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금의환향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주일 만에 주인 내외가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짐 둬야 하니까 비워 두고.”
윌포프도 덩달아 바빴다.
라미엘이 수장이 되고 나서 공식 행사를 위해 이토록 길게 자리를 비운 적은 처음이었다.
수장 없는 저택이라도 우수한 인력들이 빈틈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평소와 크게 달라지거나 해이해지는 일은 없었다. 평상시와 똑같이 루이반 저택은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맞이했다.
다만 묘하게 고요했다. 사람 한 명 없다고 이 큰 저택의 어딘가가 허전하다고 느껴지니 새삼 수장의 존재감이 실감 나는 부분이었다.
아직도 라미엘의 출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금의 저택 분위기를 보면 명실공히 라미엘이 루이반의 주인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툭.
바쁘게 돌아다니던 윌포프의 발치에 푹신한 방석이 걸렸다. 예전에는 사람들만 보면 좋아서 꼬리를 치던 검은 개는 방석 위에 죽은 듯 엎드려서 축 처져 있었다.
방석 위에 어지러이 놓인 물건들과 시무룩한 개를 보며 윌포프는 처음으로 푸엥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금방 오실 거다.”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윌포프의 목소리에 푸엥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꼬리를 가볍게 두어 번 흔들었다.
담당 하인들이 마님이 없는 기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보살피고 야심차게 준비한 의상을 입은 푸엥은 제 주인이 오는 것도 모르고 여전히 무기력했다.
제가 보기에도 기운 없는 푸엥이 딱해 보이는데 마님이 보시면 얼마나 더 놀랄지 안 봐도 훤했다. 담당 하인들도 그걸 아는지 푸엥의 기운을 돋우려고 마님이 오신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도착하셨습니다!”
공작 부부가 탄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입구에 서서 맞이할 준비를 했다. 간만에 가벼운 긴장감이 느껴진다.
“보인다.”
마차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자 눈앞에 루이반 저택이 보였다.
베롬에서 언제나 느껴지던, 공기 중에 녹아 있는 바다 냄새는 사라지고 차갑고 버석한 공기가 폐까지 쭉 들어오는 듯했다.
배에서도 열차에서도 라미엘은 일 때문에 바빴다. 테일러가 긴급하게 보낸 일거리들은 귀갓길에도 그를 편히 쉬지 못하게 했다.
“베롬이랑 확실히 공기가 다르긴 하네요. 공기가 날카로워요. 엄청 차.”
열차를 타러 가는 길이나 마차를 탈 때 잠깐 외부 이동만 했던 터라 확실하게 와 닿지 않던 차이가 이제야 실감이 났다.
베롬에 가 있던 동안 라비던은 착실하게 더 추워지고 있었다. 레이가 말을 하자 입김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라엘, 눈은 언제 올까요?”
레이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창문을 닫았다.
“눈 좋아해요?”
“눈 내리는 광경을 좋아해요. 눈이 내리는 날 이불 속에 콕 파묻혀서…….”
지난겨울엔 보일러가 도는 따끈한 바닥에 두툼한 이불을 깔아 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귤 까먹으며 TV를 보거나 휴대 전화로 게임을 했다.
한국에선 겨울에 바닥에 이불을 깔고 그 속에서 귤을 까먹는 게 최고의 일상이라고 했다. 처음엔 이해 못 하던 그 말은 한국 생활 3년 차가 되면서 뼛속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리담엔 안타깝게도 귤이 자라지 않았다. 가장 비슷한 게 껍질이 얇아서 손으로 벗기는 진주황색 루시 오렌지 정도였다.
“오렌지를 먹을 거예요.”
초겨울에 수확을 하는 특이한 오렌지였기에 지금 같은 시기에 먹으려면 평소보다 비싼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루이반이고 마님이 먹고 싶다는 오렌지를 구해 오는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니 마음 편히 즐길 것이다.
“라엘은? 눈 좋아해요? 눈 오면 뭘 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눈이 오는 날은 여느 겨울날보다 따뜻하다고 했지만 그에게는 더 춥게 느껴졌다. 눈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쌓인 눈이 얼어붙으면 그가 머물던 별채는 한층 더 추워졌다. 주변에 쌓인 눈을 쓸고 벌어진 창틈으로 들어온 눈을 맨손으로 대강 치워 내다 보면 봄이 왔다.
토벌전에 참가하게 되면서는 별채를 떠나 야외 노숙을 했고, 작년 겨울엔 토벌전 마무리를 하느라 무언가를 즐길 정신이 없었다.
지금에야 평온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가 눈을 즐기거나 여운을 찾을 사람이 아니기에 레이의 질문은 대답하기 조금 애매했다.
“눈을 즐겨 본 적이 없어서. 매년 겨울이 바빴거든요.”
레이는 그가 말한 바쁜 겨울이 어떤 것인지 대강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럼 올해가 라엘에겐 첫눈이네? 잘됐네요. 겨울엔 공작님 일이 좀 한가하죠? 이번 겨울은 나랑 같이 나태하게 즐겨 봐요. 재밌을 거예요.”
무심한 듯 사실은 아주 섬세하게 레이는 첫눈이라는 단어로 그가 겪어 왔던 눈을 자연스레 지웠다.
“내가 사냥제 우승해서 상금 많이 딴 거 알죠? 라엘 오렌지 내가 사 줄게.”
가슴을 펴고 뿌듯한 눈으로 레이가 한껏 상금 자랑을 했다. 라미엘은 그런 레이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덜컹.
마차가 저택에 도착해 멈췄다.
밖에 계단이 내려졌다.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하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마님.”
입구까지 나와 서 있는 윌포프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깐깐쟁이 집사의 얼굴을 보니 레이는 이제야 집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엘이 먼저 내린 뒤 손을 내밀어 레이를 에스코트했다.
“윌포프, 그동안 잘 있었어?”
“예, 마님. 걱정해 주신 덕분에 편히 지냈습니다.”
에스코트한 자세 그대로 레이와 라미엘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떠날 때만 해도 냉랭하던 부부 사이였는데 냉기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일주일이나 타지에 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레 화해를 한 모양이었다.
혹여나 아직까지도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부분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들어오시지요.”
윌포프가 저택의 정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택 하인들이 쭉 서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루이반에 도착했을 때처럼 각이 잘 잡힌 정식의 인사였다.
그러나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였다.
낯설고 별로 탐탁지 않아 하던 기색에서 반갑고 환영하는 느낌으로 바뀐 것이다. 아무리 표정과 기운을 갈무리한다고 해도 절로 만들어지는 분위기, 오라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가르며 무언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레이에게 꽂혔다.
“허억!”
묵직하고 커다란 무언가에 밀려 레이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레이!”
“마님!”
라미엘이 급히 레이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너무 순식간에 예상도 못 하게 벌어진 일이라 그가 제대로 손을 쓰기도 전에 레이의 몸이 쓰러졌다.
“흐어어엉. 헝! 허엉! 헝!”
“으으. 아아아, 내 새끼구나.”
총알처럼 튀어나온 것의 정체는 푸엥이었다.
레이가 떠난 이후 항상 시무룩하게 축 처져 있던 푸엥이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야말로 미사일 같은 속도로 주인을 반겼다.
“레이, 괜찮아요?”
라미엘이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의 시선에 맞추며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넘어진 레이에게 덤벼들 듯 환영하던 푸엥은 머리로 그녀의 얼굴을 쿵 박기까지 했다. 그 충격으로 순간 앞이 안 보였다. 안 본 새 부쩍 자란 푸엥은 아직 청소년이지만 대형견답게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엉덩이는 깨질 것 같고 앞은 안 보이는, 전혀 괜찮지 않은 상태지만 괜찮았다. 푸엥의 격한 환영에 레이는 아픈 와중에도 코가 찡해졌다.
“나 괜찮아. 다들 물러나.”
마님의 사고에 하인들이 새파랗게 질려 푸엥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레이의 저지에 다들 사색이 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푸엥의 혀가 레이의 온 얼굴을 축축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주인을 보는 탓에 보통 흥분한 게 아니었다.
작은 콧구멍에서 헝헝대는 콧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푸엥은 주인이 닳을 정도로 핥다 못해 뱅글뱅글 자리에서 돌며 쉴 새 없이 빠르고 거칠게 흔들리는 꼬리로 레이를 후려쳤다.
“어어윽.”
꼬리에 철심이라도 박았는지 맞은 곳이 얼얼할 지경이다. 레이가 아파하자 라미엘이 바로 푸엥을 힘으로 떼어 놓았다.
“레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읏.”
한참이나 레이의 품에 안겨 있던 푸엥은 옆에 다가온 라미엘에게도 뽀뽀를 퍼부었다. 푸엥 담당 펫 시터 크레하는 푸엥의 격렬한 환영 인사를 보고 슬쩍 연무장으로 몸을 피한 지 오래였다.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하네요.”
“앞도 안 보였던 겁니까.”
라미엘이 안아 들려고 하자 레이가 그의 팔을 잡고 저지했다.
“일시적인 충격이었어요. 보여요. 잘 보여.”
라미엘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키고 보니 주위 사람들의 걱정 어린 얼굴과 푸엥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나. 내 새끼! 이게 뭐야.”
오랜만에 제대로 바라보게 된 푸엥은 귀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바로 레이가 사냥제 때 입은 옷과 똑같이 생긴 훈련복이었다.
“아우, 예뻐. 울 애기 사냥 데려갔어야 했네. 누가 이렇게 멋진 걸 입혀 준 거야?”
푸엥의 격렬한 환영 덕에 뒤늦게 발견된 회심의 역작이 드디어 마님 눈에 들었다.
레이가 없는 동안 푸엥 담당 하인들은 극진히 푸엥을 챙겼다. 검은 개에 대한 미신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님 마음에 들려면 마님처럼 생각하고 푸엥을 챙겨야 했다.
마님은 푸엥을 자기 자식처럼 키우고 계셨다. ‘내 새끼’라고 칭하고 있을 정도니 그 정성은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하인들은 생각했다. 푸엥을 정말 루이반 부부 2세로 여기기로.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드러났다.
마님이 몹시 기뻐하며 푸엥을 챙긴 하인을 모두 불러 노고를 치하했고 이름까지 일일이 불러 주었다. 일주일간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들어, 어?”
뜨뜻한 무언가가 레이의 인중에 툭 떨어졌다.
“이런.”
모두의 경악한 얼굴 뒤로 라미엘이 놀란 목소리를 내며 손수건을 꺼내 급히 레이의 코에 가져다 댔다. 흰 손수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쩐지 눈앞에 별이 번쩍 보이더라니.”
순간 앞이 안 보일 정도의 충격을 받았으니 코가 터질 만도 했다. 인생 첫 코피는 푸엥의 격한 환영의 결과가 되었다.
“레이, 안겨요.”
코피가 났다고 심히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거절하려던 레이의 눈에 입구에 놓인 푸엥의 방석이 들어왔다.
“이거 뭐야? 누가 갖다 놨어?”
레이와 함께 있던 방에 두던 푸엥 전용석이었다. 푸엥이 다 자라도 공간이 남을 만큼 커다란 방석인데 그게 입구에 있었다.
방석 안에는 푸엥이 자주 갖고 노는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외에도 레이가 종종 덮고 있던 작은 담요와 실내화 세 켤레까지도 들어 있었다.
“그게, 푸엥이…….”
레이가 없는 이틀까지 푸엥은 괜찮았다. 레이를 찾듯이 계속 저택을 헤매긴 했지만 밥도 곧잘 먹고 산책도 잘 나갔다. 전용 공원에서 신나게 뛰어 놀기도 했다.
그런데 사흘이 되고도 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푸엥이 낑낑대며 주인을 찾아 헤매는 데 온 하루를 쓰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 노는 줄 알았던 것이 알고 보니 레이를 찾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며칠을 뒤져도 이 공간에 주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푸엥은 레이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입구에 자기 방석을 가져다 두고 꼼짝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레이와 머물던 방에서 그녀의 냄새가 남은 물건들을 하나씩 물고 와 방석에 두는 일도 이어졌다. 하인들이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아도 도로 가지고 와서 제 품에 안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푸엥이 어찌 지냈는지 들은 레이는 눈물도 펑펑 쏟아 내고야 말았다.
손수건을 피와 눈물로 흠뻑 적시던 레이는 라미엘의 품에 안긴 채 루이반 저택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