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넘치는 감정
“어? 이게 뭐야?”
레이의 허리까지 잠기는 성수는 물이 분명 맞는데 젖질 않았다.
성수에 잠긴 옷자락이 물속에서처럼 둥둥 떠 있고 다리에 느껴지는 건 찰랑이는 물이 맞다. 그런데 손을 담갔다 빼는데도 전혀 젖어 있질 않았다.
“라엘, 이거 봐요.”
레이가 라미엘에게 손으로 성수를 퍼 물을 튀겼으나 그의 몸은 조금도 젖질 않았다. 라미엘도 처음 겪어 보는 일인지 그 역시도 손으로 성수를 몇 번 떠 보았다.
그때 어둑하던 대기실이 밝아졌다.
레이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도 조명도 없는데 실내가 저절로 밝아지고 있었다. 기도식은 신력이 넘치는 행사라더니 마력석 없이도 절로 빛이 조절되는 방이 신기했다.
조명 없이 밝아지는 방, 젖지 않는 물이라니.
“이래서 기도식 하나 봐요. 게다가 이 물 안 젖어. 성수가 보통 물이 아니라더니 진짜 너무 신기하…….”
손으로 물을 첨벙거리던 레이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순간 말을 잃었다. 목소리와 물을 찰랑이던 소리가 뚝 끊기자 순식간에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이거…….”
레이는 말을 잇는 대신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라미엘의 몸을 다시 쓰다듬었다.
어두울 때 미처 몰랐던 라미엘의 상처가 보였다.
몸 여기저기에 무수히 나 있는 상처들은 고작 한두 해 정도에 쌓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훈련을 거칠게 받았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수준 역시도 아니었다.
라미엘이 몇 년이나 마물 토벌을 했고 발군의 실력을 가졌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가 그렇게 실력을 쌓아 올리게 된 배후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다.
이런 커다란 상처들이 잔뜩 있을 게 당연할 거란 생각도 못 했다. 워낙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막연히 잘하는 것만 떠올렸지 그 과정들을 제대로 보거나 들은 적은 없었다.
라미엘은 자신의 상처들을 보며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레이는 화내거나 울더라도 항상 웃는 얼굴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런 레이의 얼굴이 웃음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은 걸 보니 낯설었다.
처음 기도식 옷을 갈아입고 나서 레이의 눈에 상처가 징그러워 보일 것 같단 생각이 들긴 했다.
곱고 예쁜 것만 보며 자랐을 레이에게 험악한 흉터 같은 건 많이 놀랄 것이니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흉터를 보면서 루이반의 서자로, 흠이라 불리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레이가 문득 저를 끔찍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고위 귀족 중 상처가 심한 귀족은 없다. 보통은 큰 상처가 생기면 치유 마법사를 불러 흉터 없이 말끔하게 고치기 때문이다.
라미엘의 흉터는 그가 살아온 인생의 방증이었다.
귀족이지만 귀족이 아닌 것. 외양은 화려하나 속은 관리되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것.
이제 와 치료를 받는다 해도 별 소용은 없었다. 그래서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야 유명한 일이고, 흉터를 치료한다 해도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의 라미엘 루이반이 아무리 대단한 귀족이라 해도 실상 까 보면 별 대단치도 않은 게 들어 있다.
레이가 자신의 남편이 사실은 기대만큼 대단치 않다는 걸 눈으로 직접 보게 되어 놀랐을 수도 있다. 막연히 말로만 듣거나 생각만 했을 때와 직접 눈으로 본 차이는 크다.
라미엘은 레이의 침묵이 이해되면서도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런 이상하다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지만 어떤 건지는 잘 알 것 같았다.
약간의 서운함.
레이가 놀라고 실망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래도 조금 씁쓸했다.
레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하려고 고심하고 있을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많이 아팠겠다.”
한참 만에 레이가 나직한 소리를 냈다.
목숨이 위험했을 걸로 보이는 큰 상처 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은 흉터들이 보였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자기 자식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미엘의 상처가 의미하는 게 너무도 뻔했다. 얼굴은 감출 수 없으니 얼굴만 멀쩡하게 치료해 놓고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은 무참히 내버려 둔 것이겠지.
어차피 얼굴을 치료했다면 하는 김에 큰 상처가 난 몸도 돌봐야 했다. 자식이 아니라 옆집 어린애가 다쳤어도 이 정도가 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잠을 자 본 게 처음입니다.”
이 남자가 살아온 길이 소금보다 더한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당신 제대로 울지도 못했죠?”
“레이?”
“이거 때문에 맨날 그렇게 감추고 있었어요?”
라미엘은 자신의 가슴에 뚝뚝 떨어지는 따뜻하고 작은 물방울에 마음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왜 울어요.”
라미엘의 품에 안긴 작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레이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라엘이 못 울었던 거 내가 대신 울어 주는 거예요.”
왜 아주 잠시나마 서운하다 생각했을까. 이리도 헛되고 쓸모없는 감정이었던 것을.
“……무섭지 않습니까. 이렇게나 흉한데.”
“그걸 말이라고, 흑!”
라미엘의 말에 레이의 울음이 제대로 터졌다.
레이알렉시스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런 흉터 따위로 사람을 평가할 리 없는데.
오래전 일에 가슴 아파하고, 자신을 위해 울어 주고 있는 레이 덕분에 많이 아픈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과거가 치유되고,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마음속의 차갑고 딱딱하고 뾰족한 무언가가 무너지고 녹아내리고 산산조각 나 흩어진다. 평생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평온과 따뜻함이 라미엘을 감쌌다.
품 안의 레이는 고작 세 달 만에 자신도 몰랐던 감정과 기분을 쥐고 흔드는 존재가 되었다. 이 정도로 대단하고 큰 선물을 받겠다고 계약한 게 아니었는데.
‘계약…….’
계약이 끝나고 헤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내가 과연 이혼할 수 있을까.
“레이, 울지 마요.”
레이가 이렇게 섧게 우는 걸 보니 제가 이전에 상상했던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숨이 막힌다.
아마도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 줄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일 존재.
라미엘은 레이를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따뜻한 물방울이 그를 적시고 있었지만 감정은 처음 눈물이 닿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다 울었어요.”
레이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라미엘과 눈을 마주쳤다. 푸른 하늘 같은 눈동자 안에는 비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라미엘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이의 발간 눈가를 쓰다듬자 그의 손가락으로 또르륵 비가 한 줄기 굴러떨어졌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라미엘의 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건.
“……앞으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줘요. 나한테는 그래도 돼.”
조금 더 깊어진 마음.
“손거스러미 일어나서 따가운 것도 아프다고 느껴지면 무조건이요.”
딱딱했던 레이의 얼굴에 조금씩 표정이 돌아온다.
“그럴게요.”
희미하게 웃는데 여느 때의 레이의 얼굴이다.
“라엘, 혹시 아직도 상처가 아파요?”
레이가 다시 라미엘의 흉터를 손으로 훑으며 물었다.
“아프지 않아요.”
“상처를 보는 게 힘들어요?”
“레이가 보고 놀랄 것 같아서 걱정한 거지 힘들지도 않아요.”
라미엘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레이가 놀라긴 했다. 보듬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며 놀랐지, 상처가 흉하다고 놀란 게 아니었다.
“그럼 앞으로 종종 좀 벗어 줘요. 이 좋은 몸 감추려고 하지 말고.”
역시나 레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생글생글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할 때의 모습이다.
라미엘이 레이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레이는 그의 손에 살짝 볼을 기대고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으니 레이가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요?”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레이가 묻는다. 온도가 오른 따뜻한 숨이 라미엘의 입술에 닿아 흩어졌다.
“……네.”
레이는 제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그걸 알기에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라미엘은 그렇다 대답했다.
“잘했어요.”
정답이 맞았다.
그에 대한 보상은 아주 달았다. 녹아내릴 것 같은 달고 긴 숨이 서로의 입 안을 부유했다. 둘은 한참이나, 어지러울 정도로 서로에게 매달리듯 안겨 있다가 떨어졌다.
잔뜩 열이 오른 눈가와 살짝 부어오른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서 건드리면 손에 물이 들 것 같다. 라미엘이 홀린 듯 레이의 눈가와 입술을 더듬는 순간.
“준비들은 다 됐냐.”
달아오른 분위기를 박살 내며 헤덴이 등장했다.
“악,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레이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 라미엘은 대놓고 미간을 구기며 레이에게서 손을 뗐다.
“왜들 그러…….”
놀라서 퍼덕이는 레이와 불편한 심기를 감출 생각도 않고 방출하는 라미엘을 보던 헤덴은 대기실의 공기가 후끈한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예하께선 눈치도 없으십니까?”
넘치는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여운을 곱씹을 틈도 없이 들이닥친 헤덴이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었다. 하여 라미엘은 불경스럽게도 대신관에게 짜증을 토해 내기에 이르렀다.
“성수에서 그러는 너희가 미친 건 아니고?”
물론 헤덴에겐 씨알도 안 먹힐 일이었지만.
“부부끼리의 일인데 미쳤다니요.”
“쯧.”
헤덴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크게 혀를 찼다.
“기도식 전인데 아주 잘하는 짓들이다. 왜 성수에 담겼는지, 정화식 먹는 이유가 뭔지도 모르지?”
헤덴의 말에 지옥 같은 정화식을 먹은 고생이 떠올랐다.
“맛없는 것만 주시니까 맛있는 거 찾아 먹느라 그런 거잖아요!”
레이의 답에 헤덴이 잠시 본인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랑 있더니 너도 미친 게냐?”
헤덴이 아주 질색이라는 얼굴을 했다.
“너희 설마, 한 거 아니지? 둘이 도망까지 쳤다며. 몰래 옆방 가고 그랬으면 빨리 말해.”
“뭘 해요?”
“괜히 각방 준 줄 알아? 기도 전날은 성적 쾌락 금지다.”
직구로 꽂혀 든 헤덴의 말에 레이가 숨을 잘못 삼켰다.
“커헙. 쿨럭!”
라미엘이 레이의 등을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안 해, 안 했, 쿨럭, 안 했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끈화끈한 기운이 여실히 느껴져서 레이는 연신 손부채질로 열을 식히려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대우받으며 자랐고, 유년기 이후로는 대신전에 처박혀 연구만 하고 산 헤덴에게 사회성을 논하기는 힘들었다.
“그래 뵌다. 아가가 설마 그거 하루 못 참는 짐승 새낀 아니겠지.”
헤덴은 그리 말하며 라미엘을 쳐다보았다.
라미엘은 그 눈빛을 받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기도 올리는데 성수 안에 있는 사람 몸에 외부 물질이 있으면 빛이 적어.”
기도식의 하이라이트인 신함이 등장하면 성수에서 빛이 난다. 그야말로 식의 절정이며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장면이다.
“사람들 눈 즐거우라고 금지하는 거였어요?”
신전이 정말 어렵긴 한가 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라는 건 결국 기부금을 많이 받기 위한 일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뭐어? 아이고, 아가 조련사야, 설마 그런 이유겠니?”
헤덴이 세상 한심하게 쳐다보는데 뭐라 반박은 할 수 없고 기분은 나쁘고 그런 심정이다.
“그럼 제대로 설명을 해 주세요.”
레이가 입술을 삐죽이자 헤덴이 다시 한번 혀를 차더니 말했다.
“성수에 빛이 적게 나는 이유를 아는 신관들 수십이 기도식을 하는데, 그 애들한테 자기들 성생활을 그렇게나 알리고 싶은 게냐?”
“아.”
몹시 적나라하고 민망한 이유였다. 저도 모르게 레이는 다시 한번 행위가 없었음을 보고했다.
“아니, 아니에요. 저희 진짜로 안 했어요.”
안 했는데 대답을 하면서 왜 이리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 도통 모르겠다.
“했으면 여기서 라미엘 입술 먹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레이는 민망해서 내뱉은 아무 말이 더 부끄럽고 끔찍한 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 말에 피식거리는 라미엘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네가 왜 아가를 골랐는지 대충 알 것도 같구나.”
헤덴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