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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69화 (69/160)

69화. 기도 준비

나 이거 본 적 있어. 한국에서.

옛날 배경으로 하는 극에서 죄인이 마시던 거, 이거 딱 그거야. 이름이 뭐였더라.

“……음. 음. 약은 약이었는데. 아! 사약!”

대신전 측은 이것은 결코 벌이 아니라 성수 목욕재계처럼 기도식 전에 몸을 정화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믿어지질 않았다.

밤에 몰래 놀러 나간 대가는 혹독했다. 두 사람의 방에는 각각 감시자가 붙었고, 식전까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같이 있다가 둘이 사고를 칠까 봐 예방하는 차원이었다.

더불어 기도식 전 한 끼만 먹는 정화식을 남은 세 끼 내내 먹는 형벌에도 처해졌다. 루이반 부부가 밖에 나가 외부의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도박까지 했기 때문에 남은 하루를 내리 먹어서 정화를 해야 한다나.

아무리 생각해도 음식 같지도 않은 걸 식사로 먹으라고 내미는 걸 보면 벌이 맞았다. 사약 같은 색의 묽디묽은 미음엔 녹색 곰팡이가 핀 것 같은 괴상한 토핑이 올라가 있었다. 생긴 것부터 거부감 들게 생긴 정화식의 맛은 더 심각한 쓰레기였다.

“솔직히 말해 봐요. 우리 괴롭히는 거지? 이걸 대체 누가 먹느냐고요!”

“저흰 자주 먹는데요. 기도 의식을 종종 하는지라.”

“거짓말! 거짓말이죠? 신관께선 지금 나를 우롱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보기엔 좀 그래도 익숙해지면 먹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걸 드시면 공작 부인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을 겁니다. 저 믿고 드셔 보세요.”

“아무리 그래도…….”

의심 백 단의 레이의 앞에서 신관은 곰팡이 핀 사약 미음을 본인이 직접 먹는 모습을 보였다.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평온하게 한 그릇을 다 먹은 신관은 이것 보라며 빈 그릇을 레이에게 보여 주었다.

“……맛있으신가요?”

“맛으로 먹는 게 아니어서요. 맛은 없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만큼은 아닙니다.”

사람이 익숙해지는 게 정말 무서운 거라더니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결국 찍소리 한 번 못 하고 정화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간밤에 축제에서 맛난 먹거리들을 먹고 와서 더더욱 비교되는 식단에 치가 떨렸지만 굶는 것도 허용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먹어야 했다.

“윽. 너무 싫어. 크흡. 이게 뭔 맛이야.”

라미엘은 잘 먹고 있을까.

레이의 죄목이 탈주와 도박이었다면 라미엘은 탈주와 상해였다.

라미엘은 도망가는 야바위꾼을 잡기 위해 야바위판 인근에 있는 가게 가판에서 고민도 않고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야바위꾼의 다리에 그걸 던졌다.

정조준 할 수 있음에도 약간 비껴가도록 한 건, 눈앞에서 사람 다리에 칼이 꽂히는 장면을 레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그 나름의 배려였다.

“어휴, 어후우.”

레이는 한 숟갈에 한 번씩 탄식을 내뱉으며 지옥 같은 식사 시간을 겨우 끝마칠 수 있었다.

***

기도식은 신력의 새해 자정에 맞춰 올리기 때문에 저녁 이후, 밤이 되어서야 시작된다. 지금은 본식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자의 동선을 확인하고 최종 예행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중앙 홀에는 웬만한 건물 높이의 거대한 첨탑이 하나 있는데 이 앞에서 기도식이 진행되었다.

탑을 기준으로 바닥에 좌우로 동그란 공간이 있고 탑 바로 앞의 가운데엔 사각형 공간이 있는데 기도식 때는 이런 공간들을 성수로 채운다.

각 공간은 물길이 이어져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고 이곳이 기도를 올리는 곳이었다.

“부부가 우승자인 게 최초라서 신전에서 신경을 조금 썼답니다.”

본디 탑 가운데 쪽의 커다란 사각형 공간은 존재하지 않던 곳이었다. 동그란 구역에서 사냥제 우승자가 각각 기도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라비던에서 유명하다는 부부가 나란히 우승을 했기에 신전은 시각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공동 공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저쪽에서 나와 여길 걸어서 가운데 이 공간으로 두 분이 같이 오신 뒤 기도 올리시면 됩니다.”

식이 시작되면 기도 대표 둘은 기도가 끝날 때까지 성수에 잠겨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기 공간에도 물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기실에서 각각 다른 방향의 물길을 걸어 나가 첨탑 앞에 있는 동그란 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잠시 머문 뒤 가운데 사각의 공간에서 만나 기도를 올리면 끝이었다.

레이와 라미엘이 신관들의 안내에 따라 몇 번 이동을 하고서 연습은 끝났다. 지금에야 물이 차 있지 않았지만 곧 성수를 채울 것이라 했다.

신전이 없는 살림에 같이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각 공간까지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쓴 돈보다 더한 기부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있어서였다.

루이반은 일단 가문부터가 유명한 데다가 토벌전을 무사히 성공시킨 공작이 사냥제에 첫 출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다 공작이 푹 빠져서 사랑해 마지않는 공작 부인이 기도 파트너다. 사랑 좋아하는 라비던 사람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만한 쇼도 없을 것이다.

더불어 루이반 부부는 외모적으로 흠 하나 잡을 데가 없다. 보기에도 좋을 것이란 말이었다. 이 상황은 바로 사람들의 관심, 즉 돈이 모인다는 말이었다.

하여 신관들은 이런 쪽으로 심드렁한 헤덴을 뒤로하고 바지런히 기도식을 준비해 왔다.

어제 두 사람이 몰래 탈출한 것이 소문나 버렸는데 이것도 홍보가 되었는지 곳곳에서 기부금이 들어왔다.

엉뚱한 부부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며 기도식을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있는 걸 보니 올해 신전 곳간은 조금 여유가 생길 것 같아 예산 담당 신관들의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 복덩이들 같으니.’

루이반 공작 부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공작 부인, 이제 안 아프시죠?”

신관의 물음에 레이는 계속 온몸을 두들기듯 하던 둔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언제부터 그랬지? 네. 멀쩡하네요.”

“정화식 드시면 그럴 거라 말씀드렸잖아요. 거짓말 안 합니다.”

“그걸 좀 맛있게 만들 수는 없어요? 맛은 그렇다 치고 하다못해 겉모습이라도?”

“매년 신전 소원함 1순위를 차지하는 안이 정화식에 관한 것입니다.”

생긴 것과 맛은 그래도 비싸고 좋은 약초와 귀한 생선으로 만들어 낸 음식이었다. 다만 예산 문제로 그걸 보기 좋게 조리할 수가 없을 뿐.

신관들의 불만 사항 1위가 정화식이었지만, 막상 다른 사항에 밀려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1위 또한 정화식이었다.

“정화식에 신경 쓰는 대신 이 부분의 예산은 어쩔 수 없이 삭감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연구 아니죠?”

“어쩌다 몇 번 먹는 음식에 돈 쓰느니 내 연구비나 더 늘려 주세요.”

이 패턴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패턴, 올해 이 정도의 기부금을 계속 받는다면 드디어 끝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관들은 잔뜩 기대에 차 있었고, 그래서 루이반 부부가 어떻게든 이 행사를 마음에 들어 하게 만들어야 했다.

“목욕재계하고 나면 잠시 시간이 비는데 공작 각하와 계시겠어요? 아니다. 같이 계세요.”

신관들의 속내와 희망사항을 모르는 레이는 세 끼 내내 정화식을 먹인 게 미안해서 신관이 자비를 베푸는 거라 생각했다.

‘정화식으로 지친 혀와 마음을 달래 주는 상품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라미엘이야? 허, 나 참. 기가 막혀서. 어쩜 그렇게 나를 잘 파악했지?’

라미엘이 곁에 있음 뭘 하나. 주변에 주렁주렁 달린 신관들 때문에 괜한 눈치가 보여서 대화도 제대로 못 했다.

이상하게 신관들은 레이가 라미엘에게 말을 걸려고 하거나 그가 그녀에게 손만 살짝 뻗어도 광분한 눈빛을 했다. 이제 시작되니 도망 안 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거 때문이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마시라며 도망가셔도 된다는 헛소리나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주변 신관의 부담스러운 눈빛 때문에 연습 내내 곁에 있어도 서로가 없는 양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단둘이 있을 시간을 준다니 정말 이게 보상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제 곧 시작이네요. 마지막 목욕하러 가셔야 해요.”

드디어 기도식 준비가 끝이 나려고 했다.

목욕재계를 하고 나니 신관이 속이 비칠 듯 말 듯한 얇기의 하얗고 보드라운 천을 레이의 몸에 둘렀다. 언제나 목욕이 끝나면 로브같이 단순한 흰 원피스를 내어줬는데 이제 기도식에 입을 옷을 준다더니 천 한 장이다.

“이게 옷인가요?”

“후후. 옷이 될 겁니다.”

신관이 레이의 의아함을 알아차린 듯 작게 웃으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레이의 오른쪽 어깨에 휙 천을 올리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천을 넓게 펴 몸을 감싼 뒤 천 끝을 돌돌 감아 잘 말린 몸통의 천 사이에 집어넣었다.

“어머나.”

신관의 손놀림에서 엘빈의 향이 느껴진다 했더니 흰 천은 한순간에 우아한 드레스가 되었다.

“이제 곧 기도식이 시작됩니다. 대기실에 물도 다 찼다고 하니 가시죠.”

“네.”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둑한 대기실엔 신관이 약속한 대로 라미엘이 있었다. 둘만의 시간을 준다더니 레이를 돕던 신관이 대기실에 그녀를 밀어 넣고 사라졌다.

“와아.”

라미엘도 흰 천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차림새였는데 레이와 달리 상체를 거의 드러낸 상태였다. 라미엘의 왼쪽 어깨를 헐렁하게 감싼 천은 가슴 쪽부터 감싸진 레이와 달리 허리부터 감겨 있었다.

헐벗은 라미엘과 단둘이 있으라니, 이런 착한 신관들 같으니.

매번 제발 좀 벗어 달라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는데 기도가 이제야 통한 듯했다.

“라엘, 그, 어…….”

옷 속에 감춰져 있어도 대단하던 몸매였다. 그런 몸이 밖으로 드러났는데 반전 따윈 있을 수가 없었다. 잘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도 라미엘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터질 듯 꽉 조인 근육들이 섬세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잘 빚어 놓은 조각상 같았다. 두툼한 몸통하며 울퉁불퉁 갈라진 복근하며 어느 한 구석 흠 잡을 것 없이 완벽했다. 황금 비율이라는 것이 라미엘을 두고 만든 단어 아닌가 싶을 광경이었다.

‘살아 있길 잘했어.’

세상 모든 것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어졌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가려고 해서 레이는 군침을 꼴딱꼴딱 삼키면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이, 어디 아파요?”

라미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눈까지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라엘, 아니 라미엘 님.”

레이가 눈을 뜨고 무언가 결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딱 5초만. 5초만 좀 참을 수 있겠어요?”

“뭐를요?”

레이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됩니까.”

라미엘이 대답했다.

“이미 만지고 있으면서 왜 묻습니까.”

“에헷.”

누군가의 손이 닿아 좋았던 적은 없었다. 특히나 의도를 가진 손길은 그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이는 예외였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눈빛에서 뭘 원하는지 너무 훤히 보여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가 엉뚱한 눈빛을 하면 머지않아 귀여운 짓을 할 거란 걸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가벼이 훑는 손길에서 온기가 퍼졌다.

“라엘 사람 맞아요? 혹시 조각상인데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단단하다. 단단해. 팔뚝 만져 보고 알았지만 몸통도 장난 아니야. 조각같이 단단하고 조각같이 완벽해.

5초는 훨씬 이전에 지났는데 손이 자석같이 찰싹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기도식이 시작되려는 것 같은데. 레이, 이제 이 진득한 손 좀 떼야겠는걸요.”

대기실 한가운데 있는 성수로 가득 찬 공간에서 물길을 따라 걸어 나가는 것부터가 기도의 시작이었다.

“진득하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해 조심히 만졌는데?”

초심과 많이 달라진 터치였지만 레이는 뻔뻔하게 우기고는 살포시 라미엘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백날 정화식을 먹으면 뭘 하나. 마음에 이렇게 음란 마귀가 끼어 있는데.

레이가 손을 떼자 라미엘이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화수에 성수 섞인 물로 목욕재계를 해 왔지만 지금처럼 백 퍼센트 성수에 몸을 담그긴 처음이었다. 라미엘이 품 안의 레이를 천천히 성수에 내려놓았다.

“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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