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우승자의 일상
“출입증 보여 주십시오.”
도서관으로 들어서려는데 입구의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출입증이요?”
“예. 도서관에는 외부에 가지고 나갈 수 없는 연구 자료가 많아서 외부인들은 사전에 출입 허가를 받아야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예상 못 한 출입 거부였다.
“출입 허가는 어디에서 받아야 하는데요?”
“출입 이틀 전에 서가 관리부 신관에게 말하면 전용 허가증을 만들어 드립니다.”
“이틀 전이요?”
“네. 허가증 만드는 데 그 정도 걸려서.”
뭐야. 그럼 지금 허가받아도 이틀 뒤에나 쓸 수 있는 거잖아? 당장 못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얘네들 귀족 싫어한다더니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그때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간 여자가 비틀거리며 레이 곁을 지나갔다.
“소사렐.”
응대를 하던 남신관이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벌써 교대 시간인가?”
남자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빨리 가. 지금 벨라 서적 다 뗐어.”
“하필 지금?”
남자의 얼굴엔 절망이, 소사렐이라 불린 여자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제발, 신입 신관은 언제 뽑는 거야. 이러다 과로사 하겠어!”
“빨리 가. 지금 막 작업 시작했으니까. 중간부터 들어가면 알려 줄 사람도 없을걸?”
소사렐의 말에 남자는 아, 그렇지, 하며 후다닥 자리를 정리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짧은 대화로 출입증 발급에 이틀이 걸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독하게 많은 업무량에 사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소사렐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까지 남자가 있던 자리로 가서 앉아 물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출입증이 없어요.”
“음, 곤란한데요. 그럼 혹시 아는 신관 없어요? 약간 뒷수작이긴 한데 그 신관의 신분 확인증 쓰면 되긴 하거든요.”
소사렐은 작은 목소리로 몰래 꼼수 하나를 알려 주었다.
대신전에 아는 신관이라곤 헤덴 하나뿐인데.
“……아는 분이 있긴 해요. 그분의 신분증은 아니지만 절 여기로 초대하시면서 이걸 주시긴 했어요.”
레이는 가지고 있던 헤덴의 편지를 주섬주섬 내밀었다.
소사렐은 레이가 내민 편지의 붉은 인을 보자마자 당황했다.
“헤덴 예하……시네요.”
“제가 아는 신관은 그분뿐이에요.”
소사렐이 책상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위로 올렸다. 커다란 돋보기같이 생긴 흰색 물체였는데 소사렐은 레이의 편지를 그 렌즈 아래에 가져다 두었다.
투명한 렌즈 한가운데에 금빛으로 문양이 떠올랐다.
“예하께서 보내신 게 맞네요. 출입 허가합니다. 두 분, 들어가셔도 됩니다.”
인의 진품 여부를 확인하는 특수 장치였던 모양이다.
레이는 돌려받은 헤덴의 편지를 다시 잘 챙겨 주머니에 넣고 라미엘과 함께 대신전의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우와.”
도서관이 아니라 책 전시관이 아닐까. 절로 탄성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흰 벽엔 수도 없이 많은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책장 하나하나에 고풍스러운 금빛 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구역을 표시하는 작은 표지판은 조명까지 달려 빛을 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책을 읽을 수 있게 놓인 커다란 흰 책상에는 신관들이 드문드문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 가운데는 작은 홀같이 꾸며져 있었는데, 천장에는 어린 천사들이 노닐고 있는 하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사람들을 감싸듯 자애로이 양팔을 벌리고 미소 짓는 금빛 신 조각상이 있었다. 이런 장식들이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라엘, 도서관이 너무 예뻐요.”
만약 여기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선택일 것 같다.
대신전 도서관에 오는 일이 인생에서 몇 번이나 될까. 심지어 눈이 즐거운 공간이다.
“여기서 책 읽고 저녁에 축제 가면 오늘 하루가 너무 완벽할 것 같아.”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잠시 멈칫했다. 오늘 하루를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게 신기했다.
자주 올 수 없는 공간에 왔다고 해도 매일매일 쌓이는 수많은 날 중 하루일 뿐이다.
미래를 기대해 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미래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을 기대해 본 적이 있던가.
살아남기에 급급했고 그의 예상대로 현실이 된 미래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루이반 후작과 휘하 가솔들, 그리고 루이반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위대함은 막상 겪어 보니 별게 없었다.
생활의 편의는 확실히 좋다고 말할 수 있다. 하층민의 삶보단 월등하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어도, 적어도 의식주로 인한 목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확실히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엔 뭐가 있나. 대단하고 굉장하다는 이 가문이 미래에 없다고 과연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 언제나 별거 없는 그저 그런 하루가 켜켜이 쌓일 뿐이었다.
그런데 레이는 지금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기대된다고 말하고 있다. 라미엘은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축제, 기대했는데 예상보다 별로라서 일부러 나온 게 실망스러우면. 그러면 레이는 어떨 것 같아요?”
라미엘의 질문에 레이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음, 일단 뭘 해도 우리가 먹을 저녁보단 재미있을 거예요.”
오늘 저녁은 분명 심심하고 양도 적을 것이다. 이거 하난 확실하다.
“축제가 실망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기도식 전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을 했잖아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레이는 대답을 하는 중에 라미엘이 물어본 것이 비단 전야제에 대한 것만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내가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해서 그만큼의 것을 항상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기대하는 동안이 즐겁잖아요. 그 시간이 제법 재미있기도 하고.”
레이는 라미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라엘은 밤에 나랑 같이 나갈 게 기대되지 않아요?”
축제가 재밌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옆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즐거워할 레이를 상상하면 조금은 괜찮을 것 같다.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라미엘의 대답에 레이가 활짝 웃었다.
“그걸로 충분해요.”
대신전 도서관의 고급 논문 관리 구역에 갑자기 나타난 헤덴 때문에 잠시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여기도 별게 없네.”
레이가 품에 안긴 울프 드래곤의 흰 털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책을 내려놓았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지만 루이반이 앞으로 신전 기부금을 높여 내겠다는 라미엘의 말 한마디에 무사통과되었다.
신전이 매번 재정난에 고생이라는 말을 얼핏 듣긴 했지만 찔러도 논문 한 장 안 나오게 생긴 깐깐한 인상의 관리인이 기부금 한마디에 서고 문을 활짝 열어 줄 줄은 몰랐다.
서가에서 워크산 에너지에 관한 논문들을 찾아 읽었지만 빈 마력석에 대한 신통한 내용은 끝내 찾질 못했다.
“뭘 찾으러 온 게냐?”
헤덴이 만든 결계 철창을 부수고 도망 나온 울프 드래곤은 뛰어난 후각으로 루이반 부부를 찾아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얀 짐승에 놀라서 레이가 눈만 껌뻑이고 있자니 뒤이어 헤덴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다. 울프 드래곤이 탈출할 때마다 토마가 뒤처리를 맡았는데, 그가 잠시 자릴 비운 사이 도망쳤다고 했다.
여기저기 신출귀몰한 울프 드래곤인지라 한 번 우리를 나가면 여간한 신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바로 행적을 좇아 데려올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헤덴이 직접 오게 된 것이다.
“예하, 워크산 에너지에 대해 연구하시는 건 없으세요?”
“무슨 일인데?”
“추가로 논의드릴 게 하나 더 생겼거든요. 혹 에너지가 아니라면, 빈 마력석 활용 연구 같은 것도 하세요?”
“빈 마력석?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게야?”
그러게요. 저도 사냥제에서 이런 일까지 겪을 줄 몰랐습니다.
“기도식 끝나고 따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당연하지. 그러라고 내가 널 부른 게 아니냐. 그리고 너 그거 가져가라.”
헤덴이 레이의 품에 안긴 하얀 동물을 자연스럽게 떠넘겼다.
“귀엽긴 한데, 저 이미 한 마리 키우고 있어서 안 돼요.”
“울프 드래곤이 또 있냐?”
“설마요. 그리고 얘 제가 데려가면 시끄러워져서 안 돼요.”
“비밀로 해 주마.”
“귀한 짐승 저희에게 떠넘길 생각 마시고 예하께서 잘 보듬어 주십시오.”
라미엘이 가볍게 헤덴의 말을 쳐 냈다. 헤덴은 혀를 한 번 쯧, 차고 라미엘과 말을 섞기 싫단 얼굴을 했다.
“그 일은 기도식 끝나고 이야기해 보자꾸나.”
“네, 예하.”
레이의 손을 떠나게 될 것을 직감한 울프 드래곤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입으로 덥석 물었다. 가기 싫다는 뜻이었지만 헤덴은 다시 마력으로 결계를 만들어 가차 없이 울프 드래곤을 이공간에 넣었다.
결계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철창이지만, 실은 특수하게 공간을 변형한 것으로 워크산과 똑같은 환경이었다. 답답하지 않게 신경 써서 만들어 줬는데도 자꾸 탈출하는 걸 보니 울프 드래곤은 루이반 부부가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었다.
헤덴의 결계 철창에 갇힌 울프 드래곤이 뀨뀨 울어 댔다.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하울링을 하는 것 같은 입 모양을 보니 그러했다.
“얌전히 잘 있어. 보러 올게.”
레이가 다독이듯 한마디 해 주자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울프 드래곤의 입이 다물렸다.
“그냥 너희가 데려가…….”
“기도식 때 뵙겠습니다.”
라미엘이 무례하게도 헤덴의 말을 똑 잘라먹고 레이를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을 벗어났다.
“저, 저 고얀 놈.”
뒤에서 헤덴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도서관을 나오니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두 사람이 도서관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부부가 방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가 나왔다.
‘음. 또 풀이야.’
생선 네 점에 샐러드.
레이는 이번 끼니만큼은 불평 없이 먹었다. 입맛만 슬쩍 돋울 애피타이저라 생각하니 양이 부족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신나게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한 뒤 부리나케 침대에 누웠다. 부부가 머무는 곳의 복도 불까지 꺼지고 완전히 어둠에 휩싸였을 때.
똑똑.
레이 방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외출 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레이는 숨겨 뒀던 로브를 챙겨 입고 창문을 열었다.
“어, 우와…….”
창틀에 기대 있는 라미엘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흰 로브를 입은 라미엘의 뒤로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희게 빛나는 금안의 천사가 손을 내민다. 천국행이 확정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장면일 것 같았다.
“갈까요.”
라미엘이 내민 손을 꼭 잡으며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 뒤를 부탁해.”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라미엘의 침대에 크레하가, 레이의 침대엔 케이가 각자 자고 있는 행세를 하기로 했다. 혹시나 누가 들어와도 사람이 있어 보이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라미엘이 있으니 딱히 필요는 없겠지만 공작 부부의 호위는 엘과 톰 두 사람이 맡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남은 건 전야제를 즐기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