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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68화 (68/160)

68화. 전야제

은빛 머리카락과 검은 머리카락 남녀 한 쌍은 루이반 부부라는 게 널리 알려져 있어 최대한 얼굴을 가리는 차림새를 해야 했다.

두 사람은 남들이 보면 코와 입만 보일 정도로 로브의 후드를 최대한 깊게 내려 쓴 뒤 축제를 즐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가려지지 않는 라미엘의 몸매에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전부 한 번씩 그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가 루이반 공작이라는 생각까지는 차마 못 하는 듯했다.

“뜨거워.”

충분히 식히고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생선살 꼬치를 한입 깨물자 열기가 확 입 안을 채웠다.

“레이, 천천히 먹어요.”

라미엘이 손에 들린 음료를 내밀자 레이가 빠르게 한 모금을 마셨다. 시원한 과일즙이 입의 열기를 식히며 목으로 넘어갔다.

“하아. 숨통이 트이네요. 이제 좀 뭘 먹는 것 같네.”

소규모라고 해서 정말 작을 줄 알았다. 말이 축제지 축제 분위기도 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였다.

상가 앞에 줄줄이 늘어선 노점상은 스무 개는 되어 보였다. 섬답게 싱싱한 해산물이 먹음직스럽게 요리되고 있는 모습에 침이 절로 고였다.

늦은 밤까지 전야제를 한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악사들이 나와서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도 꽤나 많이 나와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 술에 취한 사람들의 고성도 들리고 어딘가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 손을 잡고 다니는 연인들이나 친구끼리 나온 듯한 무리도 보였다.

“다 먹으면 우리 저거도 먹어요.”

양 부족하고 심심한 식사만 한 지 만 하루. 자극적인 축제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라엘, 아.”

레이에게도 배가 고플 정도의 식단인데 라미엘은 말해 무엇 하나. 키도 크고 근육으로 똘똘 뭉친 몸이니 기초 대사량이 높을 게 당연했다. 그래서 레이는 라미엘의 입으로도 부지런히 음식을 날랐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던 라미엘도 이제는 알아서 척척 고개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입에 맞지는 않는지 처음 먹을 땐 미간을 설핏 찌푸렸으나 이제는 덤덤하게 레이가 내미는 걸 받아먹는다.

“맛있어요?”

“네.”

냉큼 튀어나오는 대답에 레이는 웃음이 나왔다.

“거짓말이죠.”

그의 본심을 알겠다는 얼굴로 레이가 생글거렸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레이는 계속 줄 거잖아요.”

누나 말 좀 들어, 예쁘게 굴어, 그 말이 여기서 이렇게 빛을 낸다.

“그야 라엘 배고플 테니까 챙겨 준 거죠. 저 해산물 구이만 먹고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오늘은 식당도 늦게까지 문을 연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언제까지고 주전부리만 할 수 없으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배고플까 봐 먹인 거예요?”

“네. 나한테도 배고픈 식단인데 라엘은 오죽할까 싶어서요. 그런데 라엘은 배가 고파도 딱히 뭘 챙겨 먹을 것 같진 않은 사람이니 내가 먹여야지 어쩌겠어요.”

그 말에 라미엘은 문득 이전에 크레하와 대련 중 연무장에 뛰어 들어왔던 레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라엘, 어디 다친 데 있는 거 아니죠?”

“사람을 그렇게 못살게 굴면 어떡해!”

“우리 라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가 ‘보호’를 느꼈던 순간이었다.

지금처럼.

그때는 미처 몰랐던, 마음이 들뜨고 따뜻해지는 그런 감각이 이제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 보이는 레이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그를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레이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일.

라미엘이 한 손으로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왜 그래요?”

손을 치우니 멍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레이의 얼굴이 보였다.

어버버.

레이는 이곳이 사람 많은 길거리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뻔했다.

뭐야, 저 표정.

조금 멍하고 나른하면서 절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어쩌질 못하고 살짝 휘어지는 눈꼬리.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는, 그런 오묘하고 지독하게 섹시한 라미엘의 표정에 레이는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라미엘이 후드를 깊게 뒤집어써서 정말이지 너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저 표정을 본 인근 남녀노소 모두 자기가 죽어서 천국에 왔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이게 내 남자라니.

“감사합니다.”

절로 감사 인사가 튀어 나갔다.

“뭐가요?”

“그냥 모든 게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 심경이었다.

레이는 라미엘의 손을 꼭 잡고 겨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오징어 구이 한 마리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축제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유독 사람들이 복작복작하게 많이 모여 있었다.

“저기에 뭐가 있나 봐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두말 않고 방향을 돌렸다.

레이가 사람들에게 닿지 않게 감싸 안듯 하며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보니,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테이블 위에 담요를 펼쳐 놓고 빠른 손놀림으로 컵 세 개를 뒤섞고 있었다.

축제에 빠질 리 없는 도박판이었다.

“주사위는 여기에!”

야바위꾼이 주사위가 있는 컵을 뒤집자 탄성과 환호가 동시에 들렸다.

승자는 당연히 없을 내기였다. 속임수를 써서 사기를 치고 있는 게 라미엘의 눈엔 훤히 보였다. 지금 환호하고 있는 남자는 한패인 게 분명했다.

승패가 뻔한 사기도박에 밀집된 인파. 사람들 틈에 레이가 치이지 않도록 막아서고 있느라 정작 주변 사람들과 계속 맞닿아 있는 건 라미엘이었다. 그의 표정에 아주 얕게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라미엘이 이만 가자고 하려는데 레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라엘, 내가 저녁 값 두 배로 벌어 올게요.”

잔뜩 들뜬 레이의 표정을 보니 그의 짜증이 쑥 내려갔다.

“내가 다 봤어. 싹 쓸어 줄 거야.”

레이가 너무 신이 난 눈치라 차마 이건 사기라고 말릴 수도 없었다.

‘일단은 즐기게 하고 나중에 처리하면 되겠지.’

저런 사기꾼 하나 잡는 것쯤 일도 아닐 터였다.

“주머니가 어디 있나.”

라미엘의 주머니를 찾아 옷을 뒤적이던 레이가 멈칫했다.

‘여기서 잘못 뒤졌다가 2차 가지 사건이라도 만들면…….’

레이가 라미엘의 몸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돈 줘요.”

“레이, 이게 정말 하고 싶어요?”

“그럼요. 자신 있어요.”

한국에 있을 때 숨은 그림 찾기, 틀린 그림 찾기 하면 레이알렉시스였다. 유주가 인정하는 눈썰미 왕이 바로 자신이었다.

레이는 라미엘이 내민 돈을 냉큼 손에 쥐고 척척 무대로 다가갔다. 그런 레이의 뒤에서 라미엘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바위꾼은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조금 전 야바위에 참여한 사람의 남편으로 예상되는 남자는 후드에 얼굴이 절반 이상 가려져 코와 입매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풍기는 기색이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무슨 짓을 하면 바로 목이라도 칠 것 같은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슨 짓을 해야 돈이 된다. 처음엔 후드 남자의 눈치를 보느라 사기를 못 쳤는데, 돈을 따는 데 재미 들린 여자가 이번에 판돈을 크게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매번 이렇게 사기를 치며 축제를 전전하고 있는 몸이니 마지막으로 한탕 하고 도망가면 된다.

‘이번 판에 크게 뽑아 먹고, 빨리 튀어 버리자.’

그가 결심을 마치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여기!”

매번 승전보를 울리던 레이가 선택을 마치자 구경꾼들이 흥미진진하게 야바위꾼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아쉽게 됐습니다!”

“아악, 안 돼! 말도 안 돼!”

마지막으로 한 판 하고 뜨려고 크게 걸었는데!

“레이디께서 안타깝게 마지막에 큰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아아! 아저씨, 사기 아냐? 나 분명 제대로 다 봤다고!”

“사기라뇨! 어찌 그런 말씀을! 사람들은 꼭 잃고 나서는 절 사기꾼으로 만드는데 정말 억울합니다!”

자기가 사기꾼이었으면 여태 돈 잃어 가면서 했겠냐는 말을 들으니 레이는 긴가민가해졌다.

“억울해서 안 되겠네. 기분 잡쳤으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야바위꾼은 라미엘의 눈치를 살피며 부지런히 판을 정리했다. 저 후드 남자가 다행히 아직 눈치를 못 챈 것 같으니 빨리 사라져야 했다.

야바위꾼이 막 몸을 일으켰을 무렵 라미엘이 나직이 한마디 했다.

“그대로 내려놔.”

시끄러운 와중에도 묵직하게 고막에 꽂히는 낮은 목소리였다.

야바위꾼은 못 들은 척 빠르게 도망칠 곳을 눈으로 훑었다. 경비대를 부르기 전에 빨리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

“사기 맞습니다.”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이 대답을 하는 동시에 야바위꾼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뭐어? 어쩐지! 야! 거기 서!”

“저 새끼 잡아!”

“저쪽이다!”

“경비대!”

야바위꾼에게 탈탈 털린 사람들과 구경꾼들 모두 남자의 뒤를 쫓으려는 순간.

“어억!”

야바위꾼의 다리를 스친 과도가 바닥에 꽂혔다.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야바위꾼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소식을 들은 경비대가 멀리서 달려왔다.

“저거! 저거 사기꾼이에요!”

사람들의 신고로 현장에서 도주하다 붙잡힌 야바위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라? 루이반 공작 부인 아니십니까?”

사냥제에 참여했던 모양인지 경비대 중 하나가 레이에게 알은체를 했다. 공작 부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어? 어어?”

야바위꾼을 쫓느라 후드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레이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급히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지만 사람들은 이미 공작 부인의 얼굴을 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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