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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76화 (76/160)

76화. 내 땅, 내 남자 (2)

라미엘이 레이를 안아 들어 집무실 의자에 조심스레 앉혔다.

“라엘…….”

“자꾸 위험한 짓하려고 하면.”

라미엘이 레이의 목 위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남길 거예요. 레이가 감출 수 없게.”

라미엘의 말에 레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 누가, 누가 여기 하라고 허락이나 한대요?”

“나 역시도 레이가 위험한 곳에 오는 거, 허락 못 해요.”

이거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라미엘이 흰 정복 입고 색 가득한 눈빛으로 지그시 보면서 한층 낮아지고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 완전 반칙이라고!

“그럼 위험하지 않으면?”

“당연히 올 수 있죠, 레이 땅인데.”

“마물 아니면 바로 가 볼 거예요.”

“……그렇다면 레이에게 연락할게요.”

“연락은 당연한 거잖아요.”

아무래도 레이가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라미엘은 다시 강하게 그녀를 말렸다.

“레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안 됩니다. 저택 떠나지 말고 있어요.”

“라엘이야말로 조심해요. 절대 위험한 짓하지 말고, 혹 마물이 맞으면 아무리 약하더라도 라엘은 손도 대지 말고 황실 기사단 불러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라미엘의 허락에 테일러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공작이 재깍 집무실 밖으로 나와 있지 않다 싶더니 마님과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테일러는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구나 했다. 레이알렉시스가 ‘진짜’ 마님이 된 것이다.

“게이트 이용 허가 완료되었습니다.”

테일러가 보고를 올렸다. 전례 없던 속도로 허가가 나온 걸 보니 마물이라 황실에서도 잴 것 없이 바로 허락해 준 듯했다.

황실에서는 게이트를 사용할 때 허가용 인을 하나 내려 주는데 이것이 있어야만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이전에 서류 건으로 받아 둔 인이 아직 유효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허가가 승인되자마자 게이트 사용이 가능했다. 이제 라미엘의 출발만 남은 상황이었다.

“라엘, 대답은?”

라미엘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지만 대답이라도 들어 둬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 레이는 급히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럴게요.”

테일러는 두 사람이 앞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의 ‘반말’ 추궁에 라미엘이 순순히 대답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으음, 라엘 대답이 뭔가 성에 좀 안 차는데.”

그리고 이어진 레이의 말에 이번엔 아예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뻔했다.

‘설마? 설마!’

권력 구도가 ‘마님>공작님’인가?

‘아니다, 지금은 이런 거 따질 때가 아니지. 아니고말고.’

테일러가 급히 입을 열었다.

“두 분 말씀 중에 감히, 정말 죄송합니다만 빨리 가셔야 합니다. 게이트가 이미 열려 있어서요.”

테일러의 말에 라미엘은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그는 앞에서 대기하던 크레하가 내민 검을 받아 들고 함께 시찰을 나갈 기사들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 사이를 부유하던 더운 공기도 사라졌고, 처음부터 라미엘이 없던 것처럼 휑한 공간이 되었다.

“큰일 없겠지?”

레이의 시선이 라미엘이 떠난 곳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네. 9급이나 8급 마물은 최약체입니다. 일반 동물에게도 잡아먹히는 수준이니 마님께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수가 많다고 하니까 좀…….”

“1급 마물도 잡으셨던 용맹한 기사가 라미엘 님이십니다. 마음 놓으세요.”

레이가 진심으로 라미엘을 걱정하고 있는 게 선명하게 보인다. 테일러는 그런 마님을 진심으로 다독였다.

***

게이트를 통해 라미엘이 소식을 전했다.

「마물 아님.」

저 한 문장에 루이반 사람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소식이 오기까지 몇 시간을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마물이 아닌데 왜 안 오지?”

라미엘은 소식만 보내 놓고 정작 본인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후처리가 필요하신 듯합니다. 오랜만에 루이즈 땅에 가셨으니 여러모로 보고받으실 일도 많으실 거고요.”

베르니 때 같은 건가.

테일러의 말에도 레이는 영 신통치 않은 표정이었다.

“마물 아니면 내가 가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마님께선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택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게이트가 열리더니 라미엘과 함께 루이즈로 떠났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은 어때? 어떻게 됐어? 라미엘은? 왜 너희만 와?”

쏟아지는 마님의 질문에 기사들은 무엇부터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개중 가장 눈치가 빠른 기사가 레이가 가장 궁금해할 것부터 대답을 했다.

“공작님께선 무탈하시고, 마물은 특이 생물인 것으로 밝혀져서 지금 그 처리를 논의 중이십니다. 개체 수가 많아 지금 모조리 처리하긴 어렵고, 황실에서 보내오는 사람들과 함께 처리하셔야 해서 며칠 걸릴 것 같다 하셨습니다.”

라미엘이 일 처리를 지시한 서류들을 받아 온 기사가 테일러에게 전달했다.

테일러가 문서를 확인해 보니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도 꽤나 묵직했다. 이 정도라면 주인은 최소 엿새 이상은 루이즈에 있을 듯싶었다.

봄이 오기 직전, 폭설부터 특이 생물까지 일이 잦다.

“올해 봄이 혹독하게 오려나.”

테일러가 한숨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라엘은 언제나 올 수 있는데?”

레이가 테일러의 혼잣말을 듣고 물었다.

“보내신 문서를 보아하니 최소 엿새는 걸리실 듯합니다만, 그보다 더 길어질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최소 6일이라니. 대체 무슨 생물이 나타났기에 저 정도가 걸리는 걸까.

“마님, 저는 공작께서 보내 주신 일들 처리하러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돌아온 라미엘이 바로 서명만 할 수 있도록 일을 마무리하려면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했다.

“응, 테일러 수고해.”

테일러가 저 정도면 윌포프도 정신이 없을 터였다. 루이반에 일이 생기면 라미엘을 제외하고 언제나 가장 바빠지는 건 그 두 사람이다.

“게이트는 이제 못 써?”

“예. 황실에서 허가해 준 마지막 이동으로 공작님께서 저희를 보내 주셨습니다.”

라미엘의 귀환엔 예정된 바가 없으니 사용 기한이 있는 게이트를 기사들이 이용한 것이다.

“음…….”

레이가 차라리 제가 게이트를 이용해서 갈 걸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저, 마님.”

“응?”

“공작님께서 절대 마님은 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다른 기사가 살을 붙여 설명했다.

“아직 루이즈 정비가 안 되었고, 특이 생물이 어떤 건지 정확히 확인될 때까지는 위험하시니 여기 계시란 말씀이셨습니다.”

라미엘은 레이가 덜컥 루이즈에 올까 봐 최후까지 걱정을 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레이는 루이즈에 갈 생각이었다. 마물도 아니니 가서 내 땅, 내 남자가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려고 했다.

라미엘은 그런 레이를 빠르게 파악하고 절대 못 오게 게이트로 가는 기사들에게까지 당부를 해 둔 것이었다.

***

라미엘의 예상은 맞았으나 레이의 행동력과 의지까진 막지 못했다.

레이는 루이즈로 향했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마님의 결심을 꺾을 순 없었다.

마님에게 약한 케이와 엘은 이미 레이의 짐을 싸고 있었다. 그 옆에서 톰도 조용히 제 검을 챙겨 들었고 팔이 아직 안 나은 허디는 원통해했다.

윌포프와 테일러도 당연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집안 모든 이들이 말린다 해도 지금 루이반의 최고위자는 공작 부인인 레이였다.

결국 레이의 수호 기사 둘 중 하나는 크레하로 데려간다는 조건과 라미엘이 명령 불이행을 이유로 처벌을 내릴 시 무조건 막아 준다는 마님의 호언장담 아래 그들은 레이를 루이즈로 보냈다.

“바다 냄새.”

마차 창문을 여니 느껴지는 바람에서 베롬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냄새의 농도가 좀 더 묵직하다는 점이었다.

신전과 휴양지가 주력인 섬 베롬과 달리 루이즈는 해안 도시로 어업을 도시의 주력 산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오는 해산물이 리담에 유통되는 해산물의 70퍼센트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풍부한 어획량을 자랑했다.

르아넬로는 이런 루이즈에 열차를 놓는 공사 중이었다.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 이용할 수는 없었고, 라비던과 루이즈 간 유일한 열차인 경쟁 업체의 것을 이용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레이는 르아넬로 공사 현장을 찾아가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인부들에게 간식까지 건네주고 왔다. 지금 속도라면 아마 봄이 되기 전에 르아넬로의 열차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레이가 크레하의 에스코트로 마차에서 내렸다.

“후아.”

루이즈의 바람은 바다 기운을 잔뜩 품어 무겁고 축축하고 차가웠다. 처음엔 별로 춥게 느껴지지 않으나 시간이 지나면 내륙보다 배로 추워지는 날씨였다.

그래서 의상실 하인들은 마님의 건강을 위해 옷을 몇 겹이나 둘둘 싸 입혀 보냈다. 두툼한 속바지를 몇 벌이나 입히고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혔다.

챙이 큰 커다란 모자는 안감이 폭신한 양털로 되어 있었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천으로 턱 아래까지 묶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두툼하게 무장된 덕분에 약간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레이가 루이즈 별장에 입성했다.

소식도 없이 불쑥 나타난 공작 부인에 하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했던 작은 소란 외에 루이즈 별장은 조용했다.

베롬에서 봤던 것과 정말 똑같이 생긴 별장은 내부 구성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는 쉽게 서재 겸 집무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공작님은 어디 있어? 왜 여기 없지?”

“오전에 시찰 나가신 뒤, 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황실에서 보낸 사자를 기다리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첫차를 타고 출발했지만 도착했을 땐 점심이 훌쩍 지난 오후였다. 그런 시간인데 오전에 나간 사람이 아직 안 왔다니.

“그럼 아직도 바다에 있단 말이야?”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바다에 있다는 건 그 칼바람을 직통으로 맞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 공작께서 옷은 좀 챙겨 입었어?”

“방한 망토 입고 가셨습니다.”

레이는 라비던에서 가져온 가방에서 라미엘의 코트를 꺼냈다. 제대로 옷도 안 챙겨 입고 떠났는데 별장에 그가 입을 만한 겉옷이 있을 리 없을 터였다.

“가져오길 잘했다.”

방한 마법이 걸린 값비싼 코트로, 이걸 입은 라미엘을 상상하며 욕심 그득한 마음으로 챙겨 넣은 것이었다.

“다녀올게!”

레이는 라미엘의 코트를 챙겨 들고 공작령 바다로 향했다.

빠르게 별장을 벗어나는 공작 부인 뒤로 따르는 기사만 넷이었다. 전담 하녀이면서 동시에 기사이기도 한 무인 둘과 남기사 둘.

그중 하나가 루이반가의 기사단장이니 루이즈 별장의 하인들은 저 멀리서 소문으로나 듣던 공작의 아내 사랑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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