하는 라미엘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충분한 얼굴이 아닌데. 라엘이 가깝게 느껴지는 거 내 착각이에요?”
라미엘의 숨결이 입술에 닿을 만큼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착각, 아니에요.”
라미엘이 레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레이는 라미엘을 꼭 껴안는 것으로 응했다.
라미엘의 몸에 올라타 있는 건 새로운 느낌이었다. 단단한데, 부드럽고 따뜻한데 소름이 돋을 만큼 좋은 거. 레이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라미엘의 몸을 훑고 있었다.
정신없이 얽히는 숨이 어지럽게 차올랐다고 느낄 때, 레이는 라미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흣.”
모든 게 다 바뀌었다. 자세도, 몸을 더듬는 사람도.
새처럼 입술을 가볍게 쪼아 대듯 키스를 하며 라미엘은 조심스럽게 레이의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심장 박동이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것처럼 뛰었다. 쿵쿵거리는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극도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런.”
조금 쉰 것 같은, 저 밑으로 잠겨 평소보다 훨씬 낮고 진득한 목소리가 라미엘의 입에서 나왔다.
‘목소리 한 번 지독하게 야하네.’
라미엘의 목소리를 만져 보기라도 할 것처럼 레이가 홀린 듯 그의 입술에 손을 댔다. 빨갛고 조금 뜨거운 입술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라미엘이 레이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물고 몸을 일으켰다.
‘분명 다음까지 갈 분위기였는데.’
레이는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라미엘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레이가 다쳤으니까.”
“내가 다쳤다고요?”
“온몸에 멍이 가득해요.”
잠옷에 가려져 잠시 잊었던 레이의 상처가 단추 몇 개가 풀리자마자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야 약초 효과 때문에 통증이 좀 잦아들었어도 이 이상 무리를 하면 레이가 버티기 힘들 것이다.
“약 기운이 가시면 멍이랑 상처들이 많이 아플 거예요.”
그냥 아픈 것도 아니고 많이 아프다고 하니 겁이 났다.
아이, 그다음도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아픈 건 싫고.
고민하던 레이는 슬슬 가물거리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럼 손만 잡고 잘게요.”
다음을 노려야지.
라미엘의 커다란 손을 살포시 잡으며 레이는 오래지 않아 금세 잠이 들었다.
***
달그락.
달달달 떨리는 손은 기어이 포크를 놓치고 말았다.
“끄으응.”
라미엘의 지난밤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산에서 라미엘을 만나고 아팠던 건 아픈 거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어제 밤에 봐 둔 풍경 좋은 식당에서 브런치를 먹고 대신전으로 가겠다고 야심차게 계획했던 것과 달리 레이가 지금 있는 곳은 여전히 별장이었다.
팔을 들거나 조금 걷기만 해도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서 침대 밖을 나서지도 못했다. 어제 분위기에 취해 라미엘 말을 싹 무시하고 일을 치렀다면 그야말로 오늘 아침은 지옥 불구덩이행이었을 것이다.
입맛까지 싹 달아나서 레이는 포크를 놓친 김에 아예 식사를 중단했다.
“더 못 먹겠어요.”
“먹여 줄게요. 좀 더 먹어 봐요.”
라미엘이 포크를 들었지만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파서 입맛이 아예 사라졌어요. 그만 먹을래요.”
“신전에 가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요.”
라미엘이 레이의 식판을 테이블 위로 치우고 줄을 당겼다.
“신전까지 어떻게 가지? 옷 갈아입을 생각만 해도 지옥 같은데.”
마차는 또 어떻게 타란 말이냐.
“통증 완화에 좋은 약초를 구해 뒀어요. 임시방편이지만 마차 타기 전에 먹어 두면 잠깐은 괜찮을 거예요.”
레이의 통증을 예견한 라미엘이 밤사이에 찾아오라 지시해 놓은 약초였다.
“약초는 맛없잖아요.”
“약을 누가 맛으로 먹습니까.”
가볍게 한 번 자각했다고 이런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 귀엽다고 느껴지면 이 이후는 어떻게 되려는 걸까.
“술을 잔뜩 마셔 버릴까요? 별장에 맛있는 와인이 있나.”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지난날 마차에서 루이반 공작 부인이 거하게 주사를 부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설마 또 나보고 기절시켜 달라는 소린 아니죠?”
“슷, 쯔읏. 그때 일 입 밖으로 꺼내지 마요! 그리고 그거 아니에요! 아프니까 진통제 차원으로 조금만 마셔 볼까 생각한 거예요.”
그 얘기 좀 하지 말라며 라미엘에게 인상을 팍팍 쓰는 레이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라미엘은 이른 아침에 받아 둔 약을 챙겨 와 레이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요. 계속 아픈 것보다 잠깐 쓴 게 낫습니다.”
라미엘이 내민 것은 흰 접시에 올려진 짙은 초록색 덩어리였다.
“어라. 풀떼기가 아니네.”
약초라고 해서 범벅이나 묽은 죽 같은 형상을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환처럼 동그랗게 뭉쳐진 작은 덩어리가 세 개다. 이런 거면 물과 함께 삼키면 끝일 일이었다. 레이는 편안한 얼굴로 약을 집어 들었다.
“으읍? 으으읍!”
약은 물에 닿자마자 녹아서 쓴맛을 퍼뜨렸다. 겨우 꿀꺽 삼켰지만 온 입 안에 남은 쓰디쓴 맛과 향은 가시질 않았다. 절로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레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뒤흔들고 황급히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속았어! 이게 뭐야, 다 녹아 버리잖아? 으으, 너무 쓰다. 라엘, 단 것도 없이 나보고 이걸 먹으라고 한 거예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 거라니. 진짜 아이가 따로 없다.
“……이거 다 먹어야 해요?”
“네. 다 먹어야 합니다.”
아직 두 개 더 남았다고 외치는 접시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 없이 삼킬 수 있을까.’
최대한 혀에 닿지 않고 약을 넘기기 위해 고민하던 레이는 웃음기가 남은 라미엘의 얼굴을 보며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안 먹는다고 너무 평온한 건 아닌지.
레이가 톡톡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라엘, 여기 내 옆에 가까이 앉아 봐요.”
고분고분 그가 자신이 시키는 대로 자리를 잡자 레이는 결심한 얼굴을 하고 약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두 개를 한꺼번에 먹은 탓인지 좀 전보다 더 지독한 쓴맛이 입 안을 채웠다.
그리고 레이는 물을 마시는 대신 라미엘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이 방 안에 단 것이라고는 이 남자뿐이고, 이 쓴맛을 혼자 즐기는 것도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니 함께 느껴 보자는 의미였다.
갑작스런 키스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인 라미엘은 이내 입 안으로 몰려드는 따뜻하고 달면서도 쓴 레이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흐읏. 음.”
깊어지는 입맞춤에 레이의 입 안에서 약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독하게 달콤한 입맞춤과 지독히도 쓴 약 기운이 한데 어우러졌다. 쓴맛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아.”
어느덧 라미엘 아래에 깔려 진득한 키스를 받아내던 레이가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로 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약 먹을 때엔 이렇게 단 거 꼭 옆에 두기예요.”
지난밤과 같은 볼 색이 되어서는 귀엽기 짝이 없는 말을 한다.
“……그렇게 하죠.”
레이는 여전히 자신의 위에 있는 그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쪽, 도장을 찍듯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