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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72화 (72/160)

72화. 연구 기여

새해맞이 행사, 기도식이 끝난 대신전은 평소처럼 고요해졌다. 그 많던 기도 인파와 사냥제에 참여한 귀족들까지 빠져나가니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도 끝이었다.

레이를 주축으로 새로이 연구 자료를 찾아내는 대신전 이세계 연구부는 다시금 바빠졌다.

아무리 한가하고 할 일 없는 귀족이라고 해도 기도식을 끝낸 달까지는 한 해를 정비하고 정산을 마쳐 황실에 보고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바쁜 시기였다.

공사다망한 루이반 공작 내외를 오랜 시간 마냥 붙잡아 둘 수가 없어 연구 신관들은 마음이 급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은 역대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을 발견이었다.

차원을 넘어선 이동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록상으로 이전에 두 번이나 있었는데 이번은 전례 없던 상황이다.

차원 이동을 하고 ‘돌아왔다’는 레이의 말에 대신전 이계 연구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 이계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헤덴도 드물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10년이나 한국에서 지냈으며 그곳의 인물과 접촉해 우정을 쌓고,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온갖 과학 문물들을 경험하고 왔다는 점에서 특히나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그들이 연구에서 증명하고 싶은 과제였는데, 그 과업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증명이 확인되었으니 남은 최대 과제는 그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레이가 밟은 하늘 다리를 찾아내는 것 또한 과업이 되었다.

혹여나 공작 부인께 실례가 될까 흥분을 억누르며 신관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특수한 빗으로 하루에 몇 번씩 빗어 내렸다. 가장 선명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에서 이계에 관한 정보를 뽑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실례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또 한 번 빗질이 끝난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일과이기도 했다. 앞으로 사흘간 레이는 연구소에 와서 그들이 궁금해하는 이세계 이야기를 해 주고 빗질을 당하는 하루를 이어 가게 된다.

일정을 마친 레이는 곧장 헤덴의 방으로 향했다.

“고생했다.”

헤덴의 인사에 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저보단 앞으로 연구할 신관분들이 더 고생이시죠.”

“후훗. 일이 이렇게 진척이 되는데 고생일 리가. 나도 얼른 연구실로 가 봐야 하는데.”

푸둥이 달려오더니 레이에게 뛰어 올라 품에 안겼다. 연구 내내 옆에 있던 푸둥은 이제 마음껏 그녀의 품에 안겨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울프 드래곤의 이름은 ‘푸둥’으로 정해졌다. 푸엥의 동생 흰둥이라 푸둥.

푸둥은 명명한 이름을 열 번도 채 불러 보기 전에 자기 이름을 알아차렸다. 제 이름이 생긴 게 기분이 좋은지 어제 이후 내내 레이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예하, 이전에 말씀드렸던 워크산 에너지요.”

“아아. 그래. 말할 게 있다고 했지.”

헤덴은 예상보다 더한 최고급 정보를 얻었기에 레이에게 마음이 활짝 열린 상태였다.

이 정도로 큰 수확이 있을 줄은 몰랐다. 만약 레이의 도움으로 하늘 다리의 일부라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는 평생의 업적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거예요.”

레이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빈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마력석은 여전히 초록빛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력석? 호오. 무슨 가공을 한 거니?”

“가공한 게 아녜요. 혹시 관련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해서 대신전에 있는 논문들도 찾아봤지만 비슷한 일도 없었어요.”

레이는 녹색 마력석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런 건 내 평생 본 적이 없는데.”

이세계 연구가 주종이긴 하나 평생을 연구실인 대신전에서 살았다. 온갖 것들이 연구 대상이니 웬만한 것들을 다 겪어 봤지만 헤덴도 빈 마력석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일단 네가 한 말은 연구 신관이 정해지면 전해 주마.”

레이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관들은 레이가 연구실에 있는 동안 그녀의 말이 저절로 받아 적히는 마법 용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의 헤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연구를 해야 할 목적의 일이 들어왔으니 기록은 필수로 남겨야 했다. 연구 대상자가 가볍게 말한 것에서부터 일이 진척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모든 것이 단서였다.

“이건 여러 실험도 해 봐야 하고 처음 보는 물건이라 분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게다.”

“예.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일의 중요성과 위험성, 연구 강도와 기간을 모두 고려해 책정되는 의뢰 비용이 덜컥 마음에 걸렸다.

“저기, 예하. 제가 의뢰 비용은 대략 얼마를 생각해야 할까요?”

수중에 돈이라고는 우승 상금 1라블뿐인데 이렇게 예상에도 없는, 심지어 헤덴마저도 금시초문인 특이 마력석 분석을 의뢰하게 되었으니 부르는 게 값일 터였다.

심지어 이 건은 답이 없을 수도 있으니 연구에 무턱대고 기한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어?”

레이의 말에 헤덴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아가 조련사야, 네가 지금 우리 대신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전혀 모르는구나. 네가 준 이계 정보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쪽에서 무료로 이 마력석 연구를 하고 네게 돈까지 쥐여 주어야 할 판이란다.”

토마가 있었다면 또 속 쓰려할 발언이었다.

본인이 얼마나 귀한 정보를 준 줄도 모르는 사람이 정보비는 생각도 않고 있는 데다가 의뢰 비용을 주겠다 하는데 그걸 마다하다니.

물론 헤덴의 말이 백번 맞았다. 레이의 발언과 흔적이라면 부르는 게 값인 정보였다. 하지만 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그걸 뻥 걷어차는 상술 제로 헤덴은 신전이 허덕이는 데 크게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는 헤덴의 순순한 얼굴을 보며 한 가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늘 연구비 부족에 허덕이는 신전의 장삿속 없는 최고 우두머리. 토마의 스트레스성 속 쓰림의 원인엔 헤덴의 성격에 더해 상술 없음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으리라.

“마력석 연구 결과가 나오면 그 비용은 제가 헤아린 값으로 지불할게요. 제가 따로 의뢰한 요청이니 값을 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세계 연구 결과에 성과가 나오면 저에게도 모두 알려 주세요.”

이세계 연구에 관한 내용은 대신전 내에서도 무조건 함구하는 사항이었다. 다른 연구 부서의 신관도 이세계에 관한 일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세계 연구라는 것만 알려졌지 진행 사항이나 결과 등 관련한 내용은 모두 극비였다.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곳에 대한 정보는 대중에 혼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레이가 말한 이계의 ‘비행기’라는, 하늘을 나는 고철 덩어리에 대한 존재에 신관들은 기함을 했다. 레이가 아무리 외형을 설명해도 상상으로도 그려 내질 못했고, 그리 오랫동안 이계를 연구해 온 신관조차도 과부하가 올 정도였다.

아직 리담은 이계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관련한 모든 사항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레이 역시도 외부인이기에 한국에 관한 경험은 타인에게 비밀로 해 두어야 했다.

헤덴의 배려로 레이에게 함구 마법을 걸진 않았지만 만약 그녀가 그동안 한국에 대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기라도 했다면 단박에 함구행이었을 것이다.

“제가 가장 듣고 싶어요. 제겐 그곳에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걸요.”

유주랑 까미, 자신을 딸이라 부르던 유주의 부모님, 아르바이트할 때 가족처럼 챙겨 준 마음씨 좋은 사장님까지도.

물론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쾌한 일도 많았지만 그걸 억누르는 더 많은 행복한 기억들이 있어 그리운 곳이었다.

그리고 읽다 만, 완결까지 딱 한 권 남은 비엘도 있다.

다시 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연구가 진행될 거란 기대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무언가가 진척된다면 그만큼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래. 그건 내 어찌해 보마.”

“감사합니다! 저 남은 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협조할게요.”

활짝 웃는 레이의 얼굴을 보니 꼭 허가를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저 얼굴이 구겨지는 걸 어찌 보누.’

레이가 웃으니 품 안의 울프 드래곤도 뭔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방긋거렸다.

‘이름까지 붙여 줬으면서 저것 좀 그대로 가져가지.’

문득 레이가 바로 적합한 후견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따뜻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 의뢰비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데 굳이 지불한다는 것도 그렇고 라미엘을 따뜻하게 채워 주는 것도 그렇고.

풍족한 환경에 있으니 웬만해선 돈이나 환경에 눈이 멀어 허튼 일을 저지를 확률도 낮았다. 차후에 어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으로 보면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헤덴은 일단 마음속으로 레이를 울프 드래곤 후견인 명단에 올려 두었다.

***

라미엘이 마지막 서류의 서명을 끝냈다. 오늘 해결해야 할 마지막 일이지 처리할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신력 새해 연초까지 하는 지난해 정산은 자산과 소속 고용인들이 많을수록 할 일이 많았다. 황실 보고용으로 올릴 간소화된 자료까지 만들고 검토해야 해서 평소보다 일이 더 많았다.

주인 내외의 변경된 일정 보고를 받은 테일러는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게이트를 이용해 바로 루이반 수장의 검토가 필요한 일거리들을 베롬으로 보냈다.

베롬 대신전의 일부 신관들을 제외하고 황족이 아닌 일반인의 게이트 이용은 오로지 황실의 권한이었다. 이러한 황실의 허가를 받는 노력까지 들였다는 건 그야말로 일분일초가 귀하다는 말이었다.

황실은 마물 등장 같은, 여간하지 않은 안건이 아닌 이상 게이트 사용을 철저하게 막았다. 일부 황족들이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지만 그 외에는 명확한 사용 이유가 있어야 하며 값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라미엘의 하루하루가 귀한 시기였기에 감행한 일이었다. 테일러는 황실 허가를 받느라 하루를 다 썼다고 했지만, 서류 배송 정도로 게이트 이용 허가를 받아 낸 그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헤덴의 요청으로 레이가 원래 예정보다 사흘 더 베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전에 헤덴이 나타나고 편지까지 보냈던 일의 연장인 듯했다.

극비 사항이라 물어도 대답이 나올 리 없고 그저 연구에 레이가 관련돼 있다는 사실만 얼추 유추할 수 있을 뿐이라 일정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부부가 며칠 차이로 따로 가는 것보다 함께 돌아가는 게 비용 절약 측면에서 좋다는 이유로 라미엘도 베롬에 머물고 있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루이반이 돈을 아끼겠다니. 레이가 들었다면 지구식 비유로 일론 머스크가 은행에 돈 빌리러 간다는 소리라고 했을 것이었다.

레이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서 한 일인데 머리는 그걸 미처 자각 못 했다. 부부니까 당연하게 마냥 같이 있는 걸로만 생각을 했다.

라미엘은 일을 마치고 침실로 가는 길이 되어서야 제 마음을 알아차렸다. 저도 모르게 빨라지는 발걸음이 당황스럽다.

베롬의 별장에서 사흘간 레이는 대신전으로 출퇴근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라미엘은 재택근무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점심까지 함께 먹은 뒤 각자 일을 하러 떠났고, 언제나 늦게 침실에 들어오는 건 일거리가 많은 라미엘이었다.

창가 좋아하는 마님의 취향에 맞춰 베롬 별장 주 침실에 있던 커다란 침대가 창문 옆으로 이동되었다.

오늘도 레이는 밤바다를 구경하다가 잠이 든 건지 창문 바로 앞에 바싹 붙은 자세였다.

베롬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왔어요?”

레이가 깨지 않게 최대한 살그머니 몸을 뉘었는데 그녀가 깨어나 물었다.

“또 새벽이야?”

반쯤 뜬 레이의 눈이 다시 가물거렸다.

“아뇨, 이제 자정 조금 넘었어요.”

“……일찍 왔네요.”

라미엘이 일거리를 받은 이후 매번 새벽 잠자리행이라 저녁 이후로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마지막 날인 오늘만큼은 안 자고 그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전 일 마무리는 했어요?”

레이가 데굴데굴 몸을 굴려 라미엘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응, 잘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몇 번 더 갈 수도 있어요.”

헤덴은 레이에게 대신전으로 바로 올 수 있는 게이트를 여는 마력과 신력이 꽉꽉 눌러 담긴 목걸이를 주었다. 언제 어느 때건 차고 있다가 한국이나 하늘 다리에 대해 생각나는 게 있다면 주저 말고 달려오라는 뜻이었다.

가느다란 줄에 토파즈처럼 노란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달려 있는 목걸이는 평소에 차고 다녀도 될 만큼 깔끔하고 예뻤다.

“라엘은? 일 다 끝났어요? 라비던에 돌아가면 더 안 해도 돼?”

“마무리할 게 아직 더 남아 있어요.”

“또 맨날 새벽에 자겠네.”

라미엘은 루이반으로 돌아가서도 지금처럼 제대로 잘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벽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더라도 이전처럼 컨디션이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레이가 있어서 괜찮을 겁니다.”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졸린 눈으로도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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