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특이 생물
“저기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라미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월등한 신체 조건에 혼자 조명이라도 단 것 같은 사람.
레이가 자신의 루이즈행을 극구 비밀로 해 달라고 했기에 라미엘은 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뒤로 슬쩍 다가가 볼까.”
인부 여럿이 바다에 그물 같은 것을 치고 있었고 라미엘은 그들을 감독하고 있는 듯했다.
“너희는 여기 있어.”
라미엘이 기척에 예민하니 기사 넷이 뿜는 기운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마님,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희가 죽습니다.”
크레하가 대답했다.
“코앞에 라엘이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희 가만 보면 날 너무 과잉보호해.”
특이 생물이 등장한 상태였다. 마물이 아니어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확인이 안 되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레이를 더 보호해야 했다.
더불어 공작 부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루이반은 줄초상을 치르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저희는 그 어떤 위험에서…….”
“자꾸 토 달고 내 말 안 들으면 여기까지 오게 된 거로 라엘이 화낼 때 너희 보호 안 해 줄 거야.”
뭐 이딴 협박이 다 있어!
레이의 으름장에 크레하와 기사들은 기가 찼으나 놀랍게도 제대로 먹혔다. 그들이 뻐끔대는 사이 마님이 뒤뚱뒤뚱, 그러나 맹렬히 공작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으니까.
와중에.
‘너희, 소리 내면 죽어.’
뒤를 돌아 입모양으로 추가 협박까지 하고 있다.
자박자박.
라미엘의 귀에 좁은 보폭으로 모래 위를 종종거리며 빠르게 걷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무시해 버릴 작고 약한 기척이었지만 발을 디뎠다가 다시 박차는 박자가 왠지 익숙했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마는 기척이다.
기대.
라미엘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그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반쯤은 가린 커다란 모자 안으로 푸른 하늘이 반짝인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레이가 라미엘에게 넘어지고 있었다.
“어엇? 앗!”
라미엘은 품으로 쏟아지는 온기를 꼭 껴안으며 푸른 하늘을 반겼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진짜 조심히 왔는데!”
라미엘을 뒤에서 옷으로 감싸 주며 덮치려고 했건만 주인공이 뒤를 돌아 버리는 바람에 대실패였다.
마치 알고 있던 것처럼, 놀라서 발까지 헛디뎌 넘어질 뻔한 저를 라미엘은 팔을 벌려 품으로 받아 주었다.
“기사들 기척 느낀 거죠? 아유, 내가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레이인 거 알았어요.”
“정말? 에이, 재미없다.”
그러면서 레이는 주섬주섬 가져온 코트를 라미엘에게 내밀었다.
“춥죠? 빨리 이거 입어요. 라엘 주려고 루이반에서부터 챙겨 온 거야.”
라미엘은 레이가 내민 옷을 받아 들고 잠시 말없이 그걸 내려다보았다.
“…….”
입지 않았어도 따뜻했다. 멀리서부터 이걸 챙겨 왔을 레이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의 가슴속에도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다.
“라엘?”
“네.”
“옷에 무슨 문제 있어요? 아니면 이 옷 싫어해요?”
라미엘이 잠자코 있기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옷은 아닐까, 싫어해서 처박아 뒀던 건 아닌지 마음이 덜컥했다. 과거가 워낙 아픈 사람이니 혹시나 잘못 건드린 걸까, 하는 우려가 든다.
레이가 조용히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라미엘은 빠르게 코트를 입었다. 손에 쥐고 있기만 해도 따뜻하게 그를 감싸던 옷이 포근하게 바다 바람을 막아 냈다.
“이런 걸 챙겨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그런 겁니다.”
멋들어진 코트를 입은 라미엘이 천사처럼 웃고 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미소였다.
코트 가져오길 진짜 정말 잘했어.
레이는 속으로 마구 박수를 쳤다.
“기사들, 윌포프나 테일러, 하인들 전부 안 혼낼 거죠? 벌주지 마요. 내가 못 가게 하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해서 온 거니까.”
마님이라면 껌뻑 죽는 하인들이 대다수니 진짜 마물이 나타나 위험한 게 아니고서야 레이가 오겠다고 작정하면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라엘, 나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알겠던데요.”
궁극의 경지에 오른 자가 느낄 수 있는 그런 건가.
라미엘은 어리둥절해하는 레이를 다시 한번 가볍게 껴안으며 말했다.
“코트, 고마워요.”
레이가 방긋 웃으며 라미엘의 허리를 꼭 껴안았을 때.
“다 됐습니다!”
해안가로 한 남자가 다가오며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외쳤다.
“뭐가 다 돼요?”
“그 생물이 뭔지 확인될 때까지 가둬 두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해가 되는 생물인지 알 수 없어 일단 눈에 보이는 생물들을 모두 커다란 어망에 가둬 두기로 했다.
처음 발견된 건 십여 마리였지만 점점 많아져 기백은 족히 넘는 엄청난 수가 되었다. 많은 개체 수 때문에 작업이 길어져 이제 끝이 난 것이었다.
라미엘은 중간의 돌발 상황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 감독관으로 자리를 지키던 중이었다. 레이를 품에서 떼어 놓은 그가 기사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레이를 데려가라는 신호였지만, 레이는 잽싸게 라미엘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 볼래요.”
레이의 눈빛을 보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눈치였다.
“레이, 절대 가까이 가지 말고…….”
“알았어요. 구경만 할게.”
최근에 멸종 위기 생명체도 만나 봤는데 특이 생물까지 더해지다니. 사냥제 일도 그렇고 올해는 동물이 레이의 삶을 다채롭게 하고 있는 중이다.
영 내켜하지 않는 라미엘의 걸음을 따라 해안에 가까이 가니 커다란 검은 바위를 중심으로 무언가 어둑한 게 한가득 모여 있었다.
라미엘이 레이를 자신의 몸 뒤로 보냈다. 이 이상은 가까이 가지 말라는 신호였다.
“이겁니다.”
그가 손으로 특이 생물을 가리켰다.
“……어?”
레이가 저도 모르게 라미엘을 지나 특이 생물에게 접근했다.
“레이, 위험하니까 가까이 다가가지……!”
“마, 마님!”
레이는 해안가 그물 안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회색빛 생물들을 보고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갔다.
“이건, 이게…….”
그러곤 뭍 쪽에 가까운 생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게와 비슷한 생물이라고 했다.
레이는 집게발 부분에 찔리지 않도록 집게 아래쪽 부분의 다리를 양손으로 하나씩 잡아 물 위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겨울 바다에 손이 찢어질 듯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설마.”
이거, 이 생물, 그거 아냐?
“레이. 당장 손 놔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제발.”
마물이 아니란 것만 밝혀졌지, 게처럼 생겼다는 생김새 말고는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생물이었다.
어쩌자고 저렇게 덜컥 겁도 없이 잡아 든 건지, 머릿속을 스치는 상상에 라미엘은 아찔해졌다.
“레이, 내가 힘쓰게 하지…….”
“이거 아무리 봐도 그건데.”
라미엘과 기사들, 게를 잡아 두는 작업을 하던 인부들 모두 경악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이 생명체는 아무리 봐도 레이가 아는 생물이었다.
이 특이 생물은 유주가 연재 사이트에서 작가 대상을 받았을 때 상금으로 먹었던 킹크랩과 똑같이 생긴 게였다.
살 떨리게 비싼 가격에 한국 생활 10년 동안 딱 한 번 먹어 본 그 킹크랩. 입에서 퍼지는 달달한 게살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충격적이게도 맛있었다. 게가 크니 먹을 것도 많았고 게딱지에 비벼져 나온 밥을 먹었을 땐 천국이 여기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가격은 지옥 같았지만.
한 번 먹은 이후 틈만 나면 킹크랩을 검색해 보고 또 보고, 저렴한 곳을 찾아보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심하면 검색하는 게 킹크랩 시세였다.
레이가 한국에서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크게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친구 유주에 대한 고마움, 또 다른 것들은 해외여행과 킹크랩이었다.
돌아오기 직전까지 폰으로 내내 보고 또 보던 게 비행기 탑승 후기와 킹크랩 글이었다.
“레이, 대체 무슨 소리예요. 설마 이게 뭔지 알고 있는 겁니까?”
“우리가 익히 먹는 게 말고 조금 다른 종류긴 하지만 특이 생물은 아니고 게 종류가 맞아요.”
킹크랩이라고 생각하니 살아 있는 게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침이 고였다.
리담엔 킹크랩이나 대게, 랍스터 같은 큰 갑각류가 없었다. 꽃게 정도가 최선이었고 그나마도 자주 먹는 요리는 아니었다.
게는 주식이라기보다는 먹을 게 정 없을 때나 먹는다는 개념이었다. 전문적으로 게를 잡아 팔지 않고 생선을 잡다가 어쩌다 우연하게 딸려 온 것을 먹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게의 살을 발라 내 버터에 볶아 다른 요리에 곁들임으로 장식처럼 차리거나 전채 요리 정도로 활용되는 수준이었다.
리담에서 게는 맛이 문제가 아니라 양이 문제였다. 너무 적은 살 때문에 인기가 없는 상품이었다.
“알겠으니 일단 내려놔요. 동상 걸려요.”
“네, 그럴게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는 다시 바다로 게를 돌려보냈다.
레이의 손에서 게가 빠져나가자마자 라미엘은 그녀의 손에 묻은 물기를 자신의 망토로 닦아 낸 뒤 꼭 감쌌다.
“이거 지금 첫 발견인 거 맞죠?”
“네. 확인을 위해 황실에서 사자를 보낸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왜인지 굉장히 기뻐하는 표정의 레이를 보니 마음은 심란한데 와중에 얼굴은 그녀를 따라 풀어지려고 했다.
“정말로, 진짜로 루이반 공작령에서 처음, 확실하죠?”
“처음입니다. 하아, 그래서 레이한테 계속 조심하라고 한 건데.”
“왜요? 내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라엘은 또 귀찮은 짓을 해야 해서?”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영애가 잘못된다면 이 귀찮은 짓을 다시 한번 해야 합니다.”
몇 개월 전 이야기인데 몇 년이나 된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레이의 손을 당연한 듯 쥐고 있는 제 손이 낯설지 않다.
테라스에서 레이알렉시스를 처음으로 제대로 대면하게 됐던 날, 놀라서 넘어지던 그녀를 부축하던 일이 생각났다. 테라스로 나와서 장갑을 벗어 던진 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맨손인 채였다.
지금처럼 맨손으로 레이에게 손을 댔다. 사람과의 접촉이 불쾌하고 불편한데도 그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손을 씻어 낼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새삼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라미엘은 놀랐다.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구나.’
라미엘이 조금 더 꼭 레이의 손을 잡았다. 한 손에도 다 잡힐 것 같은 작은 양손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꼼질거리며 온기를 내뿜었다.