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평온
아쉽게 키스가 끝나자 라미엘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녀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것 이상은 할 수 없다.
“아차. 라엘, 간밤에 잘 잤어요?”
이제 와 지난밤 안부를 묻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레이의 물음에 간밤에 있던 일들이 생각이 나긴 했다.
“……네.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요. 난 좀 아팠거든요.”
잠결에도 아파서 낑낑대던 레이에겐 미안하지만 라미엘은 정말로 간밤에 아주 잘 잤다.
자신 역시도 고된 하루를 보냈기에 그랬던 건 아닐까 여기기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평생 ‘푹’ 자 본 적이 없었으니까.
라미엘은 근처에 사람이 있거나 기척이 느껴지면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자는 둥 마는 둥 거의 눈만 감고 있다시피 했고, 불안함에 푹 잠들지도 못했다.
기척에 예민해서 아주 작은 소리에도 쉽게 잠에서 깼고 언제나 얕은 잠을 자곤 했다.
어린 시절,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도 그를 탐탁잖아 하던 루이반의 하인들은 모자를 편히 자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루이반 후작이 아예 라미엘에게 마음을 돌렸을 때는 하인들이 집안의 골칫덩이를 해결해 주인의 마음을 산답시고 잠든 아이를 질식시켜 버리려 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루이반을 떠나온 토벌전에서도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편히 잠들 순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잠자는 시간이란 하루 중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시간이었다.
평생을 선잠만 자며 살았던지라 라미엘은 오랫동안 자거나 푹 자고 일어났더니 개운하다는 레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한 방, 그것도 한 침대 위에 사람이 있음에도 온전히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신을 해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비록 약하지만 본인 나름의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만이 방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심 그를 편하게 만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평생 불안을 끌어안고 살던 제게 이제야 찾아온 평온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잠인 셈이다.
커다란 침대의 끝과 끝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
레이의 눈이 감기자마자 라미엘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야말로 초고속 수면이었다. 그녀가 겪은 사냥제의 고됨이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통증이 심한 부분이 따로 있는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안 아픈 부분을 찾는 듯한 움직임에 라미엘은 바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 하인들을 불렀다.
“통증 완화하는 약, 아침까지 당장 구해 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작 부인 식사는 랭 스트리트 흰 골목 안쪽에 있는 식당, 거기 아침으로.”
“예. 그리하겠습니다.”
더불어 별장에 기본적인 치료제를 상비해 두라고 추가로 명령한 뒤에 라미엘이 방으로 돌아오자 침대 밖으로 떨어질 것처럼 팔다리 한 쪽씩을 침대 밖으로 걸치고 있는 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사이 구르고 구르다 저기까지 간 모양이었다. 라미엘은 침대로 돌아가 떨어지기 직전의 레이를 안쪽으로 옮겼다.
“뭘 해도 다 똑같이 아플 텐데.”
그런 와중에도 깨지 않고 계속 자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으음.”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레이가 다시 몸을 뒤척인다. 이러다 또 침대 가장자리로 굴러갈까 봐 라미엘은 레이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살짝 당겼다.
그녀는 당긴 방향으로 데굴데굴 구르더니 그의 몸에 턱 부딪치고는 멈췄다. 잠버릇이 고약한 건지, 몸이 아파서 잠결에 이리 바쁜 건지.
자는 레이의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는 건 처음이라 그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길이 막히자 고롱고롱 얌전히 자는 걸 보니 후자인 듯하다.
간간이 통증에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고 짠한데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이젠 뭘 해도 그냥 웃음이 나는구나.’
고요하고 어둑한 침실엔 이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없이 새근새근 숨소리만 가득하고, 사냥제 때와 다르게 평온해진 날씨는 바람조차 불지 않아 창밖도 쥐죽은 듯 고요했다.
레이의 일정한 숨소리를 들으며 라미엘은 눈을 감았다. 품에 있는 그녀가 혹여 또 저 멀리로 굴러갈까 봐 꼭 안고 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땐 해가 제법 밝은 아침이었다. 새벽도 아닌 아침.
새소리가 들렸고 최대한 기척을 죽인 하인들이 방 밖에서 분주히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소리가 들리는데도 잠을 잤다고?’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는 시기이다. 그러니 새벽같이 일어난 하인들은 조명을 켜고 몇 시간 전부터 일을 시작했을 터였다.
하인들은 최대한 주인 내외의 방 근처를 피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겠지만, 그 정도 기척과 소리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되도록, 날이 밝을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깊게 잠들었던 것이다.
언제나 일어나면 머리가 조금 빙 도는 느낌이었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개운하고 상쾌하다는 말이 뭔지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껴졌다.
라미엘이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음에도 품 안의 레이는 여전했다. 미동도 않고 눈을 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뒤 레이의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주었다.
침대를 벗어나는 몸이 가뿐했다. 눈을 뜨면 항상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낯설면서도 편안하다.
***
“라엘, 뭔가 달라요.”
레이는 맞은편에 앉은 라미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평소와 똑같은데 평소와 전혀 다른 얼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딱 그랬다. 라미엘의 미모야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데 오늘따라 유독 더 맑고 깨끗하며 빛이 난다.
아침에는 내내 커튼이 쳐진 침실에만 있었고 몸이 아파서 이 미묘한 변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볕이 잘 들어오는 밝은 공간에, 약기운이 돌아 통증이 완화된 지금에서야 눈에 보이는 차이였다.
“레이, 어디 아픕니까.”
“아픈 건 여전히 똑같은데요.”
“다르다면서요.”
“아아, 내 몸 상태가 아니라 라엘이 다르다는 말이었어요.”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말을 할 것 같았는데 라미엘은 대답 대신 자신의 얼굴을 슥 한번 훑고는 별말이 없다.
“뭐가 다르냐고 안 물어보네요.”
“알 것 같아서요.”
“아침에 거울 좀 보셨나 봐요.”
본인의 미모가 오늘 유독 빛난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늦잠을 잤거든요.”
늦잠? 늦잠이라니. 그건 내가 잔 거고. 아침 7시 반에 일어났다던데 그걸 누가 늦잠이라고 해?
레이는 라미엘이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늦잠이에요? 왜? 물론 평소에 라엘이 워낙 이른 시간에 일어나긴 하지만 아침 7시는 그 누구도 늦잠이라고 쳐 주지 않는다고요.”
“……늦잠이 아니라면 잠을 자서, 인가?”
그건 또 무슨 소리랍니까.
“제대로 잠을 자 본 게 처음입니다. 왜 레이가 주변이 시끄러워도 계속 잘 수 있는지 알았어요.”
“……라엘. 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잠을 처음 자다니 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모르는 은어 같은 게 있나?”
라미엘은 덤덤하게 간략히 자신이 예민해서 평생 잠을 푹 자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어떻게 사람이 잠을 안 자고 살 수가 있어요?”
“사실 오늘 전까지 잘 자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깊게 못 자는 것뿐이지 충분히 잘 자고 있다고.”
라미엘의 까칠함이 태생적인 것도 있지만 환경이 더해져서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 남자 생긴 건 설탕인데 삶은 소금이야. 왜 이렇게 인생이 짠 내가 나.
“어휴, 이리 와 봐요.”
레이가 팔을 벌리며 라미엘을 불렀다.
“지금 당장 한 번 안아 주고 싶은데 내가 거동이 불편해서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러니까 라엘이 와요.”
코웃음이나 칠 줄 알았는데, 인생 첫 잠은 사람을 동글동글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라미엘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어, 정말? 잠깐. 라엘, 무릎까지는…….”
그러고는 레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금빛 눈동자에 자신이 한가득 담긴 것을 보며 레이는 힘껏 라미엘을 끌어안았다.
‘라미엘 루이반을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다 오네.’
온몸은 지끈거렸지만 마음만은 폭신하고 따뜻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예쁘게만 굴어요.”
레이의 말에 품 안의 라미엘이 가볍게 웃는 게 느껴졌다.
그때 마차 위에 무언가가 퉁,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야.”
그리고 당황한 크레하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크레하가 뭔가 조치를 취하는 듯 마차 지붕이 쿵쿵거렸다.
“무슨 일이야.”
“웬 짐승이 마차 위로 뚝 떨어져선 꼼짝도 않습니다. 뭘 해도 움직이지 않는데, 죽일까요?”
왜일까. 보지도 않았는데 그 짐승이 뭔지 알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설마, 혹시.’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떠오르는 건 딱 하나뿐. 라미엘의 표정을 보니 그 역시도 레이와 같은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크레하 경, 그 짐승 혹시 하얗고 약간 좀 개같이 생겼어?”
레이의 질문에 크레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네, 맞아. 설마가 사람 잡았네.
“……라엘, 이건 어떤 경우인가요?”
새끼 울프 드래곤이 워크산을 떠나 여기까지 쫓아온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하아.”
라미엘의 표정을 보아하니 몹시도 귀찮은 일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