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우승자 (1)
워크산 제1 구역에 있는 주 수련소는 3층 규모의 대연회장과 백여 명 이상 수용 가능한 숙소가 있는 대형 시설이었다.
신관들이 처음 베롬에 오면 이곳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뒤, 각 구역에 있는 수련소로 옮겨 가서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주 수련소는 사냥제가 되면 관련한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중심 사무실이 된다. 사냥제 첫날의 오리엔테이션과 시상식은 대연회장에서 치러지고, 신관들의 숙소는 사냥제 참가자의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 오늘 하루 늦춰졌던 시상식이 드디어 준비를 마쳤다. 산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던 사냥감들도 회수했고, 참가자들의 안위도 모두 확인을 마쳤다.
곰 한 마리를 잡았다면 사냥제 1등은 떼어 놓은 당상이겠지만, 올해는 토벌전 출신자들의 참여가 많았던 만큼 예년에 비해 확실히 난도 높은 사냥감이 많이 나온 듯 보였다.
‘산에 내버려 두었던 곰 머리는 찾았을까. 이전에 라미엘이 뺏겼다던 곰까지 찾으면 곰 세 마리 잡은 건 확인이 될 텐데.’
곰을 세 마리나 잡았지만 증거품은 현재 한 마리뿐인 라미엘의 결과는 그야말로 알 수 없게 되었다.
“왜 안 모이죠?”
레이의 통증 치료가 끝이 났음에도 아직도 사냥제 참가자들은 각자의 방에서 대기 중이었다. 본디 시작 시간보다 시상식이 늦어진다는 안내를 받긴 했지만 예정보다 한 시간을 넘게 아무 소식이 없으니 의아하긴 했다.
레이의 방에서 함께 대기 중이던 라미엘이 대답했다.
“이번 사냥제에 변수가 많아서 순위 선정에 고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하긴.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13년간 쭉 이어져 오던 사냥제의 허점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고, 대신전측에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똑똑.
레이와 라미엘이 있는 방에 노크 소리가 났다.
“말씀하신 케이지가 도착했습니다.”
“여기 둬.”
라미엘이 말한 야생동물용 철창 케이지가 도착했다.
레이는 발치에 엎드려 있는 하얀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분명 푸엥만 한 크기였는데 지금은 작다. 워크산에서 만난 것과 다른 울프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미간의 작고 희미한 마름모꼴 검정 털이 똑같았다. 아마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막기 위해 모습을 줄이고 여기까지 열심히 쫓아온 거라 추정되었다.
라미엘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짐승은 떼어놔 봤자 또 따라붙을 게 분명해 일단 어쩔 수 없이 강아지인 양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골치 아플 일이 벌어질 테니 울프 드래곤의 존재는 함구하도록 했다.
“시상식 동안 잠시 넣어 두도록 하죠.”
라미엘이 움직이거나 말을 할 때마다 울프 드래곤의 귀가 쫑긋거렸다.
‘개가 따로 없네.’
“여기 잠깐 들어가 있어.”
레이가 케이지를 열고 손으로 안을 가리켰다.
“금방 와서 꺼내 줄게. 잠깐만 있어.”
당연히 짐승이 말을 들어먹을 리도 없고, 듣는다 하더라도 먹이도 뭐도 없는 빈 철창에 순순히 들어갈 리는 없었다.
“레이, 그 짐승은 푸엥이 아닙니다.”
“알아요. 근데 어린 새끼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좀…….”
레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상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라미엘은 가차 없이 울프 드래곤을 덥석 붙잡아 케이지에 넣고 걸쇠를 잠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기가 갇힌 것도 모르던 울프 드래곤이 약 3초 뒤 상황을 파악하고 강아지처럼 울기 시작했으나 라미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레이, 가요.”
“저기요, 라엘. 얘 울고불고 난리 났는데요.”
자그마한 입으로 철창을 캉캉 물어 대며 그르렁, 뀨뀨, 케이지 안이 난리가 났는데도 라미엘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조용히 해. 여기서 난동 피우면 너 큰일 나.”
울프 드래곤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으나 실제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눈앞의 새끼는 어려서 아직 못 알아들을 게 분명했다. 레이가 동물을 상대로 백날 착하게 말해 줘 봤자다.
라미엘은 이불을 끌어다 철창 위에 덮었다. 그리고 방 밖에 서 있던 크레하를 불렀다.
“이거 잘 지키고 있어.”
시야가 가려지니 난동을 부리던 동물이 잠잠해졌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으나 크레하를 옆에 붙여 뒀으니 돌발 상황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루이반 기사단장 크레하는 베롬까지 와서도 펫 시터 당첨이었다.
***
시상식장은 지정석이었다.
각자 가문 이름이 적힌 곳에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시상자와 사회자가 등장했다.
시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순위 집계에 이런저런 변동이 있었다는 것과 내년부터 방식이 크게 바뀔 것이란 안내가 나왔다.
“오래 기다려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사냥제 시상을 시작하겠습니다!”
레이는 잡은 짐승이 없으니 순위에 있지도 않을 예정이었다.
사냥 출전자들은 다들 사냥복을 입고 왔으나 레이는 평범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시상대에 오를 일이 없으니 굳이 사냥제 분위기를 낼 필요도 없었다.
오늘 시상의 관건은 곰 세 마리를 잡았으나 증거가 고작 곰 머리 하나뿐인 라미엘의 순위였다. 본디 곰 한 마리만 되어도 1위였겠지만 이번엔 토벌전 출신 기사들이 많아서 순위 예측이 가늠되질 않았다.
“2부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2부는 남 얘기였다.
사냥제 우승을 응원하는 가문도 없고, 루이반에서 나올 일도 없으니 레이는 연달아 나오는 발표에 축하한다는 듯 박수를 쳤지만 별생각 없이 손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영예의 1위는 2부 사상 최대 실적입니다! 무려 곰 한 마리와 늑대 한 마리!”
레이는 기계적으로 박수나 짝짝 치다가 사회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발표한 내용에 깜짝 놀랐다.
“곰과 늑대라면 1부 실력 아닙니까.”
“2부 몰이꾼들이 잡은 걸 쳐 주는 게 아닐까요? 수상 방식 바꾼다고 했잖아요.”
2부 몰이꾼으로 참여했던 루이반 기사들과 마그스너의 몰이꾼들이 늑대를 잡으면서 기존 방식으로는 순위를 선정하기 애매해졌다. 늑대를 한두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를 잡은 탓에 몰이꾼이라고 무조건 순위에서 제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1부 참가자도 아닌 자들에게 시상을 하기도 이상하고, 2부로 시상을 하자니 그들이 전문가라는 게 2부 형평성에 맞지를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 시상을 주최하는 신관들의 의견이 좀처럼 통일되지 못했다.
결론을 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신관들은 애초에 순위 선정 방식이 그르다는 사실을 집어냈다.
원래 방식이라면 늑대 두 마리를 잡은 것으로 2부 2순위는 마그스너 영애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몰이꾼이 몰아다 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사냥을 해다 바친 상황이기 때문에 온전히 참가자 본인의 깜냥이라 볼 순 없었다.
심지어 함께 늑대 사냥을 한 루이반 기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마그스너 가문의 몰이꾼들은 늑대를 잡던 중간에 사라졌다고 했다. 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엄벌에 처해질 듯하니 상황을 파악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간 것이다.
결국 신관들은 그간의 진행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냥제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냈다.
생각도 못 한 2부 우승자의 사냥감 소식에 조금은 고요하던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승자는 사냥에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 두 마리에 치명상을 입혀 다른 사냥꾼들이 쉽게 사냥할 수 있게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는 2부 사냥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은 바, 그 실력을 인정해 시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2부의 숨은 실력자 등장에 모두가 술렁이며 저마다 우승자를 점쳐 보았다.
“자, 발표하겠습니다. 2부 1위, 우승자는…….”
모두의 궁금증이 극에 달하니 사회자도 밀당하는 재미가 생기는지 자꾸 뜸을 들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레이는 그 틈을 타 옆에 앉은 라미엘의 귀에 속삭였다.
“라엘, 대단하지 않아요? 어쩜 2부인데 곰이랑 늑대에 치명상을 입혔대요. 저번 오리엔테이션 때 보니까 2부에 십 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귀엽고 다부진 총각 한 명이 있던데 그…….”
“레이알렉시스 루이반 공작 부인입니다!”
“뭐?”
“뭣?”
레이와 라미엘이 동시에 외쳤다.
장내에 일순 고요가 내려앉았다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귀여운 총, 우승자?”
“누가 뭘 해? 내가 뭘?”
당사자도 당사자 남편도, 그들의 기사들조차 상상도 못 한 정체였다.
“사냥감 회수를 위해 워크산에 올랐을 때 죽은 곰과 늑대들 중 두 마리에 처음 보는 특수한 촉이 급소에 박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아보니 이는 리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무기로, 루이반 공작께서 공작 부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세상에 하나뿐인 무기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그 후의 설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레이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고 루이반 기사들은 마님이 해냈다며 포효를 하고 난리가 났다. 내내 지루한 얼굴을 무표정 아래 깔아 두던 라미엘 역시 즐거운 표정으로 레이의 우승을 축하했다.
“레이, 뭐 해요? 얼른 올라가야죠.”
정신을 못 차리는 공작 부인을 다독인 건 남편인 공작이었다.
라미엘이 가볍게 등을 떠밀었고 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시상대에 올랐다. 다들 사냥복 차림인데 우승자라는 사람이 드레스를 입고 있자니 이질감에 약간 창피함이 몰려왔다.
“축하드립니다. 공작 부인.”
“감사합니다.”
옷 입을걸. 사냥복 입을걸!
‘어떻게 내가 1위를 한 거야? 곰 맞힌 건 기억이 나는데 늑대는 또 언제 맞혔지?’
주최 측이 맞다니 맞는 거겠지만 너무 얼떨떨하고 믿기질 않아서 레이는 계속 정신이 멍했다.
“우승자는 상금 1라블과 기도식에 대표 기도를 올리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1라블!
정신이 번쩍 드는 액수였다.
상금도 있는 줄은 몰랐다. 기도 대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우승 소감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밝고 청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낮입니다. 제 사냥 훈련을 열심히 해 준 루이반 공작님께 이 영광을 바치겠어요.”
눈 밑으로 찰싹 달라붙은 광대를 느끼며 레이는 저 앞에 앉아 있는 루이반 공작 각하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