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64화 (64/160)

64화. 우승자 (2)

“아이차암.”

레이가 우승패를 보며 히죽거렸다.

“그렇게 좋습니까.”

2부 시상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내내 품에 꼭 안고 있다가 이제 막 내려놓은 참이었다. 잘 두었나 했더니 케이스에서 도로 꺼내 들어 손으로 슥슥 쓰다듬고 품에 안고 있다.

“응. 진짜 좋아요. 아이, 어쩜 이걸 다 받았지?”

이러려고 그 고생을 했었나 보다며 레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레이 본인보다 더 흥분하고 기분 좋은 상태인 건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보이는 사람마다 루이반 공작 부인 자랑을 하고 다녔다.

팔불출도 저런 팔불출이 없다. 라미엘이 체통, 예의를 지키라 엄히 명령만 안 했다면 저들은 베롬에서 루이반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레이의 우승을 자랑했을 것이다.

“치료받았어도 몸이 완전히 안 아픈 건 아니었거든요? 근데 이거 받으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레이, 정신력이 좋네요.”

“칭찬이죠? 왜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

“칭찬입니다.”

“호옥시! 라엘, 내가 너무 대단해서 질투하는 건……. 아하핫. 원래 좀 잘난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런 맘이 들기도 하는 법이죠.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라미엘이 별말이 없어도 레이는 꺄륵꺄륵 웃으며 마냥 즐거워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다가도 레이가 동그랗게 휘어진 눈으로 활짝 웃는 걸 보면 그간의 훈련이 헛되진 않은 듯해 그 역시도 조금은 즐거워졌다.

“레이가 아프지 않다니 그거 하난 다행입니다.”

어, 이렇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기 있나. 눈을 왜 이렇게 예쁘게 뜨고 날 쳐다보지? 유혹하는 건가?

“아, 지금은 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약간 곤란해요.”

“레이, 그게 무슨 말…….”

“이따가 키스해 줄게요.”

라미엘이 약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당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걸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가요?”

그럼 아니냐? 지금 눈빛이 심하게 섹시했다고.

“아니면, 레이가 원래…….”

원래 뭐, 뭐요. 뭐. 내가 키스 좋아하는지 그간 어떻게 알았겠냐고요. 모태 솔로인 것을.

근데 키스만 생각나는 거 보면 약간 귀여운 변태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니야. 나 변태는 아닌 게 맞아. 이 정도면 누구나 그래.”

레이와 말을 하면 가끔 대화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 우승 이야기에서 갑자기 변태가 나올 상황인가.

사뭇 진지한 변태는 아니라는 발언에 라미엘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네? 뭐가요?”

“변태가 아니라니.”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야. 내가 그 말을 했어요?”

“대체 공작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라미엘이 레이의 이마를 톡 검지로 가볍게 찍었다. 그와 동시에 레이의 얼굴에 붉은 빛이 퍼졌다.

‘말하려던 게 아니라 속마음이었구나.’

이젠 진짜 웃음이 나왔다.

솔직한 공작 부인 덕분에 그는 살면서 웃었던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레이를 만난 이후 더 많이 웃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1부 우승자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발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레이와 라미엘도 자세를 고쳐 잡고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레이의 얼굴은 아직도 약간 빨갰고 라미엘의 얼굴엔 가볍게 미소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분위기가 정돈되자 사회자는 지체 없이 발표를 시작했다.

“1부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5위는 새끼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오신 첼시 바버인 마이클레이 공작 각하!”

사회자의 호령에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이클레이 공작은 철창 안에 갇힌 새끼 호랑이를 모두에게 선보이며 단상에 올랐다. 아직 어린 새끼이기 때문에 시상식이 끝나면 바로 풀어 준다는 설명에 이어 4위가 발표되었다.

“4위는 늑대 네 마리를 잡은 루이반의 기사 톰입니다!”

“어머! 정말?”

예상외의 수상자에 레이가 놀란 얼굴을 했다. 톰 역시도 자신이 당연히 순위에 없을 거라 예상했다가 놀라서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2부 일원으로 참가를 하였으나 사냥제에서의 공이 큰 바, 내부 회의를 거쳐 시상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은 대연회장 5관 구역에 이의 신청을 하시면 됩니다.”

누가 루이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이런 여론을 익히 알고 있는지 사회자는 익명은 철저히 보장된다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루이반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아마 이의를 신청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냥제 운영 방식의 허점을 알아챈 건 비단 주최 측인 신전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참가자들 역시도 사냥제 우승자 선정 방식이나 구역을 나누는 등의 일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에 루이반 기사를 순위에 선정한 것은 틀린 걸 바로잡기 위한 일 중 하나일 것이었다.

“톰, 축하해!”

레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한 톰이 멋쩍게 웃었다.

“전부 마님 덕분입니다.”

톰의 인생 첫 수상은 주인마님의 축하 속에 이루어졌다.

“3위는 늑대 한 마리와 여우 한 마리, 곰 한 마리를 잡은 노트완의 기사 딘입니다!”

3위에서 곰이 출현했다. 늑대가 네 마리나 되는데 4위인 것도 그렇고 역시나 레벨이 다른 사냥제가 맞았다.

“노트완 기사, 저분 토벌전 출신이에요?”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2위는 곰 두 마리를 잡은 라미엘 루이반 공작 각하!”

“토벌전 기사들은 전부 황실에서 데려가는 줄 알았, 뭣?”

지금 2위라고 그랬어? 2위?

당연지사 1위를 예상하던 이름이 2위에 거론되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술렁였다.

“누가 2위? 라엘, 들었어요? 곰 두 마리로 2위라고?”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데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란 듯했다. 이번 사냥제의 최대 이변은 죄다 루이반이 가져가는 중이었다.

“왜 둘이지?”

라미엘의 순위가 어찌 될지 궁금하긴 했지만 설마 아예 하나가 집계조차 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루이반 공작 각하께서는 곰 세 마리를 잡으셨으나…….”

이어지는 사회자의 말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뭘 세 마리나 잡아?

“한 마리는 야생 동물에게 먹혀 뼈만 남은 상태라 공작께서 잡았다는 명확한 사실 확인이 어려워서 제외되었습니다.”

팔이 잘린 곰이 있을 것이라던 라미엘의 말대로 곰의 뼈엔 팔 한쪽이 없긴 했다. 매끈한 절단면으로 보아 힘이 세고 실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베어 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라미엘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진 않았다.

이 문제 역시도 신관들이 골치깨나 아프게 논의를 해야 했다.

팔이 한쪽 없다 했으니 라미엘이 말한 대로니까 맞다, 이번에 토벌전 출신 기사들이 출전을 했으니 이런 실력자들은 많다, 라미엘로 단정할 순 없다.

팔 하나 베었으면 그걸 증거로 가져오면 되지 왜 없겠냐. 그럼 그 팔은 왜 뼈만 남았냐, 이전에 곰 사체가 있었는데 뼈만 잘라 놓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냐.

논의가 길어지려는 조짐에 확실한 사냥감을 보이지 못하면 그건 무효로 처리한다는 사냥제 원칙을 따라 라미엘의 곰 한 마리는 무효가 되었다.

“이의가 있으시면 5관 구역에 말씀하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술렁이는 여론에 사회자는 다시 한번 이의 신청에 관해 고지를 했다.

“이어서 대망의 1위입니다. 곰 두 마리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은 황실 기사단의 테스입니…….”

그런데 영광의 1위를 발표하는 순간 하늘에서 단상 위로 무언가가 쿵 소리를 내며 뚝 떨어졌다.

“……다? 무, 무슨 일이죠?”

“이런.”

추락한 물체를 보자마자 정체를 바로 알아차린 라미엘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낯익은 저 철창 덩어리.

라미엘의 표정을 보자마자 레이도 바로 눈치를 챘다.

“라엘, 빨리 그냥 도망가요.”

“크레하도 치우고 달려온 놈인데 효과가 있을까요.”

“그, 그렇긴 하죠?”

라미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크레하가 사색이 되어 나타났다.

“저 개새, 저게 케이스째로 벽을 부수고 날아간 통에…….”

멸종 직전의 희귀 동물이니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무작정 막을 수도 없어서 케이스를 안고 있었더니 불을 내서 철창을 뜨겁게 달궜다고 했다.

약하게 화상을 입은 크레하의 손바닥이 벌게진 걸 보니 말하지 않아도 그의 노고를 알 것 같았다.

“역시 그때 그냥 죽…….”

“그건 아니에요.”

깡깡깡!

철창이 바닥을 때리는 명쾌하고 맑은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더니, 라미엘의 발밑까지 굴러온 찌그러진 케이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너덜너덜해진 문이 끼익거리며 벌어지고 그 안에서 입에서 연기를 내뿜는 작은 짐승이 기어 나왔다.

‘망했다.’

그냥 나왔으면 개라고 둘러댈 수 있었는데 입에서 불을 뿜고 있으니 저건 누가 봐도.

“우, 울프 드래곤?”

정적이 내려앉은 시상식장에 푸드덕거리며 새가 날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

1부 시상을 잠시 미루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멸종 직전의 희귀 동물인 울프 드래곤을 어찌할 것인가 정하기 위해서였다.

생각도 못 한 중대 사안에 게이트를 열어 대신전에서 헤덴과 워크산 동식물을 담당하는 신관, 드래곤 연구의 권위자까지 불러 모았다. 그렇게 회의를 위해 모인 6인은 가장 큰 의자 하나를 비운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예하께서는 참석 않으십니까?”

셀릭의 질문에 토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 오셨습니까? 아, 그 인, 헤덴 예하께서 저보다 먼저 게이트 이용하셨는데.”

분명 ‘그 인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가 사라진 토마의 진심을 듣고 속으로 애도를 보냈다. 대신관의 직속 수석 비서인 토마의 수척한 얼굴을 보면 그 인간이 아니라 그 새X라 칭해도 괜찮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레이는 저도 모르게 품에 안긴 울프 드래곤을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털이 손가락 사이에 사락사락 감기는 느낌이 들자 집에 있는 푸엥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내 새끼. 이 정도로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은 없는데.’

레이의 표정을 라미엘이 빠르게 잡아냈다.

“레이, 어디 불편해요? 그거 이쪽으로 넘겨요.”

“아뇨. 푸엥 보고 싶어서요.”

울프 드래곤을 데리고 있던 라미엘도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울프 드래곤은 라미엘의 심상찮은 기운을 빠르게 감지하고는 레이의 품에 꼭 안겼다. 마차에서 제 목숨을 걸었던 게 라미엘이었다면 이번엔 레이에게 건 것이다.

결국 레이도 울프 드래곤의 현 보호자로 강제 참석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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