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기도식
대신전의 중앙 홀에 기도식에 참여하는 인파들이 모였다.
기도식은 우승자 둘이 성수에 몸을 담그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둘의 기도가 끝나면 신관들은 신력으로 금빛 물을 만들고, 그 물 위에 신함을 띄운다.
신함은 대신전 내부를 천천히 한 바퀴 돌고, 사람들은 항해하는 신함을 보며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것이 기도식이었다.
대기실 성수가 조명 하나 없는데도 햇살이라도 받은 것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빛을 본 헤덴이 루이반 부부에게 하던 잔소리를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작은 함을 열었다.
“이제 기도 시작이다.”
함 안에는 흰 접시 같은 게 들어 있었는데 접시에 금빛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헤덴이 검지로 금빛 물을 찍더니 두 사람의 미간에 콕콕 찍었다.
“신을 부르는 성수란다.”
이런 귀한 게 몸에 닿게 되니 기도식의 대표가 된다는 게 영광이라는 거구나.
그 의미가 새로이 다가왔다.
“동선은 다 외웠지?”
헤덴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네. 당연하죠.”
맛있는 거 발언 이후 헤덴에게 레이의 신뢰도가 굉장히 하락한 듯했다.
“저는 오른쪽, 라미엘은 왼쪽의 성수 길로 나가서 중앙 홀 기도 자리까지 가면 된다 아닙니까.”
“……그래.”
헤덴이 몸을 일으키는데 그의 머리카락 색이 조금씩 빠지고 있는 게 보였다. 보랏빛이었던 머리가 연보라색으로 점차 흐려지더니 그가 기도식을 위해 대기실 문밖으로 나갈 즈음엔 아예 흰색이 되어 있었다.
“저기, 예하 머리카락이…….”
“아하. 이거? 아까 말했듯이 기도를 올리는 자에게는 본인의 몸 말고 외부의 것이 있으면 안 되거든.”
정화식을 먹는 것도, 그 행위도 금지된 이유였다.
최대한 정갈한 몸 상태를 만드는 것. 본연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한 기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일환으로 헤덴은 염색을 모두 날려 버렸기에 본래의 머리카락 색이 나온 것이었다.
“모두의 1년 치 소망을 신께 대표로 비는 날인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원래 대표란 그런 자리란다.”
대신관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매번 뭐든 대충 넘기는 것 같아 보였는데 주어진 일에는 진중하게 최선을 다하는 헤덴을 보니 그가 오랫동안 대신전을 탈 없이 이끌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수나 한 모금씩 마시고 나오련.”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이의 대답에 헤덴이 씩씩해서 좋다며 허허 웃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라엘, 정성을 다해요. 기도식 대표 진짜 대단한 거였어.”
라미엘이 대답 대신 레이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헤덴의 말대로 성수를 한 모금 마시자 곧이어 그가 나간 곳으로 신관 둘이 들어와서 두 사람을 각각 이끌었다.
성수가 찬 물길을 걸어가니 중앙 홀의 동그란 공간이 나왔다. 단 아래쪽으로는 새해의 소망을 기원하고자 하는 수많은 인파가 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예행연습대로 이 공간에 잠시 멈춰 서서 중앙의 거대한 탑을 향해 기도를 한 번 올리고 가운데 사각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성수가 몸을 휘감듯 반짝이고 같은 공간에 있으니 사각의 공간 전체가 빛났다.
‘이래서 정화를 그렇게 했구나.’
빛이 덜하면 조금 덜 극적으로 보이긴 했겠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기도를 다시 한번 올리자 탑의 꼭대기 양 날개를 형상화한 부분의 가운데 동그란 빈 공간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1년에 한 번 모습을 보이는 신에게 보내는 하얀 배, 신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체 발광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신함은 보통의 물 위에 띄우는 배가 아니었다. 신력으로 만든 금빛 물결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으며 이마저도 대신전 내에서만 물을 일으킬 수 있어 가는 길이 정해져 있었다.
기도식을 주관하는 신관들과 성력 충만한 대신관이 물을 일으켰다. 신함이 나온 곳에서 흐르기 시작한 거대한 금빛 물줄기가 느릿한 속도로 대신전의 허공에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물 위로 번쩍이는 흰 배가 물결보다 더 느릿한 속도로 항해를 시작했다. 신함과 닿는 부분의 성수는 별이라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어 금빛 은하를 항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꿈에서도 못 볼 것 같은 광경을 코앞에서 보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신년 행사라고 해도 라비던에서 먼 베롬에서 행해지기에 심드렁했던 기도식이었다. 이렇게 엄청나고 멋있을 줄 알았다면 매년 참가해서 새해 기도를 했을 것이다.
내년부터는 사냥제를 모든 이들을 위한 축제로 바꾼다고 하니 귀족들만의 행사였던 기도식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신께 올리는 모두의 소망을 담은 배는 우아하게 대신전을 돌았다. 중앙 홀에 가지 못한 신전 내 신관들도 신함이 지나갈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새해의 소망을 담아 신께 기도를 올렸다.
대신전을 한 바퀴 돈 신함이 중앙 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탄성과 박수가 우렁차게 쏟아져 나왔다.
모두의 축복 속에 신함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배가 지나가던 하늘의 금빛 물길도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기도자들이 잠겨 있는 곳의 수위도 서서히 낮아졌다.
‘무거워.’
내내 잠겨 있던 물이 사라지니 몸이 조금 둔해지는 감각이었다. 어색함을 풀어 보려 살짝 제자리걸음을 하니 라미엘이 레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라엘, 무슨 소원 빌었어요?”
“레이는요?”
“올해 무탈하게 잘 보내고 내년 기도제에 다시 올 수 있기를 빌었어요.”
매년 참석하게 될 것 같은 멋진 행사였다. 비록 지금의 위치에서 참가할 수 없을지라도 참여만으로도 영광이 될 것이다.
“라엘은?”
그는 딱히 바라는 일이나 기원하는 바가 없었다. 뭘 빌어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형식만 취했는데 옆에서 느껴지는 레이의 기척에 불현듯 소원이 생각났다.
“소원은 말하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네? 내 소원은 다 들어 놓고? 치사하게 말 안 할 거예요?”
대체 뭘 빌었기에 비밀인가. 레이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몇 번이나 물었지만 라미엘은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빌었다고 말하기는 좀…….’
쑥스러워서.
기도를 다 올리고, 이제는 축제의 시작이었다.
1년 중 유일하게 대신전이 복작이는 순간이다. 홀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두고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함께 어울려 신이 내리는 새해 첫날을 즐겼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나온 우승자 부부는 다시 한번 축하를 받았고, 새해의 행복을 기원하며 모두가 축배를 들었다.
깡깡깡!
한창 즐기는 중 사냥제 때 들었던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레이 근처에 있던 토마가 속 쓰림이 도진 것 같다며 배를 부여잡고 비실비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소리의 정체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철창을 나온 하얀 짐승은 뀨뀻거리며 라미엘에게 달려와 그의 어깨 위에 철퍽 엎드려 자리를 잡았다. 울프 드래곤은 죽음 직전에 만난 인생 첫 온기에 집착 수준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당황한 사람들과 달리 라미엘은 어깨의 짐승을 떼어 내 헤덴에게 바쳤다.
“늙은이 육아시키지 말고 제발 그거 너희가 좀 가져가라. 그렇게 좋아하는데, 응?”
“모든 분들의 의견이 있는데 어찌 개인이 귀한 생명을 다루겠습니까.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각인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아가, 네가? 허, 퍽이나 그러겠다.”
내가 네 텅 빈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욕이 없는 자가 울프 드래곤을 맡는 게 가장 좋은 일이지만, 욕심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자 역시도 위험한 인물이었다.
사람은 본디 자신의 철학을 가지는 법이다. 삶이 이어지면서 쌓이는 가치관, 선악의 구분, 인간을 대하는 자세와 사회를 보는 시야. 이 모든 것들이 쌓여 인간이라는 철학을 완성하는 법인데 라미엘은 그 점에 있어 텅 빈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유독 내면이 흐릿하긴 했지만 루이반의 수장이 되었으니 이제라도 무언가를 쌓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저런 녀석이 운이 좋은 건지…….’
헤덴은 맞은편 너머로 사람들과 웃고 있는 레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만약 기대를 걸 수 있다면 아가 조련사에게 걸어야 했다. 텅 비어 있던 녀석이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는 때는 조련사가 그 곁에 있을 때뿐이었으니까.
이계의 흔적을 좇아 명단의 제일 위에 적힌 루이반을 찾아갔을 때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던 라미엘이 떠올랐다.
레이에게 정신이 팔려 그가 있는 줄 몰랐기도 했지만, 언제나 느껴지던 거칠고 사나운 기색이 없어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라미엘의 기운은 모조리 품 안에 쏠려 있었고, 헤덴이 관심을 가진 것 또한 그 품 안의 사람이었기에 그땐 미처 제대로 파악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기도식 대기실에서 날 선 기색 없는 그를 레이가 보듬어 안는 걸 보니 조련이 제법 성공적인 듯했다.
평생 텅 빈 채로 딱하게 외로이 살 줄 알았는데 이런 놈에게도 짝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래 산 그에게도 신기하게 다가왔다.
헤덴은 백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살면서 라미엘처럼 텅 빈 인간을 적지 않게 봐 왔다.
그들은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모르고 뭐가 부족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삶을 끝냈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스스로가 깨닫기 전에는 마음의 공허를 채우지 못했다.
그런 애들에 비한다면 라미엘은 본인이 깨닫기도 전에 구원을 먼저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해 첫날이니 이 녀석도 즐겨야겠지. 네가 오늘 하루 잘 돌보거라.”
라미엘이 억지로 안긴 울프 드래곤을 헤덴이 마법으로 가볍게 들어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헤덴이 이만큼 물러났으니 라미엘도 더 이상 떠넘길 순 없었다. 하루 정도 짐승을 데리고 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귀찮아도 참기로 했다.
울프 드래곤은 워크산 우리가 아닌 라미엘의 어깨 위에 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푸엥이 레이를 바라볼 때와 같은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더 찰싹 몸을 붙였다.
은발 금안의 천사의 어깨 위에 있는 흰 동물. 마치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낸 것 같은 착각이 이는 모습이었다.
“루이반 공작 각하는 뭘 입어도 소화가 되나 봐요.”
본의 아닌 액세서리로 다시금 주목을 받은 라미엘이 자리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의 어깨에 있는 울프 드래곤에 관심을 쏟았다.
“꼭 강아지 같네요.”
“불 뿜는 모습만 아니라면 개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라미엘은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깨 위의 울프 드래곤을 잡아서 테이블 구석에 올려 두었다.
“가서 예쁨받아.”
“뀻?”
반쯤은 울프 드래곤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라미엘의 허락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귀한 짐승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잘하면 만져 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라미엘은 가뿐한 얼굴로 사람들이 잔뜩 몰린 테이블을 뒤로한 채,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라엘, 약았어.”
“애정에 주린 짐승이니 이번 기회에 충족이 좀 되겠죠.”
본인이 챙겨 주기 귀찮은 거면서.
그나저나.
“자꾸 짐승이라고 부르게 되네요. 쟤도 이름을 지어 줘야 할 것 같죠?”
“담당이신 헤덴 예하께서 안 지어 주신 걸 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헤덴 예하라면 자기 친손주 이름도 안 지어 주실 분이에요.”
어디 그뿐이랴. 친손주가 태어난 걸 아는 것도 기적일 인물이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우리가 지어 줄 것까진…….”
없다는 말을 하려는데 레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골똘히 울프 드래곤 작명을 시도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라미엘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