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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75화 (75/160)

75화. 내 땅, 내 남자 (1)

마차로 가까이 다가가자 안절부절못해하며 하인이 라미엘의 짐을 받으려 했다. 주인이 짐을 든 이후 그는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두 분께서 시장에 가신다기에 윌포프가 붙여 준 하인이었다. 짐이 생기거나 흥정하는 일 등이 생겼을 때를 위해 따라온 건데 두 분은 둘이서만 있겠다고 마차에 그를 두고 나갔다.

여기서부터 제 역할이 없어진 것 같아 마음이 편칠 못했는데 한참 만에 돌아온 공작이 짐을 들고 있다.

마님이 웃으며 해 준 이야길 들으니 제값을 치른 것뿐만 아니라 흥정까지 완벽하게 성공하셔서 다행이었지만, 짐을 계속 공작이 들고 있으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당장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도 라미엘은 넘길 생각을 도통 안 했다. 하인은 까마득한 공작께 차마 짐을 달라는 말도 못 붙이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입만 벙긋대는 하인 대신 그나마 훈련으로 라미엘과 안면을 튼 적이 있는 기사가 나섰다.

“들고 계신 짐, 제게 주십시오.”

“괜찮아. 마차에서 먹을 거야.”

레이가 대답하고 라미엘의 에스코트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기 전 쌓인 눈을 대충 털어 내는 라미엘의 모습에 레이의 눈이 커졌다. 그의 한쪽 어깨에 한 뼘은 쌓여 있던 눈이 털려 나가고 있었다.

라미엘이 마차에 완전히 오르고 곧장 마차가 출발했다.

“라엘, 이쪽이 다 젖었어요.”

“눈이 워낙 많이 내리니까요.”

레이는 하나도 젖지 않았다. 눈이 쌓인 곳도 없었다.

이게 뭐라고 참 마음이 찡해졌다. 레이는 라미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창문 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눈이 펑펑 내렸다.

올해 첫눈은 폭설이었다. 눈 때문에 시설 정비를 해야 하니 처리해야 할 일들이 또 늘어나고 있는 셈이었다.

당장이라도 침대 밖을 벗어나서 일을 해야 했지만.

“라엘, 아.”

레이가 열심히 껍질을 벗겨 입에 넣어 주는 달콤한 오렌지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눈 내리는 창가 옆, 침대에 기대앉은 라미엘 옆에 레이가 있었다.

“이제 내가 할게요.”

라미엘이 레이의 손에서 과일 바구니를 가져와 오렌지 껍질을 벗겼다.

“나 이번엔 사과 먹을래요. 작은 사과도 맛있네.”

주문대로 라미엘이 체리보다 조금 큰 크기의 작은 사과를 레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흐흥.”

기분이 좋은지 레이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지금을 라미엘은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눈 오는 날이 처음으로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달콤한 첫눈의 대가는 제법 컸다. 고작 반나절을 평온히 즐긴 대가로 라미엘이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잔뜩 밀려 있었다.

눈 때문에 부서진 시설 정비 보고 건만 다섯 건이 넘었고 그런 중에 연례 보고를 위해 황실까지 다녀와야 했다.

며칠간 날짜가 바뀌는지도 모르고 일을 처리하다 보니 벌써 황실에 가는 날이 되었다.

“다 되셨습니다.”

간만에 라미엘이 치장을 했다. 치장이라고 해 봤자 머리를 싹 넘기고 정복을 차려입는 것뿐이지만 보는 이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공작 부인이 너무 넋을 잃은 얼굴을 해서 라미엘의 의상 담당 하인들은 웃지 않도록 표정 관리에 애를 써야 했다.

그들 역시도 라미엘의 옷을 입히며 찬탄을 금치 못했지만 결코 내색해선 안 되는 일이기에 꾹 눌러 참고 있던 터였다.

라미엘의 흰색 정복은 반칙 중에 반칙이었다.

“가서 다 부숴 버리고 와요.”

이 옷 하나만 입어도 세계 정복쯤 가뿐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부수라는 겁니까.”

“뭔진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라면 대륙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가서 뭐든 정복하고 와요, 라엘.”

이 말은 레이 식으로 멋지다는 소리를 최선을 다해 설명한 것이리라. 라미엘이 신호를 주자 하인들이 모두 인사를 하고 빠르게 방에서 물러났다.

“레이가 없어 태자가 아쉬워하겠어요.”

태자는 오랜만에 루이반 부부를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직까지도 부부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도니 실제로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리라.

연례 보고에 부부 동반 가능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며 라미엘에게 눈치를 줬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태자 부부 만난다고 담력 훈련을 받던 레이였다. 굳이 그녀에게 긴장되는 일을 시키거나 불편한 상황을 만들 필욘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레이도 일정이 있어 동반은 무리였다.

“내가 더 아쉬운데요. 이걸 두고 가야 하다니.”

라미엘이 오늘 미모로 황실을 점령하러 간다면, 레이는 오늘 케이틀린이 말한 둘만의 티파티 날이었다.

이번에도 향긋한 초대장이 왔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문명이 아닌 케이틀린의 이름으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박력 있게 꾹꾹 눌러쓴 글자와 말투에서 케이틀린이 단단히 벼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묻어났다.

“라엘, 가서 태자라도 정복하고 와요.”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님. 윌포프입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와.”

윌포프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언제나 표정 관리 잘하는 집사가 대놓고 안 좋은 얼굴을 하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무슨 일이지.”

“루이즈에 있는 공작령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긴급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공작 부부의 일정이 전면 취소되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저택이 소란해질 법도 하건만 루이반은 평소처럼 차분함을 유지했다.

라미엘은 황실에 급히 서를 올려 연례 보고를 차후에 드리겠다 양해를 구했고, 테일러는 약식의 연례 보고서를 작성해 황실로 보냈다.

윌포프는 저택이 어수선해지지 않도록 분위기를 정돈했다. 기사들 역시 간만에 들린 마물 소식에 출전 준비를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루이반을 이루는 유능한 인재라는 게 어떤 말인지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일이 삽시간에 이루어졌다.

“상세 보고 들어왔습니다.”

테일러가 집무실에 들어오며 방금 들어온 소식을 알렸다. 집무실엔 라미엘과 크레하, 윌포프가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9급이나 8급 정도의 약소 마물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나타났으며 공격력은 없고, 지능도 낮습니다.”

“수는?”

“그게…… 수가 문제입니다. 일단 발견된 건 십여 마리인데 인근 바다를 뒤지면 수백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속에 있어 정확한 수량 파악이 어렵습니다.”

게 모양의 마물이라고 했다. 뭍으로 올라오진 못하고 바닷속에만 있는데 일반 게보다 크기가 현저하게 크고 징그럽게 생겼다고 했다.

어부 몇몇이 접근했는데 커다란 집게에 손가락을 다쳤다고 추가 보고가 연이어 도착했다.

“마물 검사는 해 봤나?”

“아직입니다. 발견하자마자 보고 먼저 올렸다 합니다.”

해안 도시인 루이즈에서 수도 라비던의 루이반 저택까지는 열차로 일곱 시간에 마차로도 한 시간쯤 더 가야 했다. 즉시 보고가 올라왔으니 적어도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일이란 셈이었다.

“물이라……. 일단 현지 상황 파악 먼저 한다. 크레하, 루이즈로 갈 기사 다섯만 뽑아.”

“예, 알겠습니다.”

지령을 받은 크레하가 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집사는 긴급 상황이면 대형 게이트 사용을 할 수도 있으니 준비하고, 당장 황실에서 게이트 열고 마물 검사할 수 있는 마력석도 보내라고 해.”

“예, 준비하겠습니다.”

“황실에 서류 발송 건으로 게이트 사용 허락을 받아 둔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게이트 이용 각인은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테일러의 부가 설명에 윌포프는 그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라미엘도 집무실을 나서려는 찰나, 레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

잠시 모습이 안 보인다 했더니 레이는 사냥제 때처럼 훈련복 차림에 석궁을 메고 있었다.

“마물 나왔잖아요.”

“그렇긴 한데 레이가 왜 그런 복장을…….”

“내 땅에.”

루이즈의 공작력이라 함은 레이가 갖기로 한 루이즈 별장이 있는 곳이란 소리다.

“아직 밟아 보지도 못한 내 땅에 마물이라니.”

레이는 자기 땅을 위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 소식을 듣자마자 대비를 하고 등장한 것이었다.

“루이즈의 공작령이면 내 땅이잖아요. 내가 가야죠.”

그녀 딴에는 결심을 하고서 본인 나름의 무장을 하고 달려온 것인데.

“하, 레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라미엘은 웃음이 나왔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서 있는 레이가 정말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그는 거칠게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고 했다.

“왜요. 내가 가면 안 되는…….”

라미엘이 레이를 조금 거칠게 품에 안았다. 그 바람에 레이가 메고 있던 석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엘? 왜, 읍.”

조금은 성마르고 다급한 키스가 이어졌다. 레이의 입술을 깨물고 살짝 거칠게 안으로 들어온 라미엘이 온 입 안을 훑고 빨아 삼켰다.

버거울 정도로 진하게 퍼붓는 키스에 레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음, 읏…….”

살짝 라미엘의 입술을 깨물어 신호를 보내니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가 그제야 몸을 떼었다.

정신을 차리니 라미엘의 책상 위였다. 분명 그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언제 이 자세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라엘.”

마주 보이는 라미엘의 눈가는 열이 잔뜩 올라 붉었다. 금빛 눈동자에 짙게 어리는 열기에 레이도 열이 올랐다.

“내가 미쳤다고…….”

떨어져 있던 라미엘이 천천히 다가와 레이의 목에 입술을 댔다.

“당신을 마물 곁에 둘 것 같습니까.”

큰일이다.

야해. 라미엘 너무 야해!

목에다 입술 대고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거 누구한테 배운 거야!

“읏.”

가볍게 목이 물렸다. 물린 자리에 뜨거운 혀가 미끄러져 들어오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레이는 평생 마물 만날 일 없을 테니 여기 있어요.”

그것은 마물 만날 일 없게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게 정답이겠지.

“……흐읏. 그래도.”

“레이 땅, 잘 지키고 올게요.”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 담긴 느릿한 동작으로 라미엘이 레이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잔뜩 흐트러진 레이가 발간 입술을 꼭 깨물며 제가 일하던 책상 위에 누워 있다. 훈련복 단추가 열린 틈으로 자신이 아로새긴 흔적이 보였다.

아찔한 광경에 라미엘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치만 나도 가고 싶단 말이에요. 내 남자랑. 내 땅에.”

사랑스럽다.

라미엘은 처음으로 저 단어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했다.

작년 여름 황실 연회에서 봤던 지루하고 재미없던 연극이 떠올랐다. 출연 배우들이 귀족 파티에 초대될 만큼 수도 내 최고 인기인 연극이라 했다.

왕자와 남장한 기사의 사랑 이야기로 여자가 남자인 척하고 왕실 기사로 있다는 설정도 말이 안 됐지만, 왕자가 매번 기사를 보며 ‘사랑스러운 그대’를 수없이 외치는 꼴은 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와닿지도 않을 뿐더러 저런 감정을 사람에게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했는데 그 정답을 이제야 찾았다.

내 사람은 얼마든지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라미엘이 풀어낸 레이의 옷 단추를 다시 채웠다. 그가 남긴 흔적이 옷 속으로 말끔하게 숨겨졌다.

“이제 정말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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