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첫눈
푸엥이 진정되고 마님의 컨디션도 완전히 회복되고 나서야 하인들은 저택 중앙 홀에 쌓인 샤냥제 전리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승 상금 상자가 둘이네요?”
짐을 정리하던 하인이 똑같은 상자 두 개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그거.”
레이가 뿌듯한 얼굴로 자랑을 하려는 때, 저택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라미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레하를 선두로 우르르 몰려오는 루이반 기사들이 보였다.
“아하.”
그들은 무슨 일인지 너무 잘 알겠다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내가 받았어! 올해 내가 2부 우승이야!”
“우와, 세상에! 대단하세요!”
“우승 축하드립니다, 마님!”
저택 하인들의 탄성 뒤로 기사들의 우렁찬 축하가 이어졌다.
“마님! 우승 소식 들었습니다!”
“경축드립니다!”
“마님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곰이랑 늑대 잡으셨다면서요!”
“우리 마님 실력에 여우 같은 건 너무 쉬울 줄 알았습니다!”
기사들의 말에 저택 하인들뿐만 아니라 윌포프와 테일러까지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마님께서 뭘 잡으셨다고?”
“마님, 곰이랑 네?”
라미엘의 우승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축하할 인사말이나 축하 식사 준비는 다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곰과 늑대를 잡아 2부 희대의 결과를 낸 레이의 우승에 밀려 그 누구에게도 라미엘의 우승은 화제가 되지 못했다.
***
“이걸 찾았어?”
레이가 잃어버렸던 탄과 촉이 사냥감과 함께 돌아왔다.
“네. 절벽 근처에서 찾아왔습니다.”
“거기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케이와 엘은 다시금 루이반의 레이 담당 하녀로 임무 수행을 시작했다.
레이는 석궁 케이스 안에 탄과 촉도 함께 넣어 잘 정리해 두었다. 앞으로 이걸 또 쓰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히 당분간은 안녕이었다.
“석궁 원래 두던 자리에 갖다 둬.”
“네, 알겠습니다.”
“난 그럼 푸엥 산책 다녀올게. 두 사람은 여기 있어. 나 공원만 갔다 올 거야.”
“예,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산책 소리에 발치에 있던 푸엥이 잽싸게 줄을 입에 물고 와 꼬리를 흔들었다.
“가자.”
레이가 푸엥의 몸에 줄을 채우고 저택을 나섰다.
“너무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개가 마님 말을 저렇게 잘 알아듣지?”
“그러니까. 검은 개가 머리가 좋은 걸까? 어제 봤어? 마님이 차 마시고 싶다니까 주전자랑 컵 물고 온 거.”
“봤지. 그거 보고 다들 놀라서 말도 못 했잖아.”
엘과 케이가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푸엥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마님과 푸엥 뒤로 기사 둘이 조용히 따라붙는 모습을 확인한 두 사람은 레이의 방 정리를 시작했다.
“아후, 푸엥. 우리 이제 좀 쉬자.”
공 던져 주기 하다 팔 빠지는 줄 알았다. 그동안 꾸준히 훈련받아 온 체력이 있어 방심했는데 강아지의 체력은 수준이 남달랐다. 레이는 자신이 백날 운동을 해도 푸엥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레이가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 몸을 깊게 기대앉자 푸엥이 껑충 뛰어올라 레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푸엥의 공원에는 쉼터 말고도 여기저기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레이가 푸엥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자주 쉬던 곳에 하나씩 생긴 것이었다.
“너 때문에 나도 운동이 돼서 덥다, 더워.”
평소보다 조금 훈훈하다고 느껴지는 날이었다. 푹해 봤자 겨울이지만 매섭게 볼을 스치는 칼바람이 불지 않는 것만으로도 따뜻했다.
오늘은 유독 저택이 고요하다고 생각되는 찰나였다.
“응?”
뺨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톡 떨어졌다. 레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덩어리가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라미엘과 눈 이야기했던 게 씨가 되었는지 루이반에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첫눈이 내렸다.
12월 말이나 1월 초면 내리던 눈이 올해는 2월 초가 되어서야 왔다. 예년에 비해 유독 늦었다.
하지만 늦은 만큼 구름이 눈을 많이 모아 두었는지 매년 첫눈은 가볍게 흩날리고 끝이 났는데 지금은 눈발이 점점 굵직하게 변하고 있었다.
“와아.”
하늘을 보고 있는 레이의 얼굴 위에도, 푸엥의 코 위에도 흰 눈이 포르르 떨어져 내렸다.
“푸엥. 눈 쌓일 것 같아, 그치? 엄청 많이 온다.”
레이가 푸엥의 몸에 떨어진 눈을 손으로 쓸어 내며 다른 손으로 푸엥의 코를 톡 눌렀다.
“내 새끼 신발 준비해야겠네.”
“멍!”
눈이 펑펑 내리는데도 마님은 푸엥과 공원에서 꼼짝도 않고 눈을 즐기고 계시는 중이다.
눈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직접 눈을 맞고 싶으신지 천장이 없는 곳의 벤치에 앉아 계셨다.
레이의 수호 기사들은 마님의 건강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 저택으로 가시길 종용해야 할지 조금 더 눈을 즐기시게 두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아. 맞다. 오렌지.”
한참 눈을 맞다가 레이는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첫눈 오면 라미엘 오렌지 사 준다고 했는데.
“지금 당장 외출, 어?”
공원 문이 열리며 이틀 내 집무실에 콕 박혀 꼼짝도 못 하던 라미엘이 모습을 보였다.
고민하던 수호 기사는 해결을 위해 라미엘에게 바로 찾아가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라미엘은 직접 이곳에 오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라엘!”
레이가 벌떡 일어나자 어깨 위에 쌓인 하얀 눈이 휘날렸다. 푸엥이 먼저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 라미엘을 마중했다.
“푸엥한테 질 수 없지.”
레이도 빠르게 달려서 라미엘에게 안겼다. 오늘도 변함없이 단단한 품이 흔들림 없이 레이를 받아 냈다.
“오늘 일 다 끝난 거예요?”
“급한 건 일단락했어요.”
집무실 창밖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굵직한 눈송이를 보자 레이와 며칠 전에 눈 이야기를 나누던 생각이 났다.
눈 내리는 광경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레이가 가장 좋아하는 창가에서 한껏 즐기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마님께서 눈 속에 오래 계시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레이의 수호 기사 하나가 와서 마님의 처우에 대한 문의를 했다.
레이가 눈 속에 있다는 소식에 그는 급하지 않은 일은 잠시 미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중요한 황실에 보낼 서류는 오전 중에 준비가 끝나 다행이었다.
테일러에게 마무리를 지시하고 윌포프를 불러 가볍고 따뜻한 담요를 받은 그는 지체 없이 저택을 나섰다.
“눈 쌓일 것 같은데. 라엘, 오늘 남은 하루 나태하게 있어도 돼요?”
없던 시간을 쥐어짜 내 막 만들어 온 것이었다.
라미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 몸에 쌓인 눈을 털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담요를 꼼꼼하게 둘러 주었다.
“레이는 눈 내릴 때 이불 속에 있어야 한다면서요.”
“내리는 눈 맞는 것도 기분 좋아서요. 이제 이불 속에서 즐길 거예요.”
라미엘은 레이 대신 익숙한 손놀림으로 푸엥의 몸에 줄을 채우고 손에 쥐었다.
“라엘, 외출 잠깐 할래요? 해요, 하자.”
라미엘이 내민 팔에 레이가 자연스레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라엘이 바쁠 것 같아서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오늘 시간 난다고 하니까 같이 갈래.”
“어딜 가려고 했어요?”
“시장이요! 내가 눈 오면 오렌지 산다고 했잖아요.”
“레이가 직접?”
“그럼요.”
겨울철 가까이 되어야 열리는 루시 오렌지는 지금 루이반 주방에도 있다.
루이반 마님이 이불 속에서 창밖 경치 구경하며 드신다고 할 것 같아 라미엘이 윌포프에게 명령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라고 하고 온 참이었다.
“아! 상금 챙겨 가야지!”
레이는 정말 상금으로 오렌지를 사 줄 생각인 듯했다.
“우리 빨리 다녀와요. 해 떨어지면 시장 문도 닫으니까.”
활짝 웃는 레이의 얼굴 위로 흰 눈송이가 사르르 떨어졌다.
요란하게 다녀오기 싫어 최대한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신구도 배제했음에도 라미엘의 존재감을 지울 순 없었다. 이 남자는 다 떨어진 천을 사포질해서 입혀도 미모가 묻히지 않을 것이다.
뭘 해도 안 되는 일은 빠르게 포기하고 두 사람은 가문의 문장이 없는 평범한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뒤늦은 첫눈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와 있었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진 시장에도 사람들이 잔뜩 나와서 눈을 즐겼다. 식당에도 제법 많은 인파가 앉아 있었다. 예상보다 많이 떠들썩하고 즐거운 분위기여서 레이도 덩달아 흥이 올랐다.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고급 상점가가 아닌 평범한 시장에 나타난 공작 부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누가 봐도 부티가 나 보이는지라, ‘저런 사람들이 이런 곳엘 다 왔네?’ 하는 시선이 있기는 했다.
“레이는 여기 와 본 적이 있나요?”
“아뇨. 실비아가 과일 사려면 여기로 와야 한대서 저도 처음 와 봤어요.”
고급 상점가에는 빵이나 디저트 종류를 파는 곳은 있어도 과일이나 채소, 고기 같은 식자재를 파는 곳이 없다. 귀족들이 직접 장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처음 와 본 것 같지 않아요.”
“시장은 몇 번 가 봤죠.”
이곳의 시장은 아니었지만.
내리는 눈송이가 큼직해지고 많아져 우산을 써야 했다. 라미엘은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방금 전 레이가 구매한 과일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레이는 가게 주인이 창고에 귀하게 보관하는 양질의 오렌지를 꺼내 오게 하고 능숙하게 흥정을 했다.
“아이, 얘 표면이 이게 뭐야. 누굴 등쳐 먹으려고 이런 걸 500파브나 불러?”
“마담께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거 좋은 거예요.”
“어허이. 뒤에 좋은 거 있는 거 다 알아요. 빨리 가져와. 그거 살 거야.”
곱게 자란 걸로 보이는 부부라 가게 주인은 오랜만에 호구 잡았다 생각했다.
적당히 말로 구슬리고 비싼 값에 팔 생각을 하는데 이게 웬걸, 여자가 보통 깐깐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최상품은 창고에 귀하게 보관 중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 뭘 듣고 온 거요?”
“여기요. 남편이 사기꾼 잡는 시장 경비대원이라 잘 알아요.”
사람만 숱하게 봐 왔던 상인은 남자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았다.
여자가 하는 말이 저를 겁주려고 하는 허튼수작이 아니란 걸 알고는 두말 않고 창고에서 양질의 과일을 꺼내 왔다. 경비대란 말에 바가지도 못 씌웠다.
“와아. 향기 봐. 진짜 좋은 거 파시네.”
“그럼요. 과일 하면 절 따라올 자가 없지요. 루이반, 아시죠? 그 가문 과일도 내가 담당합니다!”
“우와, 대박. 나 거기 진짜 잘 아는데. 실비아랑 같이 살아요.”
상인은 실비아 이름에 바로 반응했다.
“아아, 루이반 가시는구나?”
“공작 부인 전담이에요.”
“전담? 허이고. 귀한 분이시네.”
“공작 부인께 잘 전달할 테니까 이거 300파브만 깎아 줘요. 대신 여기 꺼내 온 거 오렌지 말고도 다 살게.”
라미엘을 경비대, 자신을 본인 스스로의 전담 하녀로 만든 레이는 가격 흥정에 성공하고 가게를 떠났다.
가게 주인이 가게를 찾아온 실비아에게 전담 하녀와 경비대 부부가 실은 루이반 공작 부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도 직전까지 갔다가 온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